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3/05/15 00:28:54
Name 피오라
Subject 더 열심히 살자
열 시도 넘어 집에 돌아오는 길 드문드문한 누런색 가로등과 시끄럽게 울리는 자동차 경적소리가 고되다. 깜깜한 방에 불을 켜는게 고되고 침대에 아무렇게나 걸터앉아 양말을 벗는게 고되고 그다지 건실하지 못한 몸을 거품묻혀 닦아내는 일이 고되고 책상앞에 앉아 하루를 보내기 전에 해결해야 할 일들을 붙들고 있음이 고되구나. 사방에 널브러진 아침의 흔적을 정리하는 일도, 불을 끄고 침대에 눕는것도, 내 몸뚱이 반만한 곰인형을 온몸으로 둘러 안고 잠을 청하는것조차 고되네. 옆집 혹은 앞집의 잠든 누군가가 자신은 오늘 행복으로 시작하여 만족으로 끝나는 하루를 보냈다 말해준다면 나는 그것만으로도 진심으로 즐거울테다. 어쨌든 나는 내일도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대충 점심겸 저녁식사를 입에 구겨넣은 후에 내키지 않는 아르바이트를 가야하겠지만, 어쨌든 진심은 진심이니까.

새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수학학원은 열시에 수업이 끝나는데, 전철을 타고 집에 오면 열한시가 코앞이다. 학생들은 소수이고 대체로 특목고 진학을 희망하고 있거나 혹은 특목고에 재학중인 학생이라 오히려 수업의 부담은 크지않다. 내버려둬도 알아서 잘 하는 그 녀석들은 작년에 친 기말고사나 얼마전에 끝난 중간고사 성적표를 수시로 들여다보며 열심히 살고자 하는 의지를 다진다. 누군가가 지난 분기 내 인생 성적표를 손에 쥐어주고 훌쩍 가버린다면 나도 그를 손에 쥐고 살 수 있을까. 저맘때의 나는 어땠는가. 지금의 나보다 더 지혜롭고 활기차지 않았던가. 뭐 그런 생각을 가끔씩 한다. 물론 돌아가겠냐 묻는다면 손사레를 치겠지만, 어쨌든 그렇단거다. 사실 대체로 현실은 상상보다 고된 법임을 나는 잘 알고있지.

여전히 걷고 달리다 가끔 넘어지기도 하곤 한다. 아플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때도 있는데, 요즘은 부쩍 다시 일어나보지 않겠느냐 손 뻗어주는 이가 없음이 조금 슬프다. 심지어는 내가 넘어진것도 몰라. 내가 네 엉덩방아에 관심이 없듯이 너 또한 내 쿠당탕탕엔 관심이 없다. 실은 나도 너도 모두가 그렇게 하나도 안 아픈 얼굴로 남몰래 누군가의 손을 기다리다가 결국은 아무렇지 않은 척 툭툭 털고 일어나는 거겠지. 희망찬 인생을 향해 앞만 보고 달려가자 하기엔 조금 나이를 먹었고, 인생사 공수래공수거인데 주변도 살펴보며 천천히 걸어보오 하기엔 조금 어리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산다, 는건 아무래도 좀 과장이고... 세상 사는게 다 그렇지 무얼, 따위는 별로 위로가 안 되는구나. 이럴 땐 아무 말 않고 손이나 꼭 잡아주면 그걸로 만족. 포옹이라도 해주면 뜨거운 눈물을 쏟을까 싶다만 그럴 일은 없네요. 그래서 우울하니? 라고 묻는다면, 에이 그래도 겨울은 지났는데요, 라고 말하고 싶다. 정말로 그리 답 할 수 있겠는가는 별개의 문제이고, 어쨌거나 그정도는 사실 어렵지도 않은 일이다. 다행스럽게도.

고맙게도 배터리가 다 되어서 화면이 꺼질락 말락 할때 쯤 누군가가 짠 하고 나타나서 충전기를 짠 하고 꽂아주고 간다. 완충까지 기다려주지는 않고 30% 선에서 짠 하고 끊더라만 그마저도 고마울 따름이지 짠짠! 크고 원대한 10년 후 보다는 소소하고 자잘한 일주일 후를 기다리다 보면 그게 쌓이고 쌓여 보름이 되고 한달이 되고 일년이 된다. 이러다 어느샌가 돌연 자연사 하는 그 날을 맞이하는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그것도 괜찮겠다. 그 짧고도 길 시간동안 완충의 만족감을 너댓번정도 느껴 볼 수 있다면 더욱 괜찮겠고.

그래서, 그 순간의 너는 어떠한 모습이면 좋겠니? 따위의 질문은 거절한다. 진짜 무서운건 언젠가의 그 순간이 아니라 당장 닥쳐올 내일 혹은 다음주란걸 너 또한 잘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조금 더 열심히 살자. 열심히 살아서, 열심히 산 만큼 잘 살았으면 좋겠다. 잘 살아서, 마음 편히 살았으면 좋겠다. 누구나가 그러했으면 좋겠고, 누군가라도 그러했으면 좋겠다. 아직도 내 진짜 꿈은 적게 일하고 많이 벌며 그 남는 시간에 글이나 깨작거리는 것이다. 다행히도 나는 아직 조금 더 열심히 살만한 여유가 있다. 사실은, 아주 많다. 사아시일은, 맥주나 홀짝이며 이딴 글을 아무데나 아무렇게나 싸지를 정도로 아무러하게나 살고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고된 삶도 아니다. 너 또한 실은 살만하리라 믿는다. 찍

* 信主님에 의해서 자유 게시판으로부터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3-06-13 09:39)
* 관리사유 :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넥서스
13/05/15 00:3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화이팅 하시길 바랍니다 ^^
김어준
13/05/15 01:00
수정 아이콘
위험수위입니다.
Paranoid Android
13/05/15 01:03
수정 아이콘
잘읽었습니다 모두열심히살아보아요 화이팅
13/05/15 01:17
수정 아이콘
나름대로는 열심히 살고있다고 생각하는데 주변을 보니까 도저히 그런 소리를 할 수 없습니다. 경향신문에 칼럼중 '남들만큼 사는거, 참 어렵다'라는 칼럼이 있었는데 정말 공감되더라고요. 마 이래저래 열등감도 느끼고, 목표의식의 부재인가, 이런생각도 해보고...

남의 글에서 한탄만 하다가 가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크크크
리니시아
13/06/14 09:09
수정 아이콘
희망을 주시는 글이군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2316 정관사 the를 아십니까? [42] Neandertal12931 13/05/28 12931
2315 국경없는 의사회를 아시나요? [13] OrBef7355 13/05/28 7355
2314 어느 장애인 소녀의 등교길 [9] par333k7703 13/05/28 7703
2313 [미술] 나도 저건 그리겠다 [74] A.디아13362 13/05/27 13362
2312 일본서기는 위서인가 [18] 눈시BBbr10838 13/05/25 10838
2311 [야구] 최고가 아니었던 최고. 무관의 제왕, 한용덕 [14] 민머리요정10374 13/05/23 10374
2310 오늘은 장례식 내일은 결혼식 [36] 떴다!럭키맨10768 13/05/23 10768
2309 자유 의지와 영혼과 자아와 뇌. 우리는 기계인가? [127] OrBef42472 13/05/23 42472
2308 야구의 불문율과 위협구 [125] 삼먁삼보리11012 13/05/22 11012
2307 좀 이상한 헌팅 [44] 눈시BBbr11692 13/05/20 11692
2305 [LOL] 많은 선수의 희생을 강요하는 현 메타.. [48] Leeka10998 13/05/18 10998
2304 [LOL] 붉은 새에 대한 잡설 [21] 모리아스8603 13/05/15 8603
2303 요리 잘하는 남자가 여자에게 인기가 많다면서요? [53] sungsik11757 13/05/20 11757
2302 기묘한 소개팅 [105] Swings15258 13/05/18 15258
2301 키배에 뛰어들 때의 방침 [76] 눈시BBbr10918 13/05/17 10918
2299 독서 전략 적용 [4] flowers8009 13/05/15 8009
2298 아찔했던 순간 [64] JSclub10790 13/05/15 10790
2297 더 열심히 살자 [5] 피오라7643 13/05/15 7643
2296 명량해전에 대한 새로운 연구 [73] 눈시BBbr13312 13/05/14 13312
2295 그럼 상상이 많은걸 해결해 줄까? [14] par333k6840 13/05/13 6840
2294 상상하지 않은 만큼, 비겁해 질 수 있었다. [21] par333k8339 13/05/13 8339
2293 [연애학개론] 행복하게 해주기보다, 비참하지 않게 해주는 것이 더 어렵다 [23] Eternity12681 13/05/11 12681
2292 [야구] 처음부터, 그리고 영원한 4번타자, 영원한 홈런왕. 장종훈 [32] 민머리요정9295 13/05/10 9295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