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5/05/18 04:15:27
Name 마스터충달
File #1 천상병.jpg (73.5 KB), Download : 77
Subject [일반] 천상병 「귀천」- 말줄임표에 담긴 의미


귀천(歸天)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은 기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젊은 시절 머리가 덥수룩하여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폐인 꼴을 하고 다녔고, 이를 딱하게 여긴 친구가 이발을 시켜주기로 합니다. 하지만 그냥 돈을 주면 술을 사 먹을까 봐 천상병을 데리고 이발소로 가게 되죠. 그런데 친구가 이발비를 지불하고 나서자 천상병은 지금까지 이발한 비용을 제외하고 환불받기를 요구합니다. 어이없어하는 이발사가 환불을 해주자 천상병은 그 돈으로 술을 사 먹었다고 합니다. 천상병은 무연고자로 오해받아 서울시립정신병원에 수감되기도 했습니다. 당시 그의 지인들이 그가 객사한 것으로 생각하여 그가 남긴 시를 모아 유고시집을 내기도 했었죠.

저의 고등학교 시절 시인이자 국어 선생님이었던 은사께서는 귀천에 대해 수업하며 천상병에 대한 일화를 말씀하셨습니다. 천상병은 주변 지인을 만나면 500원 1000원씩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푼돈을 뺏어다 술을 사드셨다고 합니다. 너무나 자유분방하고 얽매인 것이 없어 보이는 것이 마치 시 「귀천」같은 사람이었다고 말씀하셨죠.

하지만 천상병 자신도, 그의 시 「귀천」도 마냥 낙천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합니다. 천상병은 1966년 독일 동(東)베를린 공작단 사건, 일명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6개월간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습니다. 당시에 모진 고문을 받았는데 특히 전기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고, 이뿐만 아니라 돌아가실 때까지 고문 후유증으로 몹시 고통받으셨다고 합니다. 그런 고통을 겪었던 천상병에게 세상은 정말 소풍처럼 아름답기만 했을까요? 그렇기에 「귀천」의 마지막 구절에 적힌 말줄임표가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그 말줄임표에는 세상이 아름다웠다고 말할 수 없는 천상병의 목메는 심정이 담겨있는 것이죠.

그렇다면 「귀천」은 낙천적인 시가 아니라 염세적인 시일까요? 저는 저 말줄임표가 있음에도 「귀천」도 천상병도 낙천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비록 목메는 아픔을 끌어안고 있더라도 세상은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기에 그저 말줄임표로 대신한 것이죠. 그렇다면 저 말줄임표는 단순한 반어적 표현을 넘어서게 됩니다. 진정으로 인생을 초탈한 시인이 염세 속 낙천을 말하는 「귀천」의 정수에 해당하는 것이죠.





이룬 것 없이 청춘을 보내고, 살아도 죽은 것 같은 백수생활을 보내는 저에게 현실은 별로 아름답지 못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시궁창 속에서도 내가 나로서 빛날 수 있도록 단련할 수 있고, 그 노력을 알아주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이 시궁창 세상도 나쁘지만은 않은 것 같다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또 하루를 보냅니다.

연꽃은 그 자체로도 아름답지만, 진흙 속에 피어있기에 더 아름답습니다.





※ 한글맞춤법 부호 개정이 이뤄져 앞으로 말줄임표는 '...'로 표기해도 된다고 합니다. (https://ppt21.com../?b=8&n=54586) 이건 정말 국립국어원을 칭찬하고 싶은 결정이네요. 이 개정에 맞춰 원 시의 말줄임표를 '...'로 대체했습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15/05/18 05:05
수정 아이콘
어떻게봐도 비극적인 삶을 사신분인데 정작 본인은 아름다웠다고 하니..
삶을 이렇게 볼 수 있는 여유가 대단합니다.
노하라신노스케
15/05/18 06:04
수정 아이콘
이글을 읽고나니 저 말줄임표가 굉장히 무겁게 다가오네요. 좋은글 잘봤습니다.
기아트윈스
15/05/18 06:36
수정 아이콘
니체가 같은 생각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지요.

(정확한 워딩은 아니지만 대략) 다시 이 삶을, 똑같이, 영원히 되풀이해서 살아야된다 하더라도, 나는 "좋소(ya)"라고 하겠소.

그의 인생도 참 고통스러웠는데 말이지요...
왕삼구
15/05/18 06:56
수정 아이콘
천상병시인은 굉장히 똑똑한 사람이었는데 고문 이후로 지적능력이 많이 낮아졌습니다. 옛날에 천상병 시인이 나오는 다큐를 봤었는데 참 어려운 시절에 고통을 겪었죠.
즐겁게삽시다
15/05/18 10:46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15/05/18 11:19
수정 아이콘
고문을 당한 중에도 천상병 시인이 단지 시인일뿐이고 무고한 사람이란걸 아는 교도관 몇 명은 최대한 친절하고 편의를 봐주었다고 하더군요.

희망을 잃지말라고 희망을 주었다고 합니다. 천상병 시인의 아내분은 시인이 귀천하는 그날까지 보살피고 사랑을 주었고요.

마스터충달님에게도 교도관 같은 시인의 아내 같은분들이 주변에 있길 바래봅니다. 있을거에요...
마스터충달
15/05/19 09:17
수정 아이콘
그런 사람들이 주변에 있어서 사는 꼴에 비해 행복하네요 흐흐
아쿠아쿠
15/05/18 12:48
수정 아이콘
마스터충달님 덕에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항상 좋은 글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르고고운말
15/05/18 13:30
수정 아이콘
천상병시인이 고문후에도 시를 쓸 수 있으셨던 동력은 문순옥여사님에게서 나온다고 봅니다.

고문후에 성불구자가 되시고 생사가 오락가락하던 천상병시인과 결혼하셔서 사랑으로 돌보셨죠.

천상병시인의 시적 자아는 어린아이 같습니다. 아무리 세상이 고통스럽더라고 하더라도 이런게 사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는 천진난만함이요.
밀물썰물
15/05/18 13:53
수정 아이콘
천상병 시인에 대해서 하나 배우기도 했고 또 마스터충달님의 속 이야기를 조금 들었습니다.

누구나 조금 더 좋은 때가 있고 조금더 힘든 때가 있는데, 혹시 지금 좀 힘들다고 생각이 드신다면 인생중 조금 더 힘든 때라고 생각하시면 어떨까 합니다.
그런데 그 시기가 다 지나기 전에는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릅니다. 지나서 나중에 보면 지낼 때보다 훨씬 힘들었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 시기에 계시다면 그런 시기를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윗 글과 같은 글을 올리시는 것을 보면 잘 보내시고 계시는 것같네요.

여기에 이런식으로 길게 답을 달 필요가 있을지 모르지만,
좀 좋아보이는 시기는, 본인 보다 옆에서 보기에 더 좋아보입니다. 우리가 운세가 좋다고 말하는 시기로 무슨 일을 열심히 할 때입니다.
그리고 좀 좋아보이지 않는 시기는, 무슨 일을 열심히 한다기보다 위에 올리신 글과 같은 생각을 많이 하는 시기입니다. 일종의 철학자로 태어나고, 인생의 진실에 대해서 궁금해하고 등등의 것이 벌어지는 때입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이 시기에 이런 것을 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인생의 실패(?), 단어가 좋지는 않지만 인생의 실패는 좀 힘들어 보이는 시기에 인간의 내면에 어떤 것을 꽉채우지 못할 때 발생한다고 봅니다.

때가 되면 해볕이 들고 바빠지실 것입니다. 그러면 윗글과 같은 심도 있는 생각을 하실 여유가 없습니다. 좋은 책 많이 보시고 많은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혹시 제글이 맘에 안드시면 쪽지 주세요.
마스터충달
15/05/18 16:48
수정 아이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강제된 오늘의 잉여로움을 소중하게 생각해야겠습니다 ^^;;
쿠크다스멘탈
15/05/18 15:26
수정 아이콘
귀천을 중학교 문제집에서 처음 접했을 땐 단순히 천상병시인의 순진무구함과 아름다운 표현으로 기억했었는데 천상병시인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 알게 된 후 부터는 저도 말줄임표에 차마 담을 수 없는 그리고 저로선 가늠할 수 없는 세상의 고통과 잔혹함이 여운으로 느껴지더라구요... 아직도 인생의 반도 안살아본 저한텐 온전하게 와닿지 않는 시인 것 같습니다. 그치만 가장 좋아하는 시중 하나!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58283 [일반] 5.18과 임을 위한 행진곡 [34] 피터티엘6188 15/05/18 6188 24
58282 [일반] 아시아에서 매출이 가장 높은 기업 Top10 [7] 김치찌개5346 15/05/18 5346 0
58281 [일반] 저 먼저 들어갈게요~ [42] probe8245 15/05/18 8245 5
58280 [일반] 안쓰는 사이트 한번에 정리하는 법.jpg [16] 김치찌개7690 15/05/18 7690 5
58279 [일반] 미국야구에서 마무리 상위 10인의 평균연봉 [100] swordfish-72만세7209 15/05/18 7209 0
58278 [일반] 마리한화의 현재 인기와 여러 지표들 [49] Leeka8990 15/05/18 8990 3
58277 [일반] 신치용 감독 단장 승격, 후임 감독 임도헌 수석코치. [34] Rorschach5814 15/05/18 5814 0
58276 [일반] 단편. 미래에서 온 여자친구 1/2 [8] aura4830 15/05/18 4830 2
58275 [일반] 엄마의 기억들 [12] 삭제됨4276 15/05/18 4276 37
58274 [일반] 응답하라 1988 라인업이 떳네요 [90] 소라의날개13175 15/05/18 13175 0
58273 [일반] 미래의 어른들을 향한 노래 - 만화 꾸러기 로보컴 주제가 [3] 좋아요5460 15/05/18 5460 0
58272 [일반] 김제동의 톡투유 괜찮지 않나요? [30] Kngl7584 15/05/18 7584 0
58271 [일반] 매드맥스는 4DX가 진리? [88] 김연아11601 15/05/18 11601 0
58270 [일반] [해축] 14-15 프리메라리가 바르셀로나 우승. 15-16 챔피언스리그 1시드 확정 [26] SKY927480 15/05/18 7480 2
58269 [일반] 천상병 「귀천」- 말줄임표에 담긴 의미 [12] 마스터충달5615 15/05/18 5615 16
58267 [일반] 전 세계에서 인스턴트 라면을 가장 많이 먹는 국가 Top10 [29] 김치찌개8436 15/05/18 8436 0
58266 [일반] [마리텔] 생방을 보면서 불편했던 점. [60] Ahri16241 15/05/17 16241 3
58265 [일반] [리버풀] 캡틴의 마지막 홈경기를 망쳐버린 팀 [45] 아우구스투스7831 15/05/17 7831 6
58264 [일반] [야구] 2015 KBO 리그 끝내기 정리.txt [65] SKY928846 15/05/17 8846 3
58263 [일반] 할거 없으면 농사나 짓던가 [13] 시드마이어7882 15/05/17 7882 33
58262 [일반] [스압] 환율도 떨어졌는데 일본 여행을 가볼까? - (完).<오사카 벚꽃축제> [16] 페르디난트 3세7482 15/05/17 7482 7
58261 [일반] 시사저널·리얼미터의 호남지역 여론조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70] Freyja8728 15/05/17 8728 3
58259 [일반] 헤어지는 날 오늘 헤어진날 오늘 [15] 사신군5554 15/05/17 5554 3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