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1/07/29 01:14:59
Name 눈시BB
Subject 남한산성 이후 - 1. 해가 빛이 없다(日色無光)


이미 써서 새벽에 올릴 생각하고 있던 글이라서 올립니다. 솔직히 몇 분이나 봐 주실지 의문이네요. 이런 상황에서 이런 글 올려야 되는지도 의문이지만... 그래도 올리겠습니다.

뭐... 제목과 지금 pgr의 상황이 잘 어울리지 않나요.

pgr은 역사 사이트가 아닙니다. 그런데 제가 이런 글을 열심히 올린 것은 그게 pgr이었기 때문이었죠. 얼마나 많은 분들이 봐 주시든, pgr이었기에 제가 알고 있는 걸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굳이 역사 글이 아니더라도 야구, 시사 등의 글들로 여러 가지 얘기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pgr이었으니까요. 이 곳의 마력에 빠진 분들도 그렇지 않을까요. 단지 e스포츠 얘기할 거면 왜 그런 많은 글들이 올라올까요. 그게 pgr에 대한 애정 아니었을까요.

이번 일이 잘 해결됐으면 좋겠습니다.

----------------------------

1. 청군 철수, 가도 공략
2월 2일부터 13일까지 청군은 순차적으로 철수를 시작했습니다. 그 중 청 태종을 중심으로 한 주력은 평안도 쪽으로, 몽고병들은 함경도 쪽으로 철수했죠. 돌아가는 길마다 약탈이 계속되었습니다. 청에 끌려간 포로, 피로인들의 수는 정확한 수가 밝혀져 있진 않지만, 수십만에 달한다는 게 공통적인 인식입니다. 병자호란 후에 심양의 인구가 50~60만이었다고 합니다. 그 중에 조선인들은 얼마나 되었을까요. 이런 포로 사냥은 특히 몽고병이 심했다고 합니다. 안 그래도 약탈로 먹고 살던 자들, 하지만 중국의 경우 조공으로 어느 정도 그들을 달랬지만 청은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었죠. 그 때문인지 청 태종도 그들을 크게 말리지 않았고, 오히려 조선에게 그들이 철수하는 통로를 비우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보다 못 한 함경도군은 이들을 공격해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둡니다. 특히 병사 서우신이 앞장섰는데, 전과를 거둔 후 너무 무리하게 들어가다가 대패하고 유배당합니다. 여기에는 겨우 돌려보내는데 또 꼬투리 잡힐까 하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반면 감사 민영휘는 이들을 환대해서 이후 몽고병들이 약탈을 크게 하지 않았다고 하는군요. 인조는 결국 백성들에게 크게 사과하는 교유문을 내려야 했습니다. 뭐... 이들 피로인 문제는 다음 편에 아주 자세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청군 주력이 압록강을 건넌 건 3월 중순 무렵이었습니다. 한편, 남은 병력들은 가도를 공격했죠. 여기에 조선군도 참가합니다. 청군을 이끈 건 마부대와 공유덕, 조선군을 이끈 건 임경업이었죠. 4월 8일, 가도는 큰 무리 없이 함락됩니다. 조정에서는 가도에 몰래 이 사실을 알릴까 하는 논의가 있었지만, 실행하진 않은 모양입니다. 가도 공격은 조선이 청에 얼마나 충성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첫 작전이었고, 청은 예의주시합니다.
승정원일기에는 상륙할 때 조선군은 소극적이었고, 약탈도 청이 시키자 마지못해 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한편 아예 응하지 않았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하지만 병자록에는 가도 공격을 조선군이 주도한 것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가도의 방비가 엄하자 청군이 고민하고 있었는데 임경업이 밤중에 약한 곳을 찌르기를 건의했고, 상륙 뒤에도 조선군이 더 심하게 죽이고 약탈했다고 하죠. 때문에 명군은 “조선이 무슨 원수가 있길래 이러느냐”고 합니다만... 청의 압박 외에도 한 쌓인 건 많죠. 청천강 이북의 백성들은 “한인들이 모두 갔으니 이제 살 수 있겠다”면서 기뻐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청은 가도 함락의 공을 조선 포수들에게 돌리며 피로인들 중에서 포 쏠 수 있는 자들을 골라 포술을 교육했다고 하죠. 이런 기대는 이후의 파병 요구와 효종 대의 나선 정벌까지도 이어집니다.

뭐... 이렇게 명청교체기에 정말 특이한 역할을 하며 청과 조선 양쪽의 머리를 아프게 했던 가도는 평범한 섬으로 돌아갑니다. 조선군의 공을 치하하며 한인 포로 250구를 주자 임경업이 조선인 포로와 교환해 달라고 했다는 일화, 청에서 직접 조선군의 공을 치하하려 평안 병사 유림을 불렀는데 유림이 가지 않자 백마산성에 가둬 버린 일화도 있네요.

2. 삼학사
척화를 주장했다는 죄목으로 청에 끌려간 사람은 홍익한, 윤집, 오달제입니다. 끌려가는 동안 추위에 떨고 옷도 갈아입지 못 해서 온 몸에 이가 가득했다고 하죠. 하지만 이들은 청의 압박에도 시종일관 당당했다고 합니다. 그들을 귀화시키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와서 살겠냐는 물음에 “혹시 돌아갈 수 있을까 해서 지금까지 살아 있었다. 돌아가지 못 한다면 죽는 게 낫다”고 맞섰다고 합니다. 결국 이들은 처형당합니다. 조선에서는 이들이 정확히 언제 죽었는지 정확히 몰랐다고 합니다.

뭐... 그 절개를 칭찬해야 될까요. 당당한 모습에 부러워해야 될까요. 그래도 이들을 높이 사야 하는 게, 이들은 청에서는 본보기였고 조선에서는 버린 말이고, 잘라낸 꼬리였다는 것입니다. 조선에서 척화를 외치지 않은 유학자들이 얼마나 될까요. 그들은 이런 상황에 굴복하지 않고 당당히 자기 소임을 마쳤죠. 청에서 “조선에서 척화한 자가 너 하나겠느냐”고 심문한 것에 대한 홍익한의 말을 옮겨 보죠.

남한산성 입성 때부터 인조는 “애새X들(연소자들 - -a)이 척화를 외쳐서 이렇게 됐다”고 했고, 출성 이후에는 본격적으로 책임을 척화신들에게 돌렸습니다. 안 그래도 벼슬 알 하는 걸 미덕으로 삼던 유학자들도 오랑캐에 고개 숙인 조정에 출사하기 싫다며 더 깊이 몸을 숨깁니다. 이들을 산림, 혹은 산당으로 불렀고 인조는 이들을 크게 비난합니다. 효종, 현종 대에 가장 크게 볼 수 있는 모습이 이 산당들을 어떻게 조정으로 부르냐 하는 거였죠. 이후 등용된 산당의 대표주자로 송시열이라는 이름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청군이 철수한 후 삼전도비를 세울 때 조선에서 글을 짓게 했는데, 조희일이 일부러 까칠하게 짓고 이경전은 병을 핑계로 빠지면서 장유와 이경석의 글이 채택됩니다. 그 중 이경석의 글을 수정해서 삼전도비를 만들게 되죠. 이경석은 이 때 크게 절망하며 글을 배운 것을 후회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걸 받아들였고, 후에 청과 시비가 붙었을 때도 모두 자기 잘못이라면서 책임을 지려 했죠. 이런 그에게 송시열은 좋은 글을 써 주는 척 하면서 신나게 조롱했습니다. 이른바 수이강壽而康(오래 편하게 살았다) 사건이었죠. 청에 무릎 끓은 이들에 대한 시선을 볼 수 있습니다.

재밌는 건 청은 이런 흐름에 크게 간섭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조정이 처음 척화신을 보낼 때 열 명을 넘겨야 되느냐의 문제로 고민했습니다. 청이 잡아간 건 겨우 세 명이었고, 그들 모두 자원한 거였죠. 인조에게 압박은 줬고 친명 행보에 대해 간섭하고 척화신들을 계속 잡아갔지만,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지배층을 완전히 뒤흔들 수준의 간섭은 없었습니다. 현명하다고 할 수 있을지도요. 덕분에 산당들이 조정에 대거 진입한 이후 척화신들을 높이 사는 게 당연시 됐습니다.

다만 실록 및 병자록을 보면 주화 vs 척화의 극렬한 대립이라는 통설에 위화감이 심하게 듭니다. 오히려 척화파는 臣이라는 글자에 대한 것이나 명을 임금의 출성 같은 부분에 딴지를 건 것 뿐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죠. 이 문제들이 중요한 문제였기는 하지만 화친 자체에 대한 것은 척화파도 크게 부정하지 못 했다는 거죠. 병자호란 당시의 척화파의 움직임은 과장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척화파가 주화파와 대립하기는 했지만 그건 “이런 조건은 안 된다. 싸우자”였지 “화친은 절대로 안 된다. 무조건 싸우자”는 게 아니었다는 거죠. 물론 대간들이야 줄기차게 척화를 요구했지만요. 후에 척화의 가치를 높이면서 과장된 게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봅니다.

3. 명나라 정벌
이후 청은 명 정벌에 조선군을 징병할 것을 강요합니다. 조선에서는 고민될 수밖에 없었죠. 명에 대한 의식은 아직 남아 있었고, 명이 완전히 쓰러진 것도 아니었습니다. 거기다 전쟁으로 조선 내부는 초토화된 상태였죠. 흥미로운 건 이 때 앞장선 것이 최명길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명에 대한 은혜를 저버릴 수 없다며 징병을 거부할 것을 진언합니다. 그러면서 "의리만 앞세우면 안 될 테니 나라가 피폐해졌다는 것을 넣자"고 건의하죠. 이를 알리기 위해 봄에 갔던 이성구는 아예 말도 못 꺼내고 돌아왔고, 이어서 최명길이 37년 가을에 청으로 향합니다. 징병을 거부하고 끌려간 세자와 대군을 돌려달라는 요구를 하기 위해서였죠. 그는 청으로 가서 이렇게 말 했다고 합니다.

"나는 수상으로서 모든 본국의 일은 주관하지 않는 것이 없다. 이 일은 오로지 나한테서 나온 것이니 오직 한 번 죽기를 원한다"

이런 최명길의 태도는 계속됩니다. 하지만 청의 요구도 계속돼서 다음해인 38년에도 병력 5000을 보내라는 요구를 하죠. 청 태종은 아예 "심양에 인질이 있다는 것을 잊었느냐"고 협박합니다. 그 때 조선에서는 병력을 모으긴 했지만 지정된 기한에 도착하지 못 해 청군이 화를 내며 돌려보냈습니다. 이 때 조정은 조정대로, 끌려간 소현세자는 소현세자대로 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고 합니다. 소현세지는 금주 공략에 직접 끌려가야 했죠. 이 때 후의 효종인 봉림대군이 형의 호위병을 자처했다고 합니다.

39년, 청은 수군 6000명을 요구합니다. 또한 41년에는 1500명의 병력을 요구하죠. 결국 조선은 이를 따릅니다.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지천유사에는 37년에 이어 38년에도 최명길이 청으로 가서 징병 요구를 무마시켰다고 적고 있습니다. 이후 그가 영의정에서 물러난 후에야 청의 징병을 허락했다는 거죠. 기록이 상충되네요. 이 해 최명길이 청에 한 번 더 간 것으로 보아 이에 관련되긴 한 듯 합니다. 그가 영의정에서 물러나 있다가 결국 징병이 됐다는 소식을 듣고 한탄했다고 하네요.

청 입장에서 조선의 원병이 필요한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일단 고사리손이라도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었죠. 금주 원정은 4년이나 이어졌습니다. 명군은 군량을 바탕으로 2, 3년을 버틸 수 있다고 자랑했고, 청 태종은 "그러면 5년 이상을 포위하겠다"고 응수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병력 하나가 더 필요했고, 군량 지원도 시급했죠. 거기다 기동전이라면 모를까 조선군은 공성전에서 우수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물론 임진왜란부터 남한산성가지 자기가 방어인 입장이었습니다만 -_-a 나머지 하나는 역시 선전효과죠.

여기서도 두 가지 입장이 존재합니다. 첫째는 최명길부터 지휘관인 임경업끼리 짜고 태업을 했다는 것이죠. 수군은 배가 떠내려 갔다면서 핑계를 대고, 화살에는 화살촉을 없애고 화포는 공포탄을 쓰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는 것입니다. 이게 일반적인 인식이죠. 반면 그 때 청에 같이 끌려갔던 인평대군은 조선군의 사격 솜씨가 뛰어나서 명군이 청군보다 조선군의 목에 상금을 두 배로 걸었다고 적고 있습니다. 금주 전투 이후 투항한 홍승주는 패배의 원인을 조선에만 돌렸다고 하구요.

두 가지를 하나로 합쳐 보죠. 조선군이 태업한 것은 사실일 겁니다. 하지만 태업에는 한계가 있었고 어느 정도 전과를 거두었다고 봐야 되겠죠. 겨우 1500명이기에 큰 전과는 아니었지만 청은 그것을 크게 선전했고, 명 역시 그 분노를 조선에 쏟았다는 것이죠. 특히 명에 투항한 장수들은 조선에 대한 분노가 심했습니다. 그리고 심하 전투부터 효종 대의 나선정벌까지 계속된 조선 포수에 대한 중국의 기대를 보면 조선군이 소수였지만 정예했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봐야겠죠. -_-; 어디까지나 소수지만요.

이후 청은 더 이상 조선에 징병을 요구하지 않았고, 북경을 점령한 후부터는 소현세자 등을 돌려보내고 조선의 세폐도 크게 낮춰주면서 확실히 명을 대신한 대국으로 자리잡습니다.

이런 조선의 태업 및 명과의 내통(?)에 대해서는 최명길에 대해 얘기하면서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4. 해가 빛이 없다
병자록에서는 출성에 대해 "해가 빛이 없다"(日色無光)고 쓰고 있습니다. 그 후 조선의 모습은 분통이 터질 뿐이죠. 백성들은 고통 받고 끌려갔고, 자기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친청 행보를 보이는 작자가 있는가 하면, 명분만 중요시 해 지 혼자 깨끗한 척 설치는 부류들은 여전히 조선의 이데올로기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이후 조선은 성리학의 교조화가 철저히 이루어지게 되죠.

그래도 생각보다 희망은 보이긴 했습니다. 효종, 현종 대부터 정국이 수습되죠. 청이 조선에 생각보다 관심이 적어서기도 했겠지만요. 하지만 이 때는 물론 숙종 대에도 대기근이 들이닥쳐 왜란, 호란에 이어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재밌는 건 이 때 대마도의 사신이 본격적으로 자기네 연호를 썼다는 점입니다. 이전까지는 최대한 안 썼죠. 하지만 조선이 명 대신 청의 연호를 쓰기 시작하니 우리도 우리 연호를 쓰겠다고 나선 겁니다. 조정에서는 당연히 격분하지만, 최명길은 "우리가 절개를 잃었으니 할 말이 없다"고 하면서 인정해 주게 됩니다. 청에 맞서기 위해 일본과 사이가 나빠지면 안 되기 때문도 있겠지만, 슬픈 현실이죠. (실상 일본이라는 말만 내세웠지 대마도에서 주도한 거라서 더 열 받죠) 이런 게 이어지면서 숙종 대에 울릉도 문제가 불거지게 된 게 아닌가 싶네요.

뭐... 얘기하자면 길겠네요. 여기서는 두 호란에 대한 총평을 얘기하면서 끝마치겠습니다.

정묘호란 부분에서 얘기했듯 인조는 초반에 서북에 병력을 집중시키며 공공연히 요동 회복을 외쳤습니다. 이괄의 난으로 충격 받고, 애초에 그게 명에게 반정의 당위성을 인정받기 위해서였기에 그건 곧바로 수그러들었죠. 하지만 모문룡을 제어하지 못 한 상황에서 침략의 명분을 고스란히 줘 버렸습니다. 정묘호란 때 뜯어간 것은 생각보다 크지 않으며, 이후에도 약탈보다는 무역을 통해서 얻으려 했죠. 이 점에서 정묘호란은 물자를 얻으려는 실리보다는 조선과 명을 떼 놓으려는, 혹은 조선에게 인정받으려는 명분을 위한 전쟁이라고 봅니다. 광해군은 누르하치에게 칸이라는 칭호를 썼죠. 이것과 외교를 통한 무역 허가, 이 정도만으로도 정묘호란은 막을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병자호란까지 이어서 생각할 순 없습니다. 정묘년과는 달리 병자년에는 청이 북경까지 한 번 털어먹은 상황이었고 몽골을 복속시킨 상황이었죠. 물자의 부족은 더 심해졌고, 자신감은 더 커졌습니다. 그리고 명이 쉽게 쓰러지지 않는 상황에서 명의 최고 제후국인 조선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 게 반드시 필요했습니다.

오히려 물자를 더 내놓으라는 것은 조선에서 들어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애초에 돈으로 평화를 산다는 방침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명 대신 청을 황제로 섬기라는 것은 과연 가능했을지 의문입니다. 조선 초기니 후기니로 상황을 옮기지 않고 그 시대에 왕만 바꾼다고 생각한다면, 그 어떤 왕이 왔어도 전쟁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왕 자신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더라도 그 밑의 신하부터 조선 전체의 생각이 그랬으니까요. 그나마 그걸 해 보려 했던 광해군은 반정을 당했죠. 하지만 광해군 자신도 그 상황에서 몰렸을 때 곧바로 청으로 돌아설 수 있었을지는 부정적입니다. 그 자신의 생각도 그렇고, 설사 자신이 그렇게 생각했더라도 밑에서 그걸 들어줬을지가 문제인 거죠. 그래서 광해군 얘기하면서 낸 결론이, 인조가 아니더라도 그는 자리를 유지할 수 없었을 거라는 거였죠.

간단히 결론을 내리면, 정묘호란은 막을 수 있었겠지만 막았더라도, 그리고 어떤 왕이었더라도 병자호란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을 거라는 겁니다. 뭐, 이에 대한 인조의 모습 및 총평은 뒷글로 미루겠습니다. 광해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구요.

다음 글에서는 청에 끌려간 조선인들, 그리고 남은 백성들의 모습을 다루겠습니다. 참 아름다운 글이 될 거 같네요. 그 다음 글에서는 인조부터 최명길, 임경업, 정명수 등 그 시대의 인물들에 대한 모습을 다루구요. 마지막으로 효종, 현종 대까지 이어지는 병자호란의 후일담을 다루면서 나름 길었던 글을 맺겠습니다.

------------------------------------------
어디서 어디까지를 얘기해야 될 지 잘 모르겠네요. 지금 머리 아픈 것도 있지만... 그 이후가 워낙 많아야죠. 뭐... 최대한 이런저런 얘기를 해 보려고 합니다. 좀 난잡해도 이해해 주셨으면 하네요

다음 글 bgm을 어디서 가져올지는 다들 예상하시겠죠?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07-30 12:45)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1/07/29 01:16
수정 아이콘
언제나 글 감사합니다 :)
사료를 정리하고 글을 쓰시면서 느낀바를 풀어도 그 내에서는 충분히 좋을거 같습니다

다음 비지엠은 음 그 드라마려나요
11/07/29 01:18
수정 아이콘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트렌드
11/07/29 01:20
수정 아이콘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기분이 우울했는데 조금은 나아지려하네요 .
11/07/29 01:21
수정 아이콘
어느새 눈시BB님의 팬이되어버렸습니다.

역사가 제 관심사여서 어쩔수 없군요 ..... 하하


오늘도 잘보고 갑니다.
Amunt_ValenciaCF
11/07/29 01:21
수정 아이콘
음악 좋네요. 다음 글 bgm은 분명 제 머리 속에 스치는 그 노래일 것이라 생각합니다.

괜찮으시다면 병자호란 다음 편으로 나선정벌에 대해 써주실 수 있을까요? 굉장히 흥미있을법한 주제인데 제대로 된 글을 본 기억이 없어서...
Gordon-Levitt
11/07/29 01:21
수정 아이콘
글 감사드립니다~

혹시 부탁드리면 관련글을 써주시기도 하시는지요?
요즘 공주의 남자라는 드라마를 닥본사하고 있는데 너무 재미있는 나머지..('-';
이래저래 문종-단종-세조 관련해서 뒤적뒤적 거리고 있어요 "
생육신/사육신 관련된 다양한 시각도 재미있게 보고 있구요!
눈시BB님 글에서는 어떻게 나타날지도 궁금해서 댓글한번 써봅니다:)
아나이스
11/07/29 01:22
수정 아이콘
추천버튼 누르고 갑니다.
시나브로
11/07/29 01:23
수정 아이콘
저도 타고난 역덕후라 잘 보고 있고 유익해요.

그리고 눈치 보지 마시고 올려주실거 올려주세요.

저런 일 있다고 pgr內 모든 회원들이 활동 스톱하면 그게 더 안 좋은거죠.
11/07/29 01:24
수정 아이콘
중부지방 하늘에도 해가 보이지 않고, 여기도 지금은 해가 보이지 않네요. 오히려 이런 상황이기에 눈시bb님의 글이 더 가치있게 느껴집니다. 아무쪼록 편안한 밤 되시길 바랍니다.
지나가다...
11/07/29 01:25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후 청은 더 이상 조선에 징병을 요구하지 않았고, 북경을 점령한 후부터는 소현세자 등을 돌려보내고 조선의 세폐도 크게 낮춰주면서 확실히 청을 대신한 대국으로 자리잡습니다."
에서 뒷부분의 '청을'은 문맥상 '명을'의 오타가 아닐까요? 제가 잘못 읽은 것은 아닌가 조심스럽습니다만...
서주현
11/07/29 01:25
수정 아이콘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물여우
11/07/29 01:29
수정 아이콘
이런 상황에서도 눈시BB님의 글을 읽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ㅠ-ㅠ
글 작성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오늘도 추천 추천..
Je ne sais quoi
11/07/29 01:32
수정 아이콘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11/07/29 01:39
수정 아이콘
항상 좋은 글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막연하게 알던 역사를 좀 더 명확히 알게되어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안그래도 한번 여쭤볼까 했는데, 조선 시대 경제사적인 저서를 알고 계신게 있다면 추천해주실 수 있으신지요?
호떡집
11/07/29 01:44
수정 아이콘
현재의 난리통에 옛 난리 이야기를 읽으니 기분이 묘하네요.

늘 좋은글 감사하게 읽고 있다는 것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나는누구
11/07/29 01:49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전쟁으로 죽거나 다친 사람들도 많았겠지만 타국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수십만이나 되었다니 정말 안타깝네요. 그런데 제가
역사에 무지해서 그런데 피로인이 정확히 뭘 의미하나요?
11/07/29 01:57
수정 아이콘
저는 읽고 또 모아놓고 정독합니다
그리고 생각해보고 궁금한점은 여쭈어 보겠습니다
FReeNskY
11/07/29 01:59
수정 아이콘
얼마전에 추게 링크글을 통해서 전부 읽었는데 아직 이 남한 산성은 2편인가 밖에 못 읽었네요..

감사드립니다. 오늘 이렇게 올려주셔서..이렇게 된거 밀린거 전부 읽고 자야겠네요.크
루크레티아
11/07/29 02:00
수정 아이콘
눈시BB님과 같은 분들의 글이 있으니 문제 일으키는 운영자가 있어도 여길 오는겁니다.
늘 잘 읽고 있습니다.
11/07/29 02:11
수정 아이콘
아 왜 하필 BGM이 이거랍니까

클릭하자마자 첫 멜로디에 눈물흘렸잖아요 ㅠ_-

ps 글 너무좋습니다 팬이에요!
무리수마자용
11/07/29 03:33
수정 아이콘
눈시님때문에 피잘을 접지는 못하겠네요 ㅠㅠ 잘 읽었습니다! [m]
11/07/29 05:04
수정 아이콘
눈시BB 님// 사학과 주제에 필력이 달려서 역사 관련 글을 쓰지는 못하고 눈시BB 님글을 읽기만 하는 독자로서,
어느 시간에 올라오건 올라온걸 지나치고 그냥 잔 적은 없었는데 오늘만은 너무도 힘들고 피곤해서 읽을 수가 없었네요. ㅠ-ㅠ
내일 꼭 읽겠습니다. 가슴이 아파오네요.
등긁어줘
11/07/29 05:34
수정 아이콘
PGR 가입 후, 첫 댓글이네요...
역사 관련 글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챙겨보고 있는 팬입니다^^

오늘은 꼭 감사의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_ _)

언제고 사석에서 뵙게 되면 밥 한끼 대접해드리겠습니다.
이 댓글 캡쳐 해두세요^^~
abrasax_:JW
11/07/29 05:39
수정 아이콘
글을 잘 읽고 있는데 코멘트는 처음입니다.
앞으로는 자주 남기도록 노력할게요!
하이브
11/07/29 09:51
수정 아이콘
저도 역사관련글을 너무 좋아해서 눈시BB님 글은 하나도 빼놓지 않고 다 읽었습니다.
이런분들이 있어서 스타판에 대한 열정이 식은 지금까지도 pgr에 들어오고 있고요.
앞으로도 좋은 글 부탁드립니다.
스노우볼
11/07/29 10:14
수정 아이콘
항상 감사하게 보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wish burn
11/07/29 16:39
수정 아이콘
추천요.. 좋은 글 잘보고 있습니다..^^
눈시BB
11/08/01 18:53
수정 아이콘
^^ 감사합니다
11/07/31 01:19
수정 아이콘
제가 항상 궁금했던게 왜 명에게는 하는데 청에게는 안되냐 그게 항상 궁금했었거든요

1명종-선조때부터 급속히 더욱 진행된 당파싸움과 성리학교조화의 영향때문인가요

2일반적으로 알고있는 오랑캐에게는 안되고 한족인 천자에게는 된다 이런 논리인가요?

3그리고 인조반정도 쉽게 이해가 안가는게 왕을 갈정도면 거사중의 거사인데 중립외교를 펼쳤던 청과의 문제가 안될거라 생각한걸까요?

아니면 국제정세파악이 안된건가요 그걸 알면서도 진행한건가요?

여쭤볼게 태산같지만 지금도 질문이 많은거 같아 줄입니다

잘 봤습니다 다음글이 기대되네요
눈시BB
11/08/01 19:04
수정 아이콘
1. 200년이나 이어진 사대. 고려와는 비교해 봐야 될 점이 고려 때에는 송의 힘이 그리 크지 않았고, 요금원이라는 북방민족들이 바톤 터치하며 일어났습니다. 반면 조선 때는 명이라는 슈퍼 파워가 200년간 큰 흔들림 없이 유지됐죠. 성리학도 교조화 돼 가고 있었고, 꽤나 안정된 명의 천하를 그렇게 오래 지켜본 상황에서는 머리가 굳을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즉 고려와 조선을 곧바로 비교하기는 힘들죠.

2. 여진은 고려 때부터 속국 수준으로 취급했습니다. 금이 세워졌을 때는 반대 상황이 됐지만요. 조선 때도 여진이 명에게도 사대하긴 하지만 자기보단 낮다, 이런 수준의 취급을 했죠. 맨날 깔보기만 하던 애들이 저러니 심리적인 반발이 더 컸을 겁니다.

3. 임진왜란 때의 도움. 뭐 그래봐야 사대부들의 명분 놀이가 더 커 보이긴 합니다. -_-; 임란 때의 참상을 아는지 모르는지 잔뜩 미화시키고 도움 하나도 안 되고 방해만 하는 모문룡 역시 미화시켰죠. 괜히 인조가 이들을 "연소배"라고 한 게 아닙니다. 문제는 이런 명분론이 유교 사회에서는 너무나도 중요했고, 언론 기능을 하는 삼사가 계속 주창했다는 거죠.

4. 그래서 최명길과 비변사로 대표되는 주화파들은 최대한 청의 신경을 건드리지 않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역시 안전불감증이라는 생각밖에 안 드네요. 바로 얼마 전에 일본에게 제대로 털렸지만, 200년의 평화에 어쩔 수 없었나 봅니다. 설마 쳐들어올까 이런 거였겠죠. 하지만 그게 이루어진 거구요.

5. 이런 점에서 지배층은 최대한 타협을 하려 했지만 연소배들의 여론을 무시할 수 없어서 갈팡질팡했고, 인조 그 자신도 반정 때문에 정통성에 이리저리 휘둘렸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도저도 안 된 거죠.

6. 어쨌든 명은 밀리긴 했어도 건재했습니다. 명의 직접적인 멸망 원인은 이자성의 난이었죠. 청이 운이 좋아서 그렇지 막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명분을 떠나 이런 현실적인 이유도 있었겠죠.

정리하자면... 정세 파악도 어느 정도 됐고 나름 하려고 했지만 그게 턱 없이 부족했다, 이런 쪽일 거 같습니다. 물론 적인 청에 대해서도, 그 시대의 유학자들에 대해서도요.


저도 이렇게 설명하면서도 명확히 말씀드리기는 힘드네요 ^^;
11/08/01 19:08
수정 아이콘
친절하신 답변 정말 감사드립니다
물여우
11/07/31 17:21
수정 아이콘
오오 눈시bb님글이 ACE 게시판으로 입성했군요. 축하합니다.
그런데 댓글들이 많이 꼬인 듯 합니다. ^^;
눈시BB
11/08/01 19:05
수정 아이콘
^^ 감사합니다 깜짝 놀랐네요

덕분에 댓글들이 ㅠㅠ;
테크닉파워존
11/08/01 03:12
수정 아이콘
눈시BB
11/08/01 19:07
수정 아이콘
전 그냥 좋기에 골랐는데 알고보니 파판이었었죠 ~_~ 정말 좋네요
기차를 타고
11/08/01 23:38
수정 아이콘
투 자나르칸드였나요 (발음이 크크크)
전 파이널판타지 게임은 자세히 모르지만 이 곡은 알 정도로
멜로디가 너무너무 좋은 것 같아요.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1331 지난 5년 택뱅리쌍의 전적(수정본) [37] 칼라일218309 11/07/31 8309
1330 대다수 네티즌을 위한 인터넷 보안 가이드 [47] Kivol8516 11/07/30 8516
1329 MBC GAME과 함께 했던 추억들. [19] XellOsisM4921 11/07/30 4921
1328 남한산성 이후 - 1. 해가 빛이 없다(日色無光) [63] 눈시BB4643 11/07/29 4643
1327 '제가 슈마지오때부터 팬이었는데.....' [34] survivor9174 11/07/25 9174
1326 [넋두리] 나는 시소 타는 직장인 [29] Artemis6889 11/07/19 6889
1325 죄수의 딜레마. [26] Love&Hate11599 11/07/18 11599
1324 다승왕을 정확히 이해하기. [57] 절름발이이리9513 11/07/14 9513
1323 2ch-오유 펌) 이모가 돌아가셨다. [11] 부끄러운줄알아야지9997 11/07/12 9997
1322 스마트폰 요금제 알아보기 [50] Nihil11791 11/07/10 11791
1321 홍진호에 관한 마지막 잡설. [35] becker11471 11/06/24 11471
1320 [Review] 진정한 철벽을 보여주었던 S급 테저전(김민철vs이신형) [10] 이성은이망극7387 11/06/16 7387
1319 안녕, 홍진호. [32] becker11631 11/06/18 11631
1318 4할타자 [23] 코세워다크20184 09/12/19 20184
1317 <통계로 보는 PGR> 10월. (2) 분야별 분석 [59] Ms. Anscombe6162 09/11/18 6162
1316 <통계로 보는 PGR> 10월. (1) 전체적 조망 [29] Ms. Anscombe6980 09/11/15 6980
1315 클래스는 영원하다 (BGM) [38] 귀염둥이 악당15263 09/10/31 15263
1314 스타리그 2000 매치 기념 짤방 원본 [29] Alan_Baxter12735 09/10/29 12735
1313 부산오뎅 갖고 당진으로 [22] 굿바이레이캬10433 09/11/03 10433
1312 라이터가 없다. [13] kapH9058 09/11/03 9058
1311 스타리그 10주년 기념 특별기획 - 90 페이지에 담은 10년의 기록 [120] Alan_Baxter12914 09/10/02 12914
1310 [L.O.T.의 쉬어가기] 대통령께 '보낼' 글 全文 [18] Love.of.Tears.8986 09/09/24 8986
1309 [인증해피] 슬램덩크 캐릭터 신발 정리 1편. 북산고교. [60] 해피14990 09/09/20 1499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