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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8/16 21:12:07
Name 서랍
Subject [일반] 어디에나 네가 있다 – 당신의 첫사랑은 어떤가요?
작년 재작년 일보다 그를 처음 만났던 그 해 그때의 내가 그리고 우리가 더 생생하게 떠오를 때가 있습니다. 같은 과 동기로 첫 만남 때 무심하게 자기 이름만 말하던 그. 그리곤 그때와 다르게 빙글빙글 웃으며 왜 인사하기로 하고 인사를 안 하느냐고 일부러 날 불러 세우던 그. 그 사실은 정말 한참 지난 후 몇 년 전에야 알았습니다. 그때 그에게 나는 그 옆에 서 있던 소심한 다른 동기 녀석이 OT 때부터 맘에 든다고 찍은 여자애였을 뿐이었다는 걸. 맘에 든 여자에게 말도 못 걸고 우물쭈물하는 동기 녀석을 대신해 말을 걸었을 뿐이었다는 걸요.
그런데 우습게도 나는 내게 말을 거는 그에게 반해버렸습니다.

고등학교 때부터 사귄 여자친구가 있던 그를, 우리 학교에 놀러 온 그의 여자친구를 보고도 나는 쉽게 접지 못 했었습니다.
나는 이미 이십 년 동안 사랑할 준비만 하고 있다 그제야 막 터뜨리게 된 여자애였으니까요.
내 첫사랑만 소중해서 어쩔 줄 몰랐던 어린 여자애요.

그렇게 그저 동기로 친구로 꽤 많은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깊어진 열병을 혼자 감당할 수 없어 그에게 고백했습니다. 딱 대놓고 좋아한다고 말도 하지 못하고 좋아하는 노래를 빌어. 이 노래를 꼭 너에게 들려주고 싶었다고. 그는 그때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내 음성사서함에 연주 음악을 남겨놓았을 뿐.

그때 알았어야 했습니다. 그도 나와 같은 열병을 시작했음을.
그 음악은 그때 그가 제일 즐겨 듣던 음악이었음을.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듣고 싶었던.
하지만, 우리의 사이는 서로에게, 친구가 처음부터 찍어놓은 여자와 애인이 이미 있는 남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둘 다 어설프게 순수하고 어설프게 착했으니까요.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여자친구와 헤어지고 나서도 그와 나는 ‘연인’이 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나도 너를 좋아한다고 말해주지 않았습니다.
그가 원래 낯 간지러운 말을 잘 못하는 그런 남자였다는 것을 그때는 잘 알지 못했습니다.
나는 결국 그 시간을 힘들어하다 그가 어설프게 들이대는 내게 조금 흔들리다 그렇게 조금 망설이다 만 거라고 정리했었습니다. 나 혼자 꿈을 꾼 것일 뿐이라고요.

그리고 나는 그가 군대에 간 사이에 첫사랑인 그도 아니고 나를 처음부터 찍었다던 동기 녀석도 아닌 다른 동기와 첫 연애를 시작했습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라더니 그렇게 되더군요. 물론 그 연애 역시 이젠 기억도 가물가물한 오래전 추억이 되어버렸지만.


어디에서 첫사랑이라는 얘기를 들어도 전혀 설레지 않는 지금
첫사랑 얘기를 올리는 누군가 들을 보며 그저 미소를 날리던 요즘
얼마 전 방에 새로 가구들을 들이면서 짐을 좀 정리해야 했습니다.
그러다 발견한 접혀 있는 볼품 없는 쪽지 하나.
입대 송별회 자리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준 쪽지였습니다.
나는 그때 어떤 약속의 말 하나 없었던 그 쪽지에 서운해했었습니다.
좋아한다고 아니 그게 아니더라도 기다려 달라는 말 한마디만 있었어도 그때는 10년이라도 기다릴 마음이었다고 내가 그를 기다리지 못한 것은 어떤 약속도 하지 않은 그의 탓이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나는 어렸고 내 마음만 너무 커서 그의 마음의 행간을 읽을 여유 같은 게 그때는 없었습니다.




.
.
.
어디에나 네가 있다.







아.
마음속 어딘가가 잠시 저릿합니다.
이런 얘기였었나. 10년이 훨씬 지나 읽는 이 짧은 글이 그때의 기억과는 다르게 마음을 움직입니다.
나는 그제야 깨닫습니다.
내 첫사랑을 배신한 것은 그가 아니라 나였음을.


전화기를 들어 그 기나긴 시간을 돌고 돌아 이제는 진짜 친구가 되어버린 그에게 전화하려다 그만둡니다. 결국 싱거운 안부만 묻다 조만간 보자 하고 끊을 테니까.
쪽지를 접어 다시 잘 넣어둡니다.



















대신 30대 프로게이머라도 되려는지 스타 2하고 술 한 잔 하고 들어가겠다는 지금 내 옆의 남자에게 웃으며 문자를 보냅니다.
후로게이(?) 홧팅! -_-;; 많이 마시면 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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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병기캐리어
10/08/16 21:23
수정 아이콘
하아.... 있는자의 여유....
OnlyJustForYou
10/08/16 21:25
수정 아이콘
첫 사랑이든 두 번째 사랑이든.. 지금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말 그대로 '첫' 사랑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조금 애절하고 다른 사랑들보도 가장 특별하게 느껴지긴 합니다만 지금 사랑보다 가장 특별한 사랑이 있을까요.

저도 가끔 첫 사랑 생각이 나서 싸이도 가끔 가보고.. 그러는데 그냥 가끔 생각할 때.. 기분 좋은 추억인 것 같습니다. 흐흐
가끔 생각해야지 '그땐 그랬지..'이러면서 좋은 기억이지 자주 생각하면 창피하기도 하고 후회가 되기도 하고.. 그런?
정형돈
10/08/16 21:27
수정 아이콘
전 첫사랑한테 미안하고..생각해보면 창피하고 그래요.
물론 그 첫사랑에겐 전 이제 아오안이 된 거 같지만..그래도 많은걸 알려줘서 고마워요.
별마을사람들
10/08/16 21:30
수정 아이콘
서른 일곱 먹도록 여태 첫사랑이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

짝사랑도 첫사랑이 될 수 있다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여자때문에 타인에게 눈물을 보였었고,
곁에서 잠시라도 떠난다는 걸 참을 수가 없어서 ROTC지원을 했으며,
어찌하여 그냥 현역으로 보낸 시절 한 사람에게 썼던 편지가 사백여통...
16년이 지난 지난 지금에도 그 여자의 음,양력생일과 학번과 주민번호가 기억나는 ㅡ,.ㅡ
그런...첫사랑은 갖고 있군요.

그 이후 짝사랑조차 가슴속에서 지워버린지 오래...
아, 현재 아이디도 그 여자의 이니셜...바꾸고 싶어도 워낙에 여기저기 가입해 놓은 곳이 많아서...쿨럭
여간해서
10/08/16 21:31
수정 아이콘
가끔 그런생각은 합니다
예전의 그 사람에게 보냈던 편지나 문자들
멋있어 보이고 싶어서 달라 보이고 싶어서 허세가 뚝뚝 떨어지던 고것 들을
조금만더 진실되게 솔직하게 보냈더라면 어땠을까 하구요

만약 그녀가 그 편지를 아직 가지고 있다면...
어쩌다 한번씩 꺼내 본다고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듭니다;;;;
10/08/16 21:33
수정 아이콘
'어디에나 네가 있다'.

제 마음까지 저릿하네요. 다른 사람의 이야기일지언정, 진심은 마음을 알싸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저 또한, 그런 '어디에나 있는 듯한' 사람이 있어서였는지도 모르죠.
서늘한바다
10/08/16 21:33
수정 아이콘
아.... 참 예쁘네요..
10/08/16 21:36
수정 아이콘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년 전인 2000년,
'인도'의 한 외국인 중고등학교에서 만난 천사? 공주? ... anyway,
ESL이라는 영어를 막 배우기 시작한 외국인들을 위한 반에서 당당히
"I Like 순두부찌개 and 된장찌개"를 말하던 제 첫사랑은, 저보다 두 살 어린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 천사는,
제 곁에 있습니다.

물론 그녀가 pgr을 즐겨 찾기 때문에 칭찬받으려고 쓴 글은 아닙니다.
맨날 유게가서 놀거든요.


하하.. 염장용 글은 아니었습니다.
참 좋은 글이네요. 저도 글쓴님의 기분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저도 그 누구보다도 길고, 아프게, 첫사랑 때문에 힘들어한 암흑기를 보냈다고 자부(?) 할 수 있거든요.

그랬던 저도 2000년 고1때부터 쭉 그녀를 그리다가 재작년, 결국 옆으로 모시게 되더군요.
Tchaikovsky
10/08/16 21:36
수정 아이콘
후아....맘이 찌릿하군요.
첫사랑보고싶어요
10/08/16 21:39
수정 아이콘
저도 1년반 정도가 지났지만 아직 생각나네요.
1년동안은 그여자가 참 못됐다고 생각했는데 요즘들어서 돌아보면
제가 많이 부족하고 잘못해줬던거 같네요.
그게 너무 싫습니다.
대구청년
10/08/16 21:43
수정 아이콘
저는 제첫사랑은 아줌마가 되었습니다 그사람은 제옆에 있습니다.
10/08/16 21:43
수정 아이콘
있는자의 여유...
으허으허으허헣흐헣난 문자나 씹히고 으허르헣허흐헣흐허
PGR끊고싶다
10/08/16 21:49
수정 아이콘
항상 첫사랑관련글을보면
'이적-그땐 미처 알지 못했지'라는노래가 생각나네요.
여름바닷가에 누워서 라디오를듣는데 이 노래가나왔었죠.
가슴이아려오면서 따뜻해졌던 그 느낌....
아직도 잊을수없네요.
이 글 보고 외로워지신분들 한번씩 노래들어보시는것도..^^;
감성소년
10/08/16 21:52
수정 아이콘
전 아직 첫사랑도 없는데.. 군대는 눈앞에 다가왔네요.. 근데 왠지 군대 갔다오고 나면 마음은 군대가기전인데 나이만 잔뜩 먹어서 올것 같아요..
Daydreamer
10/08/16 22:03
수정 아이콘
아, 여운이 강하네요. 어디에나 네가 있다... 오래 울리는 종소리 같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0/08/16 22:30
수정 아이콘
영화 러브레터를 보는 듯 하네요~

오랜만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근데 쪽지엔 달랑 '어디에나 네가 있다-' 이렇게만 적혀있었나요? 아니면 쪽지에 적힌 문장 중에 저 문구가 눈에 확 들어오셨던 건가요?

전자인 것 같은데... 아무튼 서랍님 첫사랑은 참 멋진 분이셨네요.
눈시BB
10/08/16 22:35
수정 아이콘
처음이라는 건 언제나 아련하게 기억되죠. 처음 내 마음을 헝클어 놓았던 사람을 어떻게 잊겠습니까. 어떤 의미를 부여해도 모자랄 존재죠. 다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면 언제나 추억 속에 간직해야 하구요.
글 잘 봤습니다.

... 하지만 마지막에 반전은 ㅠㅠ 역시 승자의 여유
정용현
10/08/16 22:43
수정 아이콘
허허 이러 좋은글이..
왠지 찡한데요.. 추천이나 한방!
10/08/16 23:13
수정 아이콘
일찍 결혼했으면 중학생 아이가 있을 법도 한 나이가 되어도 중2병이 낫지 않고 가끔 이렇게 가슴이 덜컹거릴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어딘가에 적어 두고는 했던 버릇이 없어지질 않네요. 잘 못 쓴 글이나마 함께 저릿함을 느껴주신 모든 분들께 고맙습니다. 세상의 모든 첫사랑을 응원합니다. 그리고 그래도 제일 중요한 건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입니다. ^^
분홍돌고래
10/08/17 00:15
수정 아이콘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10/08/17 00:44
수정 아이콘
어디에나 네가 있다....
가슴이 저릿하네요.
Minkypapa
10/08/17 04:57
수정 아이콘
어디에나 네가 있다.. 구요?
첫사랑과 결혼한 저로서는, 괜히 으스스하군요. 마누라님아, 난 이미 노예. CCTV는 꺼주길 바래.
10/08/17 13:31
수정 아이콘
서랍님// 글이 너무 좋습니다~~~
10/08/18 00:19
수정 아이콘
늦은 밤...서랍님 글을 읽으니,
저의 대학 새내기 시절이 생각나네요. 15년전..크~
그 때의 순수했던 추억들을 생각나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추천 한 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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