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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10/10 12:09:05
Name fd테란
Subject [일반] 심야 데이트 후기 - 3년간의 부질없는 재활훈련 -
'3일 후에 시간있어? 나 서울 올라갈건데 하룻밤만 놀아줘!'





별 특이할 점을 찾아 볼 수 없는 문자 한통을 받고 깊은 고민에 빠졌습니다.

굳이 특이한 점을 찾아보자면 이 문자를 보낸 주인공이 10년동안 알고지낸 여자사람이라는 점.
어디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좋은 의남매로 지내다가 남자사람이 결국 감정의 선을 넘어버렸다는 점
남자사람이 400km를 찾아가서 이미 남자친구가 있는 여자사람에게 결국 고백을 하면서 시원하게 차였다는 점

그리고 3년의 세월이 흘렀다는 점일까요.

물론 고백한뒤로 처음 연락을 주고 받은것은 아닙니다.
여자사람의 헌신적인 배려와 약간의 불필요한 노력끝에 다시 좋은 의남매로 돌아가는데는 성공하였지만,
고백한뒤로  직접얼굴을 보는것은 3년만입니다.

3년이라는 시간 사이에 몇번의 볼 수 있는 기회가 분명 있었지만
남자사람의 상사병의 재발방지차원과 재활기간이 끝나지 않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몇번의 만남의 기회는 매번 다음을 기약하게 되었고 여자사람 역시 굳이 만남을 강요하진 않았습니다.
사실 서로 얼굴 못봐서 죽을정도로 애정과 사랑과 관심이 넘치는 그런 사이였으면 이미 만리장성을 쌓았어도 열두번을 더 쌓았겠습니다만...

남자사람은 3년간의 재활기간이 이제 끝났을거라는 자가진단을 내리고 오케이 사인을 내립니다.


10월 8일 금요일10시 서울역안

만나기 10분전 심장박도수를 체크 해봅니다.
생각보다 크게 가슴이 두근거리거나 설레이지는 않습니다.
3년간의 재활기간이 헛되지 않은거 같습니다.

기차가 도착하고 역내로 들어오자마자 수많은 인파속에서 남자사람을 단번에 찾아내며 손을 흔들며 다가옵니다.
세계 어느곳에서도 단번에 주목받을 수 있는 개성넘치는 외관을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드려야 할 듯 싶습니다.
얼마전에도 용산역 한가운데서 서너번 얼굴 본 지인이 멀리서 단박에 저를 알아보고 엘리베이터 위쪽까지
쫓아와서 반갑게 인사를 한 적이 생각납니다.

양손엔 짐 한보따리와 한손에는 딸기우유를 들고 있습니다.
3년만에 만났는데 이거 포옹이라도 한번 하면서 이산가족의 기분을 느껴야 하나 잠시 설레였었던 바보같은 생각을 얼른 지웁니다.

10년전 교복입은 꼬맹이 모습을 보던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얼굴에 하얀 분가루도 묻히고 이제는 누가봐도 어엿한 아가씨입니다.
웃음을 보여주는것도 잠시 여자사람이 140이 왜 아니냐고 따집니다.

아까 기차탈때 잠안온다고 궁시렁 궁시렁 문자를 보내길래

'10+2 *30+20 -100+50*5 +150 *3 -200 /10 +100 *6 /200 +100/10 *6= 풀어봐'

그냥 잠이나 자라는 의미로 대충 이런 식으로 문자를 날렸는데 꽤 빠른시간에
140이라고 답장을 보내길래 '아무거나 막 찍지마' 라고 다시 답을 보냈는데..
그걸 다시 잠도 안자고 검산까지 하며 풀었답니다. 맙소사.

도대체 멍청한건지 아님 순진한건지...


지하철 역으로 내려옵니다.

남자사람이 말을 건넵니다.

'숙아, 너 분명히 말해봐. 너 데이트 하러 온거냐? 아니면 택배로 온거냐?'
'데이트는 뭐고, 택배는 뭔데?'

'데이트로 온거면 데이트 코스로 안내하고 택배로 온거면 이쁘게 잘 포장해서 내일 11시까지 광명역에 배송해주는거지'
'오빠 만나러 왔다니깐? 당연히 데이트로 온거지. 데이트 코스로 가자.'

'그걸 진짜 나보고 믿으라고?'
'안믿으면 어쩔껀데? 그냥 데이트로 가자 배고파 빨리 가자. 쭈꾸미 먹고싶어'


어머니와 함께 토요일 남동생의 군 체육부대 면회를 핑계삼아 금요일 밤에 미리 올라와서 하루 놀아달라는
여자사람의 말을 과연 신용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서울 심야 데이트 코스를 찾아봤거든? 오래비가 워낙 데이트랑 인연이 적잖냐
그 중에서 가장 서울에서 추천하는 데이트 코스가 어딘줄 알아?'

'어딘데?'

'종로 a모텔, 명동 b모텔 강남c모텔 아무튼 열에 일곱은 전부다 모텔 강력추천!
거기가면 DVD도 볼 수 있고 잠도 편하게 잘 수 있고 여러가지 놀거리도 많댄다. 그리로 데려갈까?'

'아, 뭐야...그런데 말고 찜질방가서 잘거야. 어디 좋은 찜질방 알어?'

'서울에서 제일 좋은 찜질방을 가려면 데이트코스를 포기해야 되는데?
찜질방은 용산에 있고 데이트는 종로에서 할건데 방향이 정 반대거든'

'에이 뭐야. 그래도 종로로 가자'

데이트코스라고 거창하게 타이틀을 달아놨지만 연애를 한번도 해본적이 없는 초짜 남자사람이
제대로된 데이트를 운영할 수 있을지 만무 합니다.

물론 앞에 있는 여자사람과 몇변의 데이트[?]를 했었고
다른 여자사람들과 몇번의 데이트...라고 해봤자 밥먹고 영화보고 술 한잔하는 정도라면 몇번 있었지만요.




종각역에 도착했습니다.

서울의 중심 종로!
종로 하면 일단 떠오르는것은 김두한과 구마적 신마적 시라소니가 우미관 앞에서 지역 상권을 놓고
바람처럼 흘러가는 정열의...노래 가사 밖에 모릅니다.

젊은 연인들이 서울에서 가장 많이 애용하는 국민데이트 코스로 널리 알려져 있다고 하지만...
종로는 이번이 세번째 입니다.

몇년전 아는 지인들과 종각역 근처 보쌈골목에서 먹은거랑..
나름 데이트 동선 체크좀 한답시고 어제 종로답사를 다녀온거랑
바로 오늘...

요즘 세상은 꽤 편리해져서 로드뷰 같은걸로 미리 답사가 가능하다고 하지만...
백번 로드뷰 보는것보다 직접 한번 답사를 다녀오는게 나을거 같았습니다.

꼭 데이트가 아니더라도 한번쯤은 2MB 아바이 수령이 만드신 청계천답사와
문화의 거리 인사동 그리고 삼청동을 한번 걸어보는것은 좋은 경험 아니겠습니까.


인사동으로 빠지는 3번출구로 나와서 쭈꾸미 간판을 찾습니다.
어제도 보고 그제도 보고 매일 만나는 친구처럼 편안하게 이야기도 하고 간판 불이 거의 다 꺼진 인사동 거리를 걷습니다.

이것저것 서울의 대도시[?]의 밤거리를 감탄하며 걷는 여자사람에게 끊임없이 '촌년'테클을 걸어봅니다.
분명한것은 여자사람이 남자사람보다 서울에서 놀아보기도 훨씬 더 놀아보고 데이트를 했어도 몇배는 더 했을거라는 점입니다.

아무리 찾아도 쭈꾸미 간판은 보이지 않습니다.
인사동 거리를 한바퀴 돌아서 청계천으로 방향으로 발길을 옮기며 어느 불닭집에 들어갑니다.


'오늘 너 만나면 꼭 두가지를 확인하고 싶었는데...한가지는 확인됐다. 울렁증이 사라졌어.'
'하나도 안어색한데? 오빠는 정말 3년전이랑 똑같애. 그리고 웬 울렁증?'

'전에 니 얼굴보면 울렁거려서 3초이상 쳐다보질 못했거든. 너 그런거 한번도 못느꼈냐?
니 얼굴 똑바로 본 적이 거의 드문데...'

'지금은 안 울렁거려?'
'응. 역시 고백하길 잘 한거 같다. 훨씬 낫네. 오늘은 미안하지만 니 얼굴 실컷 좀 봐야겠다.
나 안이쁜거 알지만 그래도 오늘은 좀 니가 이해해라. 아 이쁘네 좋다.'

'알어 알어 나 이쁜거'
'숙아 확실히 하나만 말하자'

'뭔데?'
'나 서울역에서 너 기다리는 한시간동안 너보다 이쁜여자 100명은 더 봤거든?'



불닭과 함께 맥주 500을 들이키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뒤집습니다.
얼마전부터 남자사람이 책을 추천하고 추천받을 여자사람이 책을 읽고 나서 감상회를 열자고 했는데
처음 열리는 감상회가 이렇게 얼굴을 마주보고 이야기 할 줄은 몰랐습니다.

맨 처음 추천한 책은 '연애시대' 입니다.
워낙 딱딱한걸 싫어하고 달달한것만 찾는 아가씨라 나름 던져 줬는데 반응이 기대이상이였습니다.

여자사람은 책 이야기를 하면서 책보다 더 찌질한[?] 자신의 연애 이야기를 들려주었고 남자사람 역시 이야기를 들어주며
여자 사람과 남자사람의 관계설정 거리조절에 대해서 다시한번 설교를 늘어놓았습니다.


'그러니깐 내가 너 좋아한다고 말했지만 사귀자고는 말 안했잖아.
좀 비겁하기도 하지만 그냥 나 혼자 마음 훌훌 털고 편히 지낼려고 수를 쓴거지.
니가 어떤 마음인지도 어떤 반응인지도 어떻게 우리사이가 흘러갈지도 뻔했으니깐..'

'왜, 또 갑자기 그런 이야기해? 그런소리 하면 내가 혹시라도 상처줄까봐 얼마나 미안한데
자꾸 이야기를 그런쪽으로 엮을려고 하지마. 지나간 일이잖아 지금은 이렇게 편한걸'

'지금도 좋아한다고 말하면 어쩔건데? 그래도 지금처럼 편할까?
오늘 날 잡은김에 고백하는날 시즌2 찍어볼까. 겁나냐?'

'아니 겁은 안나. 그래도 계속 그러면 고맙고 미안하고 그런 마음 밖에 안들거같아.
그리고 오빠랑은 평생 보고싶은 사인데 그런걸로 맘쓰고 싶지 않아'

'차라리 니가 어장관리를 한다고 느낌이 오거나
아니면 부담스러워하면서 날 멀리 밀어냈으면 더 편했을텐데 그런 생각이 안들어서 더 어려웠다.
뭐 밖에서 남들이 보기에는 그냥 어장관리 뭐 비슷한 걸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너에게 딱히 잘해줬다고 생각도 안들고...
무엇보다 어장괸리 당하면 당했지 어떻게 니가 오빠를 어장관리 할 수 있겠니.
우리둘은 서로에 대한 배려심이 너무 깊어. 그게 제일 큰 문제지.

그래도 맘졸이면서 위태위태 하는것보다 지금이 훨씬 낫다.
내가 혹 좋아한다고 한다면 니가 좀 뻔뻔하게 받아주면 된다.'

'좋아, 그렇게라도 유지가 된다면 뻔뻔해질 수 있어.'


서로 그렇게 조잘조잘 대는 사이 어느새 접시와 맥주는 다 비워갑니다.


현재시간 12시 30분


이제 앞으로 10시간 정도 남았네요.





좀 길어지는거 같아서 반으로 나눌게요.
글에서 거의 무한대의 가까운 찌질함이 풍겨나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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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라.
10/10/10 12:19
수정 아이콘
글 재미있게 잘 쓰시네요^^ 보는 제가 마음이 설레요 크크
두유매니아
10/10/10 12:15
수정 아이콘
아아 보는 제가 다 아찔하네요;;;;
감정 이입 잘되네요;;;
비상하는로그
10/10/10 12:26
수정 아이콘
뭔가..알 수 없는 느낌이 드네요..이런걸 공감이라고 하나요...
불현듯..옛 생각이 나네요...(이런 느낌의 댓글을 쓰려던게 아닌데..왜 손이 제멋대로...)
논트루마
10/10/10 12:22
수정 아이콘
fd테란님의 마음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런 관계는 유지하면 유지할수록 머리만 복잡해집니다.

제가 정~말 싫어하는 이분법적인 사고지만, 자신을 위해서 여자는 그냥 내꺼 아니면 남꺼라고 생각하세요.
10/10/10 12:31
수정 아이콘
음... 너무 진지하게 들리고,
좀 아프게 들려서..

남의 이야기라 재밌기는 하지만, 역시 좀 아프네요.

일단 위로를 보내구요.
별로 울렁증이 사라진 것 같아보이지는 않습니다. 오랜만이라 사라진듯한 느낌일 뿐?
단지 "상대가 날 이성으로 봐줄 가능성이 없다" 고 인지하고서
그걸 맘속에 새기는 작업을 끝냈을 뿐...

가령 저 여성분이 지금 fd님을 갑자기 좋아졌다고 한다면
'난 이제 널보면 울렁임이 없어졌으니까 이젠 너랑 사귀긴 싫어' 라고 할리는 절대 없잖아요?

즉 상대가 안좋아하기 때문에,
가능성에 대한 단념이지 본인의 좋아하는 마음 자체는 3년간 그냥 묻어두신 것 같은 느낌입니다.


저같은 경우라면...
연인 가능성은 전혀 없는데 좋아하는 마음이 제어가 안된다면...
안보는 경우를 택하겠어요.
왜냐하면 가망성없는 상대를 혼자만 해바라기해서 하는 그 슬픔을 감당할 자신이 없거든요.
첨부터 좋아해지는 마음을 철저하게 눌러버리거나,
아니면 이미 수습할 길 없이 "좋아져"버렸다면, 저는 피하는 쪽을 택하렵니다.
그냥 냅두면 저같은 사람은 가슴이 문드러질거 같으니까요. 날 바라봐주지 않는 사람을 옆에 머무르며 지켜보는 건 너무 고통입니다.
아마 FD테란님이 그런 절교없이 좋은 관계를 유지할 수 있으신 건 아마
제 추측으론 서울과 대구라는 그 엄청난 거리가 한몫한다고 봅니다.

여튼간에...
노력한다고 해서 상대방이 날 좋아하게끔 만들수 없는게 사랑이란 감정이니...
(즉 좋아하는 감정은 자연히 그렇게 되는 거지, 좋아하고 싶다고 해서 좋아지는게 아닌)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네요.


p.s. 정말 담백하게 남녀관계 이전의 관계로 돌아갔다면
대화에 저런 주제들이 안나와야 합니다.
오히려 수시로 나오는 저런 뼈가 있는 대시성 농담들은
'여전히 나 너 좋아하는데' 라고 밖에 볼수가 없는 말과, 수다주제네요. ㅠㅠ
문정동김씨
10/10/10 12:41
수정 아이콘
글 재밋게 쓰시네요 [m]
오렌지샌드
10/10/10 17:30
수정 아이콘
저희 주 데이트코스가 종로에요~
저랑 예행연습이라도 함 해보실걸 그랬네요 으하하
......농담이고 추천 확실히 날려드릴 수 있었는데 안타까워요~
엡디님이 쓰시는 이런글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도 하고. [m]
M.Ladder
10/10/10 22:51
수정 아이콘
(페이지 넘어왔으니 친목질 살짝)
글쓴이 안보고 읽다가 이거 왠지 FD.....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종로에 산딸기맥주가 아주 맛있는, 하지만 음악소리는 조금 시끄러운 바가 하나 있는데 추천해주.. 기엔 이미 늦었나요 ^^;
엡디님이 쓰시는 이런 글 오랜만에 보니 반갑기도 하고. (2)
10/10/11 14:35
수정 아이콘
안녕 엪디찡. (페이지 넘어왔으니 친목질 살짝) (2)
100m 그 아가씨 이야기인가요. 아아. 인간씨엉엉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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