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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8/17 00:20:28
Name ohfree
Subject [일반] 연필
며칠 전 우연히 연필을 보았다. 낯선 사람을 만났는데 그는 볼펜이나 샤프가 아닌 연필을 쓰고 있었다. 뭉툭해진 연필로 무언가를 쓰는 그를 보니 어렸을 적 연필로 공책을 채우던 때가 생각났다.



나의 초등학교 시절, 그때는 거의 모든 아이들이 연필을 썼다. 저마다 자신만의 연필을 가져와서는 선생님의 말씀을 받아 적거나 산수 문제를 풀 때 그들의 연필을 부지런히 움직였다. 연필을 쓰다가 뭉툭해지거나 부러지면 아이들은 필통에서 새 연필을 꺼내 썼다. 그들 대부분의 연필은 기계로 깎여진 연필이었다. 난 기계로 깎여진 연필을 싫어했다. 기계로 연필을 깎으면 뾰족한 심을 쉽게 만들 수 있진 몰라도 그 뾰족함은 이내 뭉툭해지고 날카로운 연필이 가지는 특유의 '슥슥' 거리는 느낌이 빨리 죽기 때문이었다. 거기에다 민둥머리처럼 똑같은 스타일로 깎여진 모양이 싫었다. 그에 반해서 나의 연필은 특별했다. 날씬하고 각진 몸매로 깎여진 연필이어서 특별했다. 이러한 연필모양은 아버지께서 만들어 주었다. 손수 칼로 깎은 연필은 기계로 깎은 것보다 더욱 뾰족하고 특유의 경쾌한 느낌은 더욱 오래 갔다.



아버지께서는 주말이면 연필을 가져오라 하시고는 베란다에서 연필을 깎아 주셨다. 가끔씩 나에게 연필 깎는 법을 알려 주셨지만 난 배우려 하지 않았다. 서툰 내 솜씨로 깎은 연필보다 아버지가 깎아준 연필이 더 좋았었던 것도 있었거니와 깎고 나서 못생겨져버린 연필을 보고 싶지 않았던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연필의 기억은 중학교에 들어오고 샤프를 쓰면서 부터 점점 잊혀 지게 되었다. 왜 샤프를 쓰게 되었는지 정확한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중학생은 샤프를 써야해' 라는 생각이 있었던 것 같았다. 아버지께서는 샤프는 글씨 쓰는데 안 좋다며 연필을 쓰라고 하셨다. 하지만 난 샤프가 더 멋있어 보이기도 하고 다른 애들은 다 샤프 쓰는데 혼자 연필을 쓰고 싶지는 않아서 샤프를 썼다. 그 후 우리 집의 주말풍경에서는 베란다에서 연필을 깎는 아버지와 그걸 옆에서 지켜보던 아이의 모습이 빠지게 되었다.



며칠 전에 만난 낯선 사람은 동사무소의 직원이었다. 타지를 찾아간 나는 동사무소를 찾아가 길을 물어보게 되었고 그분께서는 지도를 펼쳐 놓으시고는 연필로 길을 알려 주었다. 그 사람의 책상에는 둥근 통 모양의 연필꽂이가 있었고 그곳에서는 한 움큼의 연필들이 삼국시대 병사들의 창처럼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문득 내 방 구석에 먼지가 수북이 쌓여서 만지기도 싫었던 연필이 생각났다. 연필을 회색으로 뒤덮어 버린 먼지의 양만큼이나 아버지에게 소홀하지는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자취집에 도착해서 방 한 켠에 쭈그리고 있는 연필을 찾았다. 칼을 꺼내 들어 연필을 깎았다.
‘서걱서걱’
분명 나의 눈은 날렵한 몸매를 자랑했던 예전의 연필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의 손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이번 주말에는 상처투성이의 연필을 가지고 집에 내려 가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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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홍돌고래
10/08/17 01:13
수정 아이콘
마음이 복잡할 때면 필통 속 연필을 꺼내 깎는게 버릇이었는데 (연필심 끝은 항상 뭉툭하게. 날카로운 필기감보다는 기분전환이 목적이므로)
어느 순간 그 대상이 연필에서 색연필로 바뀌었어요. 그런데 지금 댓글을 쓰면서 필통을 열어보니 칼 대신 휴대용 색연필깎이가 자리했네요.
전보다 신경쓸 일이 줄었다는 건가? 아니 차분히 칼로 연필을 깎고 있을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거겠지... 새삼 한숨이 나옵니다.
분명 지금의 나는 예전보다 치열하게 살고 있지 못한데 왜 잠시의 시간, 아니 마음의 여유조차 갖지 못했던 걸까요.

조금은 서늘해진 여름밤의 창문으로 흘러드는 풀벌레 소리와 겹쳐지는 희열님의 푸른 음성을 배경으로, 부지런히 서랍 속을 뒤져봅니다.
아이들 선물용으로 사놓았던 뽀로로 연필세트 발견!! 가장 예쁜 2자루를 꺼내 필통에 넣어 놓으니 괜스레 뿌듯해 웃음이 나네요.
(연필은 도통 인기가 없어 재고가 쌓여있던 거라곤 차마 말 못하겠어요. 큭. 열 살짜리도 샤프를 쓰겠다 난리니 이 노릇을 어찌할꼬)
오랜만에 칼로 깎아 봐야겠어요. 예전만큼 깔끔하거나 고운 선을 갖진 못하더라도 잠시나마 쉴 수는 있겠죠! 좋은 글 고맙습니다 :)
박루미
10/08/17 04:28
수정 아이콘
습관이 이래서 무서운가 봐요~
저는 지금은 CAD를 쓰지만, 최근에 CAD09를 설치하기 전까지도
고지식하게 수기제도를 했었다지요~
그래서 아직도 저는 연필을 씁니다. 샤프로는 절대로 충족이 안되는
뭐랄까? 엔틱하다는 드립따위 집어 치우고요, 연필도 자동깎개보다는 칼로 깎아야 제 맛이라능
소인배
10/08/17 09:43
수정 아이콘
저는 무조건 연필 써요. 그 필기감은 다른 어떤 필기도구도 흉내낼 수 없거든요.
율리우스 카이
10/08/17 10:31
수정 아이콘
필력이 정말 뛰어나세요..

일필휘지로 쓰신거면 정말 존경합니다. ^^

무뚝뚝한 아버지, 연필을 깎아주는 모습.. .. 이제 샤프를 쓰는 아들..

뭉클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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