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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3/17 23:56:45
Name xeno
Subject [일반] [연재] 보드빌-vaudeville 2. 벌레 / 3. 요령
- 2 -

벌레

후에 빌리가 만나게 될 한 학자는 이를 ‘세상이 주인에게 돌아간 것’이라 말했다.

땅속 저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밀려 올라오기 시작한 그것은 땅속 깊숙한 곳에 자리 잡은 해구에서부터 서서히 밀려 올라와 천천히, 아무도 알아차릴 수 없게(사실 알아차릴 사람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세상으로 올라와 인간이 버린 곳을 차지했다. 벌레, 그것도 기생충. 연구할 수 있는 과학자가 남지 않아 명확한 정체를 밝혀낼 수는 없었으나 전염성이 강한 바이러스가 창궐한 것이다.

이들이 번식할 수 있는 환경은 본디 죽은 생물에 한해서였다. 이들은 사실 시체에 기생해 숙주가 썩어 없어질 때까지 그곳에서 기분 나쁜 보라색 반점을 만드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미약한 존재에 불과했다.

그래서 아마 이 바이러스는 살아있는 인간이 지구를 걸어 다녔을 무렵에는 그 면역력에 의해 살아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변했다. 지금 지구 상에는 도시마다 집집이 방부처리를 한 살아있는 시체들이 지천으로 널려 있었다.

벌레들에게 한 상 가득히 잔칫상이 떨어졌다. 더구나 이 상에 놓인 고기들은 그들이 이전까지 한 번도 먹어보지 못한 ‘날고기’였다.

죽은 생물을 먹고 사는 벌레에게 살아있는 먹이, 상황은 예상치 못한 곳으로 흘러갔다. 벌레들이 가진 특이한 단백질 구조가 살아있는 시체들의 뇌간에 자리를 잡자 그 결과는 다시없이 끔찍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살아있는 시체들, 노마드중 지난 시절을 기억하는 이들은 싸구려 영화에서 봤었던 “좀비”라는 이름을 붙이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징벌자”라고 부르기도 했다. 빌리가 생각하기에 이들은 단순히 배고픈 들개들과 다르지 않았지만.

자신들을 무엇이라고 부르던 벌레들은 상관하지 않았다, 마치 그들 안에서 뭔가 가 끊임없이 채찍질이라도 하듯, 벌레들은 목숨을 걸고 목숨을 늘려 갔다, 그 방법을 아직 아는 자는 없으나 벌레들이 지상 대부분을 차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절대적 다수가 된 그들은 닥치는 대로 먹었고, 같은 모습의 생물이라도 봐주는 법은 없었다.

시대의 주인은 또 한 번 바뀌었다, 파충류에게서 빼앗은 영장류의 갑의 권리는 이제 벌레들에게 돌아왔다. 그리고 그것이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 이제 지상에 남은 거의 모든 노마드 들이 세상이 변했음을 알았다.

- 3 -

요령

“와작와작 와작와작…….”

불 꺼진 어떤 건물의 창고, 몇몇 인간 들개들이 모여 좀 이른 석찬을 즐기고 있다, 오늘의 메뉴는 집채만큼 큰 커다란 냉장고 안에 그득히 쌓여 있던 비닐 포장된 생 햄 덩어리들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그들은 맘에도 없는 사양하는 매너는 부리지 않은 채. 각자의 욕구를 충실히 채우고 있었다, 비닐 포장을 뜯어낼 이유도, 시간도 없다. 그저 입속에 가득히 밀어 넣고 미친 듯이 씹어 대고 목구멍으로 삼킨다.

네 마리의 들개들이 그렇게 햄 덩어리를 먹는 바로 너머에 빌리가 있었다, 얇은 벽을 하나 사이에 두고 2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바로 너머의 문가에 기댄 채로 빌리는 일류 사냥꾼처럼 미동도 않은 채 등으로 들개들의 식사 소리를 듣고 있었다.

‘찬장 속의 벽장에 병이 서른하나……. 찬장 속의 벽장에 병이 서른둘…….’

그의 아버지가 똑같은 상황에 버릇처럼 되네 이던 노래다, 빌리는 이것이 무슨 뜻인지는 몰랐지만, 초조함을 억누르고 기다려야 할 때 도움이 된다는 것은 알았다.

‘찬장 속의 벽장에 병이 일흔세 개……. 찬장 속의 벽장에 병이 일흔네 개…….’

벽장에 병이 일흔 개쯤 쌓였을 때 아직 식사가 채 끝나지 않은 들개들에게 빌리가 왔음을 알린다.

빌리가 문가의 스위치를 올리자 어두운 공간에 빛이 찾아왔다, “텅, 텅, 텅, 텅” 하고 텅스텐램프가 켜지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린다, 그가 있던 공간은 꽤 넓은 창고였다, 그곳에는 식료품뿐만 아니라 옷가지, 약품들이 끝도 없이 쌓여 있었다.

들개들을 가운데 놓고 저 멀리 출구가 보였다, 들개들의 눈이 갑자기 환해진 시야에 적응하지 못하자, 그 들은 당황한 듯이 얼굴을 찡그린 채 몸을 숙이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때 빌리가 벌떡 일어나 문과는 정 반대 방향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 손에는 구식 윈체스터 소총이, 다른 한 손에는 그의 몸만큼 큰 배낭이 들린 채로, 어디서 구했을지 모를 캐링 카트도 하나 끌고 있다, 물론 그 안에는 식량과 가솔린이 한가득 쌓여 있었다.

빌리가 지금 달리는 방향은 출구는커녕 창문도 없는 막다른 곳이었다, 거대한 시멘트벽을 향해 박치기라도 할 기세로 달려가는 동안, 시력을 다시 확보한 인간 들개들은 살아있는 인간이 있다는 걸 알고 본능적으로 그를 쫓기 시작했다.

양손에 가득히 짐을 들고 자기 몸 만한 카트를 질질 끌고 가는 빌리가 잡히는 건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본능이 시키는 데로 사냥감을 쫓는 들개들은 무섭게 달려들기 시작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거리는 좁혀지지 않았다, 아니 느릿느릿 달려가는 빌리를 따라잡기는커녕 거리가 점점 벌어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네 마리가 차례로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중 하나는 아예 땅바닥을 짚은 채 토악질을 해댔다. 등 뒤에서 심상치 않은 소리가 들리자 천천히 자리에 선 빌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뒤를 한번 쓱 돌아보더니 다시 앞으로 달려가 벽 근처에 놓여 있던 지게차 뒤의 좁은 공간에 몸을 숨긴다.

들개들이 주저앉은 이유는 곧 설명이 되었다, 빌리가 지게차 뒤로 돌아들어 가 몸을 숙이고 곧 주머니에서 뭔가를 하나 꺼내 밖으로 집어던진다, 그것은 한 손으로 잡기 좀 벅찬 꽤 큰 통이었다, 표면에 라벨이 하나 붙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스피린”이라고 적혀 있었다.

약 다섯 시간 전에 이곳에 도착했던 빌리가 이곳에서 가장 먼저 한 일은 들개들이 가장 좋아하는 커다란 고깃덩어리들을 찾아 비닐 포장을 조금 찢고 물에 녹인 아스피린을 가득히 채워 넣어 놓은 것이었다, 그런 햄 덩어리를 스무 개 정도 만들어 그들이 먹기 좋게 쌓아 한 상을 차려 놓았던 것이다.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습격에 대비하는 법, 새로이 간 곳의 사물을 즉흥적으로 활용하는 법, 이는 빌리에게 철 들고 난 후부터 살아남고자 배워야 했던 필수 과목들이었다. 설사 그놈들이 이곳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해도 절대 헛수고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목숨이 언제 날아가 버릴지 모르는 노마드 들에 플랜B는 있을 수 없었다, 모든 행동의 결과는 죽는가, 또는 사는가였으므로.

지금은 자신의 재기를 감탄할 시간은 아니다, 들개들은 아스피린을 수십 알씩 먹고 복통을 일으킨 것이지 죽은 것은 아니었고,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이 하나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몸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지게차 양옆으로 카트와 배낭을 이용해 간이 엄폐물을 만들고 몸을 숨기고 고개를 빼꼼이 드러내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는 빌리.

‘분명히 있을 텐데…….’

빌리가 지금 찾는 건 “망보는 놈”이다. 다섯 명 정도로 무리 지어 다니는 인간 들개들은 먹이를 발견하면 한 명은 근처를 지키는 습성을 가졌다. 이는 외부의 습격을 대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확보한 먹이를 다른 놈들로부터 지키려는 이기적인 습성이었다.

“찬장 속의 벽장에 병이 이백여든일곱…….”

초조해지자 빌리의 입가에서 알듯 모를 듯 중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럴 수 있는 틈은 그리 길지 않았다, 병이 삼백 개가 채 쌓이기 전에 그놈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빌리가 지게차 안에서 고개를 숙이는 동안 들개 네 마리가 앓는 소리 너머도 하나의 작은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자박 자박 자박”

신발을 신지 않은 맨발에 다른 들개들이 토악질한 것들이 묻어 바닥에 쩍쩍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빌리는 이내 자신이 뛰어들어온 거리를 발걸음으로 계산해 대강의 위치를 계산해본다.

‘이 근처로 오는 건……. 서른 걸음 정도…….’

‘서른’

‘스물아홉’

‘스물여덟’



발걸음 소리가 열 걸음 정도 남았다, 빌리가 가진 짤막한 구식 총의 유효 사정거리면서 그놈이 한 번에 달려들 수 없는 거리, 빌리는 호흡을 한번 “훅” 내뱉고 벌떡 일어나 망 보는 놈을 노려보며 그의 총을 겨눈다, 동시에 그놈도 빌리를 노려본다.

몇 초간의 정적, 빌리를 노려보는 그놈은 살아있는 인간이 눈앞에 나타났는데도 달려들지 않는다.

다음 움직임을 살피기라도 하듯, 그놈은 빌리를 응시하기만 한다.

과다한 육류 단백질 섭취가 가져온 영양 불균형으로 말미암아 황달기가 가득한 눈동자가 빌리를 노려보고 있다, 피부는 다옴병으로 금방이라도 진물이 뚝뚝 떨어질 듯 베인 모양의 새빨간 반점들이 잔뜩 나 있다. 조용히, 그러나 적의를 가득 품은 채 씨익 씨익 숨을 고르는 입속으로 보이는 잇몸은 괴혈병 자국이 뚜렷해 보인다.

당장에라도 도망쳐버리고 싶은 불길한 모습

그놈이 조용히 빌리를 노려본다. 그놈들은 절대 의미 없이 으르렁거리지 않는다, 그런 행위가 자신의 위치를 적(또는 내 먹이를 노리는 다른 들개들)에게 알린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들이 입 밖으로 무언가를 내뱉을 때는 분명히 어떤 결심이 섰을 때다.
드디어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입속에 머금은 채 그놈이 한 발짝 걸음을 떼려 했다.

순간 빌리는 손에 드는 총을 고쳐 잡는다. 한 발짝이라도 더 움직였다간 쏴버리겠다는 듯이.

하지만, 이미 그놈은 빌리의 목덜미를 물어뜯을 결심을 마쳤다, 찰나의 멈칫거림이 있었지만 이내 빌리의 정면으로 괴성을 내뿜으며 달려들기 시작한다.

“퀘에엑”

동시에 빌리의 윈체스터 소총이 요란한 총소리를 토해냈다.

“타앙, 탕”

정조준을 하고 쏘기는 하지만 소용없다는 건 빌리도 아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몸속에 있는 벌레들은 그들에게 떨어진 뇌라는 물건을 잘 이용할 줄 알았다, 먹어도 되는 것과 먹으면 안 되는 것을 구분해 내는 법, 쓸데없는 고통을 느끼지 않게 하는 법 등….

따라서 들개들을 상대할 때는 직접적으로 움직일 수 없게 다리를 노리거나 유일하게 유효타를 노릴 수 있는 급소인 심장을 쏘지 않는 이상, 움직임을 막을 방법이 없었다, 그저 걸음을 조금 늦추는 결과 외엔 다른 효과는 없다.

그렇지만, 빌리는 아랑곳 하지 않고 윈체스터 소총의 탄창을 비워낸다, 요행을 바라는 행위로 보일 수도 있겠으나 그의 얼굴에 그런 기미는 없다.

한발, 한발 총알을 맞을 때마다 그놈은 뒷걸음질쳤다, 총을 맞아 아파하는 기색은 없었다, 단순히 총알이 가진 운동 에너지가 그놈을 물리적으로 밀어낼 뿐이다. 한 걸음을 앞으로 가면 총알이 한 걸음을 밀어냈다, 빌리와 그놈의 간격은 좀처럼 좁아지지 않는다.

구식 레버액션 소총에 서른발들이 탄알집을 붙인 조잡한 개조품이 슬슬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그에 맞춰 이 들개의 온몸에는 검붉은 총알 자국이 늘어난다, 처음에는 다리와 심장을 노리던 빌리는 네 발이 넘어갈 때부터 목표의 상처 없는 곳을 노리고 놀리듯 총을 쏴 댔다.

총이란 물건을 애초에 알았다는 듯, 두 팔로 자신의 급소를 가린 놈은 빌리를 노려보며 어떻게든 앞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그렇지만 걸음은 갈지자를 그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열 발을 넘게 총알을 맞은 그놈의 표정에 변화가 생겨났다.

“끄으으윽”

분노 그 자체인 듯한 표정, 잔뜩 찡그린 얼굴은 상처 자국과 짓 물린 자국으로 더없이 흉악해 보였다, 놈은 인내심이 바닥난 듯 울부짖음을 토해냈다.

“으아아아아아악”

마침 빌리의 실탄이 떨어졌다, 그의 총은 이제 무식하게 커다란 총소리를 내지 못했다, 실이 끊어진 목각인형처럼 딸각거릴 뿐이다.

그놈이 미친 듯 앞으로 달려온다, 빌리는 소총을 거꾸로 집어 들고 야구 배팅 자세를 취했다, 드디어 그놈이 한걸음에 빌리에게 달려들 수 있는 곳까지 뛰어들었다. 빌리는 거꾸로 잡은 소총에 더욱더 힘을 가했다.

눈이 뒤집힌 채로 달려드는 들개 한 마리, 하지만 그놈은 사력을 다해 빌리에게 뛰어들었으나 어찌 된 일인지 빌리를 지나쳐 뒤에 쌓여 있는 빈 나무 상자 더미 위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빌리 앞에서 정지하지 못하고 제 힘에 고꾸라져 처박혀 버렸다.

빌리는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곧바로 그놈을 쫓아가 뒷머리에 개머리판으로 풀스윙을 먹였다, 더욱더 증오스러운 울음을 토해내는 들개는 하지만 빌리를 찾지 못했다, 눈뜬장님처럼 미친 듯 상자 더미를 헤집었지만 허우적거리는 두 손이 가는 끝에 살아있는 사람은 없었다.

질린다는 듯이 그놈의 머리를 내리치는 빌리, 두 번, 세 번, 총신이 휘어지고 개머리판이 쪼개질 정도로 그렇게 여덟 번을 내리치자 마침내 들개가 조용해졌다.

-

빌리의 아버지는 그걸 ‘퓨즈가 나갔다.’라고 표현했었다.

그놈들 머릿속에 있는 벌레들이 시체를 조종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 감정적으로 커다란 자극을 줘 이성을 폭발시켜 버리면 여러 가지 형태로 그런 현상이 발생한다, 시각이나 방향 감각을 잃어버리기도 하고, 움직임이 멈추기도 했다. 어쨌든 그놈들이 들개도 아닌 유아로 돌아가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그놈들과의 1:1 대결은 약간의 무기만 가지고 있다면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다만 그 추악한 모습 앞에서 동요하지 않을 덤덤함은 가져야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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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크레티아
10/03/18 10:32
수정 아이콘
'28일후' 같기도 하고 '레지던트 이블'을 보는 것 같기도 하네요.
다음 스토리를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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