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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5/04/28 18:06:33
Name 글곰
Subject [일반] 나의 세상은 타인의 세상과 다르다는 걸
나의 세상은 타인의 세상과 다릅니다. 예전엔 몰랐습니다. 나이가 들고 나서야 조금씩 그 사실을 인지하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제가 야간에 불빛을 볼 때면 마치 번갯불 표시처럼 사선으로 보입니다. 남들에게도 그렇게 보이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서른이 넘어서야 그게 난시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봄철마다 코가 꽉 막혀서 고생하는 게 으레 당연한 일인 줄 알았습니다. 마흔이 넘어서야 그게 비염 때문인 걸 알았습니다. 주유소에서 기름을 넣을 때 천원 단위가 아닌 리터 단위로 끊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 불과 몇 해 전입니다. 결혼한 후에야 비로소 저녁이 아닌 아침에 샤워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습니다. 지금은 저도 아침에 합니다.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있고 제각기 자신의 세계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세계들은 대체로 엇비슷하지만 또 조금씩은 다르기도 합니다. 마치 양자역학에서 말하는 다세계 이론처럼 저마다의 세계가 존재한다고나 할까요. 그래서 난시가 없는 이들의 세계를, 비염이 없는 사람들의 세상을, 리터 단위로 기름을 넣는 운전자들의 영역을, 아침에 샤워하는 이들의 사회를 하나씩 접할 때마다, 저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전혀 당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의 세상이 조금씩 넓어져 가는 기분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제가 보는 세상은 과거의 제가 보았던 세상보다 훨씬 넓어진 것 같습니다.

주말에 가게 앞에 주차된 차를 뺄 때였습니다. 인도를 지나 차도로 진입해야 했지만 차가 꽉 차 있어서 좀처럼 끼어들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왼쪽과 오른쪽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끼어들 때를 노리고 있던 차에 오른쪽에서 누군가가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무언가로 차를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습니다. 깜짝 놀랐고, 그런 후에야 시각 장애인이 안내 지팡이로 차를 더듬는 소리라는 걸 알았습니다. 제가 당황해 있던 그 짧은 시간 사이에 그분은 지팡이로 앞 범퍼를 두드리며 요령 좋게 제 차를 지나쳐 걸어갔습니다. 저는 난생처음으로 시각 장애인의 세상을 살짝이나마 엿본 기분이었습니다. 암흑 속에서 갑작스럽게 나타난 거대한 쇳덩어리가 내 갈 길을 가로막는 그런 세계를.

그래서 저 자신이 조금이나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으려면, 나의 세상이 소중한 것만큼이나 타인의 세상도 소중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겠다고 새삼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물론 미터법 대신 야드-파운드를 사용하는 세계는 제외하고 말입니다만.

마속 나무위키 문서 2.3. 가정의 패전 인용

"그런데 여기서 마속은 제갈량의 명령을 무시하고 길목에 세워야 할 방어진지를 산 꼭대기에 세우는, 전쟁사상 다시 없을 바보짓을 한다.
부장 왕평이 필사적으로 말렸지만 이마저도 무시해버린다."
25/04/28 18:14
수정 아이콘
세상 깔끔하고 청결한 제 마누라는 어쩌다가
이 험난한 세상으로 들어오셔서..
라라 안티포바
25/04/28 1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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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줄을 위한 빌드업인거죠? 농담이고 글 잘봤습니다.
cruithne
25/04/28 1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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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리저리 모나게 굴었던 오늘 하루를 반성하게 되네요. 물론 야드파운드 같은건 존재해선 안됩니다.  
류지나
25/04/28 19:00
수정 아이콘
예수님도 그러셨지요. 네 이웃을 사랑해라. 단 야드파운드법을 쓰는 자들은 빼고-라고 말입니다.
모링가
25/04/28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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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와 관용이 정말로 세상에 필요합니다. 단 야드파운드를 제외하고 말이지요. 이를 확장해보면 다양성을 존중하되 주기적으로 가지치기를 해야 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meme의 생존과 진화라고 해야 할까요.
스스즈
25/04/28 1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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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인간이 자유로운 미국의 단위
썬콜and아델
25/04/28 19:34
수정 아이콘
음... 원래 다른게 당연한거 아닌가요? (죄송합니다)

다른 사람한테 잘 맞는 것이 나한테는 잘 안 맞을 수 있다 같은 생각을 어릴 때부터 본능적으로 하고 있었네요.

(역설적으로 이조차도 나의 세상은 타인의 세상과 다르다는 것에 포함되는군요)
25/04/28 20:04
수정 아이콘
저도 리터 단위로 주유하는분을 몇년전에 보고 신선했는데 저만 그런게 아니였군요
경계인
25/04/28 20:08
수정 아이콘
일본 영화 '나는 내일, 어제의 너와 만난다'가 저에게는 그런 의미였어요. 우리가 모두 똑같은 시간선을 따라서 사는 것은 아니구나 라는 것을,

서로가 각각 서로가 속한 시공간에 사는 것이니, 우리는 다를 수밖에 없구나
우상향
25/04/28 20:15
수정 아이콘
우리는 귀신보는 무속인들을 정신 관련 문제라 생각하지만 그들에게는 실재하는 세계죠.
No.99 AaronJudge
25/04/28 20:21
수정 아이콘
동의합니다.
아토피때문에 매일 온몸이 가려운 저로서는 깨끗한 피부를 가지고 가려운게 비일상인 사람들의 세상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겠죠.
25/04/29 09:04
수정 아이콘
저도 아토피가 심한데 이런저런 다른 질환 때문에 먹는 스테로이드를 좀 강하게 얼마간 처방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와... 피부에 광이 나고 하나도 가렵지 않은 삶이 펼쳐지니 진짜 신세계더군요. 나 말고 다른 사람은 평생 이렇게 산다고 생각하니 좀 씁쓸해졌습니다.
25/04/28 20:25
수정 아이콘
야드파운드는 사탄입니다.(84제곱미터가 그래서 몇평이지?를 생각하며...)
25/04/29 08:06
수정 아이콘
급할땐 나누기 3
25/04/28 22:09
수정 아이콘
세상은 모두에게 평등하고 모두에게 다른법이죠.

야드파운드갤런 쓰는 사람글 빼고.
베스킨라빈스 물러가라!
Dreamlike
25/04/28 22:21
수정 아이콘
아 좋네요. 나의 세상이 소중한 만큼 타인의 세상도 소중하다는 것. 늘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어야 겠습니다.
25/04/29 00:21
수정 아이콘
몇해전 상추 싸먹는 단면이 일반적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을때의 충격이란... 대단한 것이어었죠
LoveBoxeR
25/04/29 01:24
수정 아이콘
쉬운 말과 평범한 예시로 쓰여진 좋은 글이네요.
이런 글 좋습니다.
25/04/29 03:50
수정 아이콘
야드 파운드에 대한 분노는 열역학 배울때 크게 느꼈지만... 세월이 지나고 보니 뭐 예전부터 쓰겠다는 단위 쓰는데 이해 못 할 것도 아닌것만 같습니다.
다만 에이커-푸트(또는 에이커-피트)나 핑거같은 단위를 쓰는것은 용서 못하겠습니다.
마사루.
25/04/29 08:41
수정 아이콘
글쓴분의 시각이 세상을 살아가면 얼마나 중요한 지 깨닫는 요즘입니다. 타인의 세상과 세계관의 인정이 저의 시야도 넓혀주더군요
콩탕망탕
25/04/29 09:54
수정 아이콘
작은 느낌표 하나가 떠오르는 느낌입니다.
저는 주유할때 천원단위, 리터 아무것도 맞추지 않고 그냥 최대한 가득 넣습니다. 108,659원 이렇게 나오는대로 결제합니다.
*alchemist*
25/04/29 11:12
수정 아이콘
흐흐. 쉽게 잊혀지다보니 인지하게 되면 신기한 상황이기도 하지요. 좋은 글 잘 봤습니다. 감사합니다.
25/04/29 11:30
수정 아이콘
저도 눈도 안좋고 코도 안 좋아서 남들도 그런 줄 알았죠
좀 더 쨍한 시력과 쾌적한 호흡으로 살았으면 공부도 더 잘되고 조금은 지금보다 나은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가끔 생각합니다.
스핔스핔
25/04/29 14:18
수정 아이콘
말로만 머리로만 다양성을 외치지 실제 삶속에서 적극적으로 적용하고 체화해서 사는 사람은 적은거같아요.
뽀로뽀로미
25/04/30 06:49
수정 아이콘
끄덕이면서 읽다가 야드 파운드 아오....
25/04/30 07:11
수정 아이콘
미국에 야드파운드가 있다면 우리나라는 세는나이가 있습니다.
군령술사
25/04/30 12:48
수정 아이콘
20년 전에 MBTI 기초 교육을 받으러 갔는데, 교육생들 대상으로 검사를 하고 16개 타입별로 사람들을 헤쳐모아서 교육을 진행하더군요.
'사람은 다 다르지' 라고 생각은 했지만, 저와 그렇게까지 다른 사람들을 눈으로 보고 이야기를 들으니 너무 신기했습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도 같은 타입의 사람들에게는 너무 공감간다는 눈빛을 받고 있으니 정말 재밌더군요.
MBTI는 과학적으로는 무의미하지만 적어도 다른 타입의 사람들을 보고 '이상하다' 또는 '잘못됐다' 대신에 '다르구나' 하고 이해하도록 유도하는 순기능이 있는 것 같아요.
어설프게 타인을 이해하기보다는 '나는 저 사람을 모른다'라는 걸 알고, 직접 질문하고 관찰하는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설탕가루인형
25/04/30 13:10
수정 아이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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