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로 폭풍같았던 오삼계의 전격전은 1674년 3월 무렵에 완료되었습니다. 이후 3개월이 넘게 오삼계는 본인이 생각하는 전략적 이유로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강희는 다른 삼번에 대한 문제에 대해 고심했습니다.
평남과 정남, 상가희와 경정충의 철번은 정지되었습니다. 이는 물론 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조치입니다. 강희는 1674년 정월, 경정충이 있는 복건에 여러 차례의 명령을 내렸습니다.
"원래의 지방을 고수하라. 근거지를 옮길 필요는 없다."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강희는 직접적으로 사람을 보냈습니다 정남왕 경정충은 관할하던 관병을 계속 관리해도 무방하다는 명령을 내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 조치는 분명 시의적절한 판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정도의 효과를 볼 수 있을지는 미지수 였습니다.
강희가 경정충을 달래기 위한 조치를 취했을 당시, 정작 경정충은 대만 정씨 왕조의 정경에게 사람을 보낸 참이었습니다. 내륙으로는 오삼계와 협력하고, 해상으로는 정경과 협력하여 청조를 뒤흔들어보려는 야심찬 시도였고, 경정충의 수하 황용(黃鏞)은 즉시 대만으로 이동해 그 주인의 의사를 전달했습니다.
"(왕께서는) 홀로 충성스럽게 해외에서 정삭(正朔)을 받들고 계시고, 저는 분투하여 중원에서 대의를 들어 하늘과 사람에 응하고, 신속히 선박을 정돈하여 오늘의 강토를 바로잡고자 합니다. 바라건대, 군대를 협력하여 함께 만고의 위업을 이루고자 합니다."
그 창업자인 정성공 사후 대만의 정씨 왕조는 열렬한 복명(復明) 세력이라고 보긴 힘든, 어정쩡한 해양 군벌에 가까웠지만 만약 청조의 위기를 틈타 중국 본토에 근거지를 마련한다면 다시 선대의 업적을 재현해볼만은 했습니다. 정경은 이 제안에 크게 기뻐 했습니다. 그는 10월 무렵, 대만의 앞마당 격인 팽호 열도에 군대를 주둔시킨 후, 좀 더 명확한 제안이 올때까지 기다렸습니다.
강희의 사자는 바로 이 무렵에 도착했습니다. 미묘한 상황이 되자, 경정충은 한번 더 상황을 재보기로 합니다. 정경에게 사람을 보내 행동을 잠시 연기하고, 사태를 지켜보자고 권한 것입니다.
이렇게 차가운 눈으로 상황의 전개를 지켜보고 있는 경정충에게 청나라 조정은 다시 한번 손을 내밀었으나, 의도가 너무나 뻔한 탓에 이는 오히려 좋지 못한 결과만 가져왔습니다. 복건 총독이었던 범승모는 병부로부터 하나의 지령을 받았습니다. 현재 복건에서 범승모가 부릴 수 있는 병력은 7,000여명인데 이는 본래 경정충의 관할로, 범승모가 이 지역에 부임하면서 지휘권을 넘겨 받은 것입니다. 병부에서는 범승모가 이 부대를 경정충에게 다시 넘겨주어 그의 환심을 사라는 내용이었고, 범승모는 지시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러나 난데없는 호의에 경정충은 오히려 의심이 들어 계속 이를 거절했고, 결국 범승모는 제안의 배후가 있다는 사실을 실토해야 했습니다.
"저는 병부의 비밀 지령을 받들어, 병력을 넘겨야만 합니다. 또한 왕도 황제의 명을 받들었으니 이를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렇게까지 말하자, 경정충은 아무런 말 없이 군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내심으로는 범승모, 그리고 그 배후에 있는 조정이 자신을 감시하려 한다는 불안감에 시달렸습니다.
경정충의 마음 속에서 실태래가 복잡하게 엉킨 그 시간, 복주의 저잣거리에서 이상한 소문과 노래가 유행했습니다. 소문의 유포자가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우화적인 내용으로 구성된 이야기를 풀이 해보면 경정충이 황제가 된다는 이야기였습니다. 그 소문을 들은 경정충은 밤낮으로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고, 마침내 '하늘의 섭리에 부흥하기 위하여' 거병을 결심했습니다. 마음을 정한 그는 곧바로 병사들을 무장시켰고, 범승모가 있는 총독부에 대한 감시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범승모는 그 전개과정을 분명하게 파악하지 못했지만, 그러나 미묘하게 변한 분위기만은 눈치 챘습니다. 그는 백성들을 다독이는 한편, 직접 경정충의 처소로 찾아가는 대담한 행보를 보였습니다. 복건 총독이 경정충의 집안으로 들어설때, 그는 사방에 장수들이 살기 등등하게 도열하고 이쓴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몹시 격양된 경정충은 범승모를 보자 이렇게 꾸짖었습니다.
"나를 언제 제거할 것인가! 나는 두렵지 않다!"
만일 범승모가 모반의 일을 입에 담았다면 그의 목은 거병을 알리는 신호로 쓰여 땅바닥에 나뒹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이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범승모는 순간의 기지를 발휘해 경정충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나왔고, 오히려 화기애애하게 담소를 나누고 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미소 띤 얼굴로 이별하여 등을 돌리는 그때, 범승모는 경정충이 사단을 일으키는 것은 시간 문제라는 사실을 눈치챘을 겁니다. 하지만 문제가 있습니다. 범승모 관할의 총독부 군사는 2,000명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경정충은 그 즉시 동원할 수 있는 군대만 1만여 명이 넘었습니다. 범승모는 남몰래 다른 지역의 관병을 불러 모을 준비를 했지만, 경정충이 조금 더 빨랐습니다.
1674년 3월 15일, 경정충은 해적의 침입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자며 순무 유병정, 총독 범승모를 모두 불러 논의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범승모는 이 비수처럼 서늘한 제안의 본 의미를 파악하고 움직이지 말자고 제안했지만, 유병정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어차피 병력은 상대조차 되지 않으니, 어떠한 방어도 무력하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둘은 경정충의 왕부로 향했지만, 왕부 안에 들어서는 순간 사방에서 닥쳐오는 살기를 느꼈습니다. 그러나 도망을 치기도 전에 병사들이 튀어나와 그들을 사로잡았습니다.
포로가 된 유병정에게 경정충은 항복을 권유했지만, 벌떡 일어난 범승모는 유병정을 걷어차며 경정충에게 소리쳤습니다.
"적이 살육되는 날이 멀지 않았으니, 내가 먼저 그 혼백을 빼앗으리라!"
이에 경정충은 자신의 아버지가 오삼계와 협력했던 이야기를 꺼내면서, 자신 역시 그와 힘을 합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그는 즉시 오삼계를 본받아 변발을 자르고, 명나라의 관모를 쓰고, 사방에 청나라의 폭정을 제거하고 백성을 구하겠다고 선포했습니다.
"명나라의 문물을 함께 받들어, 나라를 되찾고, 천하와 함께 호걸을 기다린다. 중원을 함께 평정하고, 화이(華夷)의 관상(冠裳 : 관리의 예복)을 회복하며,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원하고 폭정과 가렴주구를 없애고, 형벌을 줄이며, 세금을 적게 하는 바 힘쓴다. 고통이 일어나도 행복은 다시 찾아온다. 우리 사신(士紳)과 병사와 백성들은 본 번부가 백성을 위로하고 죄 있는 통치자를 벌하려는 마음을 널리 헤아려 먼저 귀순하라. 마땅히 분별하여 등용하며 은혜를 더할 것이니 우리를 거슬러 행동하여 스스로 주륙을 당하는 일은 하지 말도록 하라."
동시에 복건 전역을 자신의 관할 아래에 두면서, 정경에게 호응을 권했고 오삼계에게 강서로 진군하여 연합 작전을 하기로 제의했습니다. 절강과 강서로 출격한 그의 부대는 순조롭게 진군하며 가는곳마다 승리를 거듭했습니다. 관군이 도망치는 경우도 있었고, 내부에서 반역자가 호응하여 성을 넘겨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경정충의 반란은 청나라 조정에게 엄청난 부담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사태를 확장시키지 않으려는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상가희 번 역시 호응을 하고 나선 것입니다. 상가희는 오히려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상가희의 망나니 아들, 상지신이었습니다.
삼번 중에 가장 먼저 철번 의사를 밝혀 지금의 사태에 이르게 한 인물이 광동의 평남왕 상가희 입니다. 이 무렵, 상가희의 번에는 호부상서(戶部尙書) 양청표(梁淸標), 낭중 하가우(何嘉祐) 등의 조정 관료들이 철번에 대한 절차를 다루기 위해 파견나와 있던 참이었습니다.
그러나 상가희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스스로 철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번은 아들에게 맡길 요량이었는데, 졸지에 번이 사라지게 되었으니 기분이 좋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황제의 의지에 따르려는 찰나, 조정의 관료인 양청표가 왔습니다. 상가희는 조정에서 철번을 재촉하려 한다는 생각에 대단히 불쾌해했고, 양청표의 앞에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분위기는 몹시 긴장되어졌습니다.
어느날 밤, 하가우와 양청표는 잠을 자기 위해 자리에 누웠지만 돌아가는 분위기가 이상하여 뒤척거리면서 좀처럼 눈을 감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새벽이 될 무렵 누군가가 방에 들어와 사태가 이상하다며 둘을 깨웠고, 두 사람은 헐레벌떡 일어나 주위의 동정을 살폈습니다. 그리고 날이 밝기가 무섭게 상가희가 아들 상지신과 여러 수하 장수들을 거느리고 나타난 것입니다.
상가희는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출발은 어렵소. 우리는 광동을 지키길 원하오. 가서 조정에 그렇게 보고하시오."
이는 조정의 철번 의사에 정면으로 맞서는 행위 입니다.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 만일 양청표와 하가우가 고개를 떨군 채 조정으로 돌아와싿면 이후 청나라 조정과 상가희는 서로를 적대세력으로 간주했을 테고, 오삼계의 반란은 마른 장작에 불 타듯 규모가 확장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양청표는 순간의 기지를 살려, 아무렇지도 않은 듯 온화하게 대답했습니다.
"황제의 명을 아직 전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출발을 말하십니까? 내가 경사를 떠나면서 황제를 고별할 때, 황제는 개인적으로 나를 불러 '평남왕의 노고와 공은 매우 커서, 다른 번들과 비교 할수가 없으니, 영원히 남강(南疆)에 주둔하게 하도록 해라' 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그대들에게 황제의 명을 받들어 알리노니, 철수하는 것은 평서 번왕일뿐, 왕은 출발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을 듣자 상가희도 의심과 분노를 풀고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그는 즉시 가무 잔치를 열었고, 사람들은 먹고 마시면서 웃고 떠들었습니다. 삼번 중 하나의 번이 조정에 적대할 상황이 화기애애한 잔치로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특히 흥이 오른 상가희는 사신단에게 크게 사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상가희의 망나니 아들, 상지신만은 머뭇거리면서 사신단에게 인사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상가희는 아들의 이런 태도에 몹시 화가 나서 그 손을 깨물어 버리고는, 사신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했습니다.
"소인이 여러 차례 황제의 은혜를 입었습니다."
반란을 일으킨 오삼계가 광동의 호응을 기대하며, 상가희에게 연락을 보냈던 것이 바로 이 무렵입니다. 그러나 이미 마음을 정한 상가희는 이에 따르기는 커녕 오히려 진충루(盡忠樓)라는 탑을 쌓아 청나라 조정에 대한 자신의 절대적인 충성심을 과시했습니다. 그는 반란에 협력할 의도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직후 경정충이 오삼계에 동조했고, 광서를 막으러 떠났던 손연령도 오삼계에게 항복하여 반란군에 합류했습니다. 그그들은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하여 이렇게 격문을 지어 퍼뜨렸습니다.
"삼번이 모두 변란을 일으켰다!"
상가희는 이런 소문을 듣고 몹시 불안해졌습니다. 그 전이나 그 후의 행적에서 분명하게 보여지듯, 이 노장은 조정에 대항할 의사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반란 세력과 엮어지면 미래는 모르는 것입니다. 초조해진 그는 직접 북경의 강희에게 상소문을 작성하여 보냈습니다.
"신이 경정충과 본래 인척지간, 지금 경정충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하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신이 외람되이 왕직을 차지하고 있고, 나이가 이미 일흔여 살로 비록 어리석다고 하나, 어찌 역적에게 공명과 부귀를 구하겠습니까. 오직 몸과 뜻을 바쳐 평남을 보호함으로서, 신의 한결같은 정성을 보일 뿐입니다."
경정충의 일로 크게 상심해 있던 강희는 이 상소문을 듣자 대단히 기뻐했으며, 상가희의 충성을 장황하게 찬양하고는 이렇게 명령했습니다.
"여러 대를 걸친 원로 신하로서 그 충절이 매우 지극하다. 마음을 다해 일을 처리하고 기회를 보아 (적을) 무력 토벌하라."
상가희에 대한 격려는 말 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병부에 상가희와 적극 협조할것을 명령했고, 현지의 모든 독무와 문무관원들은 상가희의 관리 임면권에 복종하게 했으며, 병마의 배치와 회유 공작에 대해서도 상가희에게 전부 위임했습니다. 1675년, 강희는 상가희를 평남 친왕, 상가희의 아들 상지효를 평남 대장군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나 이 무렵에도 불안의 씨앗은 착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만약 상가희가 사망한다면, 본래 후계자의 자리는 장남인 상지신이 되어야 합니다. 상가희의 나이가 무려 일흔살이니, 상지신도 나이가 사십은 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상가희는 이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했습니다. 상가희의 모사 김광은 상지신이 난폭하며, 아랫 사람을 무시한다는 이유로 그의 세습을 반대했고, 이에 상가희는 상지신 대신 상지효를 후계자로 정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강희가 이를 받아들였습니다. 상지효가 평남 대장군이 된 곡절은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상지신은 이와 대조되어 고작 평구장군(平寇將軍)에 머물었습니다.
모멸감과 수치심, 그리고 자신의 것을 빼앗겼다는 분노. 상지신의 속내를 우리가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그 후의 행적에서 나타나는 모습은 바로 이러한 감정들을 담고 있습니다.
운남의 오삼계. 복건의 경정충. 양대 번이 노골적으로 적대 의사를 밝혀 전장은 더욱 거대해졌습니다. 그러나 실제 전쟁은 '삼번' 에만 국한되지 않았고, 이 때문에 더욱 거대한 싸움이 되었습니다.
사천의 순무 나삼, 제독 정교린, 총병관 담홍과 사천 총독 오지무. 이들은 모두 오삼계가 거병하자 그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킨 무리들입니다. 그리고 이들은 사천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오삼계는 운남에서 사천으로 바로 진격 할 수 있으며, 곧바로 한중을 거쳐 섬서를 칠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섬서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말할 필요도 없을 것입니다. 일찍히 촉한의 재상 제갈량도 한중을 넘어 섬서의 장안을 공략하려는 시도를 헀는데, 만일 섬서를 장악하게 된다면 이를 통해 중화제국의 심장부를 끊임없이 타격 할 수 있습니다. 오삼계나 강희제 모두 이 서북 전선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했고, 오삼계는 이때문에 굳이 형주에서의 전역에 전력으로 매달리지는 않았습니다.
강희는 냉철한 판단력으로 이 전선의 중요성을 순식간에 파악했습니다. 그는 오삼계가 반란을 일으킨 직후, 즉 1673년 12월 무렵에 이미 장수들을 파견해 한중을 거쳐 사천으로 끊임없이 진입하게 했고, 곧 사천을 장악하여 운남과의 연계를 완전 차단하려는 시도를 했습니다. 처음부터 적의 전략적 가능성을 없애려는 시도였습니다.
형주의 전역에서는 늑이금이 재량권을 가지고 행동하고 있는데, 강희는 이 지방에도 독자적인 재량권을 가진 최고 사령관을 정하여 신속하게 움직일 수 있도록 조치했습니다. 그렇게 결정된 인물이 형부 상서 막락(幕洛) 입니다. 막락은 산서와 섬서의 총독을 지내면서 내정을 잘 하여 군민의 신임을 받았고, 현지 사정에 익숙하다고 여겨졌습니다. 강희는 막락을 섬서 경략으로 특별 선임하면서 섬서를 중심으로 서북 변방의 군정을 모두 지휘하게 했습니다. 그는 이 지역에서 모든 총독과 순무를 초월하는 특별 권력자가 되어었던 것입니다.
왕보신
그런데 이 지역에는 왕보신이라는 인물도 있었습니다.
그는 본래 이(李) 씨를 본성으로 쓰고 있었지만, 이후 왕씨 성을 가진 사람의 양아들로 들어가 왕씨가 성을 바꾼 사람입니다. 한때 이자성 반란군에 있기도 했던 그는 대단히 용맹했고 무예는 실로 놀라운 수준이라, 황표마(黃驃馬)를 타고 청군의 진영을 뒤흔들면 병사들은 "황표자가 온다" 라고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습니다.
그 황표자는 이후 청군에 항복했고, 홍승주의 수하가 되어 강남의 평정에 공헌했습니다. 어느정도 강남의 평정이 끝나자 홍승주는 왕보신을 추천하여 오삼계의 번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오삼계 역시 왕보신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다 라고 여겨 그에게 맛있는 음식과 온갖 보물을 주며 지극 정성으로 대접했습니다.
어느날 왕보신은 삼계의 조카 오응린, 마일곤 같은 사람들과 술을 마셧습니다. 그런데 왕보신은 자신의 밥그릇에 죽은 파리가 들어있던 것을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그 모습을 보고 왕보신에게 "파리가 들었다" 고 이야기를 했지만, 왕보신은 그때까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성격이 좋지 않은 마일곤이 주방장을 때려 죽일까 염려되었던 것입니다. 왕보신은 사람들에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돌화살촉도 감당할 수 있으니, 음식은 먹기만 하면 만족하오. 물론 훌륭한 음식을 먹고자 하는 한가로운 마음도 없지 않으나 바쁠 때에는 죽은 파리를 먹어도 놀랄 것이 없다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왕보신의 속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고, 그저 농담하는 소리라 생각해 이렇게 공언했습니다.
"만약 스스로 죽은 파리를 먹는다면, 말안장을 당신에게 주겠소."
사태가 이렇게 되자 어쩔 수없이 왕보신은 죽은 파리를 먹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옆에서 술에 취한 오응린이 이런 소리를 지껄이는 것입니다.
"왕 형이 이같이 말안장을 좋아하다니! 형은 오늘 죽은 파리 먹기 시합을 하여 결국 파리를 먹었는데, 만일 형과 똥을 먹는 시합을 하면, 형은 그때도 똥을 먹을 것인가?"
형편없는 소리에 왕보신은 대노했고, 그 즉시 오응린의 코를 붙잡고 그를 후려갈겼습니다. 오응린이 얻어맞고 꼼짝도 못할때, 왕보신은 이렇게 소리쳤습니다.
"오응린! 네가 오왕의 친조카라는 이유로 나를 모욕하는구나. 다른 사람은 너를 두려워 할지 모르지만, 나는 아니다! 나는 어떤 왕자나 왕손도 두려워 하지 않는다. 나는 왕자나 왕손의 골수를 파먹을 수도, 그 심장과 간을 파 먹을 수도, 또 그 눈도 파낼 수 있다."
그러면서 기합을 내지르며 주먹으로 탁자를 내지르니, 식탁 위에 있는 열두 개의 그릇과 술잔이 산산조각이 나버렸고, 식탁의 네 다리도 동시에 박살이 나버렸습니다. 장수들은 왕보신의 괴력에 기겁하여 아무 말도 못했고 오응린은 깜짝 놀라 줄행랑을 쳐 버렸습니다.
다음 날, 피차간에 취기가 가시고 왕보신도 진정되자, 사람들이 그에게 충고했습니다.
"어제 오응린의 말은 실제로 마음에 없는 말이었다. 당시의 욕설이 너무 지나쳤던것은 맞으나, 피차 서로 화를 낸 것이므로 당신이 오응린에게 가서 사과하는게 낫다."
술이 깬 왕보신도 그렇게 생각해 오응린에게 사과하려고 나왔는데, 마침 왕보신에게 사과하려 온 오응린이 말을 타고 달려오고 있었습니다. 오응린은 왕보신을 보자 깜짝 놀라며 즉시 말에서 내려 친숙한 태도로 손을 잡고 방으로 모셔 왔습니다. 그리고 즉각 엎드려 절하고는 사죄했습니다.
"왕 형. 어제는 술이 만취되어 형의 마음을 상하게 했으니, 널리 양해해 주십시오."
왕보신 역시 맞절한 뒤 두 손으로 그를 붙잡고 일으키며 대답했습니다.
"내가 술에 취해서 욕설을 했는데, 오 형은 어째서 나에게 죄를 묻지 않고 자책하시오?"
그러고는 두 명은 여러 장수들을 다시 불러 연회를 계속했고, 별 탈 없이 일은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가 오삼계에게 이 일을 과장되게 전했고, 게중에 왕손과 왕자를 욕한 비난의 말을 일부러 강조했습니다. 오삼계는 그 말을 듣고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왕보신이 오응린과 술을 먹은 후 다투었다고 들었다. 젊은이들이 술을 먹으면서 서로 욕하는 일은 다반사이다. 그러나 노부(老夫)를 끌어들여서는 안되는 일이다. 하물며 어떻게 왕자와 왕손의 심장과 골수를 먹겠다는 말을 하는가. 옆의 사람이 그 말을 듣고 조롱하여 나에게 말했다. 오삼계, 이 늙은이는 평소에 왕보신을 보석같이 아꼈는데 지금 그는 이 오삼계의 골수를 먹는다고 생각하니 소름이 끼친다. 이후 다시는 사람을 오싹하게 하는 말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왕보신은 오삼계의 말을 전해들었지만, 그 역시 나름대로 기분이 나빴습니다.
"나나 오삼계나, 결국 모두 조정의 신하이다. 왜 내가 오삼계의 가인(家人)으로 그의 명령에 따라야 하는가? 오삼계가 자리 조카를 편애하고 결국 나를 외인(外人)으로 치급하고자 한다면, 나도 자리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다. 내 어찌 이곳에 오래 머무를 수 있겠는가."
그러면서 심복을 북경에 보내 관직의 이동을 꾸몄고, 마침 평량(平涼) 제독의 자리가 비어 있어 강희는 이곳으로 왕보신을 이동시켰습니다. 오삼계는 왕보신이 운남을 떠난다는 말을 듣자 그때서야 인물을 잃은것에 탄식을 그치지 않으면서 융숭히 대접하고 손을 잡았으며, 심지어 눈물까지 흘리며 말했습니다.
"너는 평량에 가도 나를 잊어서는 안 된다. 너희 집이 가세가 빈한한데도 먹여야 할 식구는 많지 않느냐. 만리 길을 가는데 어찌 경제적인 부담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이 안에 2만 냥의 은자가 있다. 노자에 보태어 쓰도록 해라."
왕보신은 매우 감격했습니다. 둘은 이렇게 매우 사이가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왕보신에게 개인적인 매력을 느낀것은 오삼계 뿐만이 아닙니다. 강희 역시 그랬습니다. 그는 왕보신의 재주를 뛰어나다고 생각해 여러 차례 그와 만났고, 한번은 아주 간절하게 말하기까지 했습니다.
"나는 너를 조정에 남겨 두고 아침 저녁으로 보고 싶다. 하지만 평량은 중요한 지역이므로 네가 아니면 안 된다."
그리고 왕보신이 떠나려고 하자, 직접 찾아와 또다시 만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출발 시간이 다가왔으나, 내 너를 보내는것이 무척 섭섭하다. 너는 내 옆에서 등불 놀이를 구경한 뒤 출발하도록 해라."
그리고는 진짜로 떠날 시간이 와서 왕보신이 마지막 인사를 하러 오자, 강희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어좌 앞에 있는 화려한 총이 보여 왕보신에게 친히 건네주면서 말했습니다.
"이 총은 선제께서 나에게 준 것이다. 나는 매번 밖으로 나갈 때, 반드시 이 총을 말 앞에 두어 선제를 잊지 않음을 표시한다. 너는 선제의 신하이고, 나는 선제의 친자식이다. 다른 것보다 이 총을 너에게 줄 터이니 너는 평량을 방어하면서 이 총을 보며 나를 보듯이 하라. 나도 남아 있는 이 총을 보면서 너를 생각할 것이다."
왕보신은 강희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눈물을 흘리고 벌벌 떨며 엎드려서 감격해 대답했습니다.
"성은히 망극하옵니다. 신이 온몸을 다 바쳐도 이 은혜는 갚지 못할 것입니다."
왕보신에 관해서는 이런 곡절들이 있었습니다. 오삼계는 나름대로 계산이 있었습니다. 서북 지대에서 병권을 행사하는 왕보신, 그리고 장용 등은 모두 오삼계와 사이가 좋은 인물들 입니다. 이 두명을 부추겨 군사를 일으키게 하면서 자신이 호남에서 군사를 움직이고, 동시에 동남 연해에서 경정충이 협조 한다면 청나라를 무너뜨리기는 대단히 쉬운 일이 될 것입니다.
오삼계는 그런 마음으로 왕보신에게 사람을 보내 자신에게 협력할 것을 권하는 동시에, 왕보신이 장용을 설득해줄 것을 권했습니다. 왕보신은 오삼계의 서신을 받아 읽었습니다.
왕보신이 생각하기에, 확실히 오삼계가 자신을 굉장히 잘 대해주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강희의 은혜에 비하면 못 미치는 수준이라고 여겼습니다. 이런 판단 끝에 왕보신은 오삼계가 자신에게 보낸 서신을 강희에게 보내며 자신의 충성심을 보였습니다. 강희는 크게 기뻐하며 왕보신에게 지금 사천 정벌을 담당하는 막락에게 협조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생겼습니다. 왕보신은 막락과 대화를 해봤지만, 막락은 왕보신의 이야기를 완전히 무시해버린 것입니다.
"그 뜻이 괴이하다."
자신의 뜻이 완전히 묵살되자 왕보신의 기분이 좋을리 없었습니다. 그는 강희에게 상소을 올려 자신은 일전에 홍승주를 따라 남부의 평정에 나선 바가 있으니, 서북 전선보단 호남 전선으로 파견되어 싸우는 편이 더 나을것이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강희는 서북 전선을 매우 중요시하여 "사천에서도 공을 세울 수 있다." 라고 그를 설득했고, 왕보신은 어쩔 수 없이 막락을 따라 파견되었으나 마음 속은 불만으로 가득했습니다.
이런 속사정을 가지고 있는 관군과 적군인 오군은 사천성 북부의 낭중(廊中) 지역, 보녕에서 대치 상태에 들어갔습니다.
처음의 싸움에서 막락은 오삼계 부대와 교전을 벌여 큰 승리를 거두었지만, 이후 대치가 길어지면서 군량이 바닥나고 있었습니다. 강희는 처음부터 이 싸움이 장기전의 양상을 보일 것이라 예상하고 군량 운반이 수월하도록 조치를 취했으나, 서북 지역이 워낙 척박하고 백성들이 가난한데다, 사천이 워낙 험해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오군 소속의 정교린 부대가 가릉강(嘉陵江)의 운반 선박을 모조리 약탈해버리고, 깎아 지른 듯한 잔도(棧道)는 오군이 선수를 쳐 무너뜨려 버리자 청군의 병사들은 2개월 동안 아무런 보급도 받지 못하는 어려움에 처하게 됩니다. 이때문에 병사 4,000명이 뿔뿔히 흩어지기도 합니다.
잔도
이런 형편 속에 관군이 근근히 적과 대치하고 있을때, 왕보신은 막락에게 병력 증강을 요청했습니다. 막락은 이에 응해 기병 2,000명을 추가로 파견했습니다.
그런데 이 과정을 거치면서, 정작 왕보신의 부대가 본래 거느리던 좋은 말들은 모두 다른곳으로 보내졌습니다. 반면 왕보신 부대에 도착한 말들은 모두 피로에 지쳐 파김치가 된 말들 뿐이었고, 이러한 행정 조치가 한두번도 아니고 계속 이어지자 왕보신은 폭발해버렸습니다.
"막락은 나의 좋은 말을 보내고, 피로한 말을 나에게 주어 사지로 몰아 가려 한다!"
오군은 관군이 이렇게 내분을 벌여 꼼짝도 못할때 양평(陽平)을 노리는 움직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다급해진 강희는 우선 막락에게 보녕에서 철수하라고 명령하는 동시에, 새로 모집한 녹기병(綠旗兵)은 오삼계 군단을 막긴 벅찰것이라고 여겨 대장군 패륵 동액을 보내 신속히 구원하도록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동액의 행동은 늦었고, 그 사이에 변란이 일어났습니다.
12월 4일, 막락의 군영과 2리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했던 왕보신은 "말은 살찌고 식량은 부족하다." 라는 소문을 내며 암암리에 날랜 병사를 각처의 요지에 주둔시키고, 군대를 막락의 군영으로 진격했습니다. 워낙 갑작스러워 막락은 적절히 대응조차 못했습니다.
막락이 정신을 못차리는 사이, 그의 친위병사가 부대원을 수습해서 어느정도 반격을 하려는 차란, 용맹무쌍한 왕보신이 일선에 나서 직접 병사를 지휘하면서 전투의 흐름은 다시 바뀌었습니다. 왕보신의 부대는 화포와 화살을 퍼부어대었습니다. 결국 막락은 유탄에 맞아 즉사했으며, 총사령관이 전사하자 부대는 순식간에 괴멸되었습니다.
이 반란 자체가 계획적이었다기 보단 충동적이었기에, 왕보신의 세력은 그렇게까지 강하지 않았습니다. 살아남은 막락의 2,000명의 병사가 왕보신에게 투항했다가, 반란군에 동조하길 원하지 않아 뿔뿔히 도망치는 일도 있었고, 왕보신을 따르던 군대들도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 탓입니다. 왕보신은 이런 상황에서 정처없이 북상했습니다. 그러다가, 드디어 당도한 대장군 동액의 부대와 만났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괴이한 일이 벌어집니다. 동액은 왕보신을 매우 두려워 하여 군대를 이끌고도 감히 토벌할 생각을 내지 못한 것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아예 이 시점에서 동액이 왕보신에 항복하여 오삼계 반란군에 협조했다는 이야기까지 있습니다. 동액이 이해할 없는 행보를 보이며 물러난 탓에 왕보신의 세력은 순식간에 한중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문제의 다앗자, 동액은 왕보신의 반란에 대해 조정에 보고를 했지만 워낙 짤막하여 상세한 내용을 알기가 힘들었습니다. 조정에서는 어리둥정한 심정으로 보고를 곱씹어보고 있었는데, 마침 막락 휘하의 군관이 잔도를 타고 도망쳐 당국에 사태를 보고 했습니다. 이후 섬서 총독 합점이 상소를 통해 조정에 정식으로 보고하자. 강희는 드디어 진상을 알게 되었습니다.
왕보신의 배반에 강희제는 진심으로 놀라워 했습니다. 사태는 이재 매우 심각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사천에서 운남으로 진격하려던 강희의 계획은 시작도 제대로 하기전에 망가져버렸으며, 오삼계와 왕보신이 협력하면 서북 지방의 전선은 엄청난 영향을 받을 것이 자명했습니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북경까지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이 당시 강희제의 불안을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심지어 자신이 직접 형주로 친정, 오삼계와 격전을 벌이겠다는 의사 표시에서 엿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왕보신이 병란을 일으켜 민심이 진동하고, 어리서은 무리들이 기회를 틈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 이 역시 아직 진정되지 않았다. 이전에 장군 및 대신들이 지휘를 준수하지 않고, 서로 관망하여 진격하지 않아 역적이 대강의 남쪽에 거점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적이 아직 토벌되지 않았는데 또 이러한 변란이 발생했다. 짐은 친히 형주에 이르러, 기회를 살펴 군대를 파견하고 적의 우두머리 오삼계를 토벌하고자 한다. 오삼계가 토벌되어야만, 흩어져 있는 도적의 무리들이 더 이상 공격하지 않고 백성들이 편안함을 얻을 수 있다."
친정 자체는 대학사와 내대신들이 모두 붙잡고 말린 통에 저지되었습니다. 하지만 어떻게든 대응법을 생각해 내야만 했습니다. 반란의 물결이 전중국을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 라벤더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7-26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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