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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4/12/17 02:00:50
Name 가브리엘대천사
Subject [일반] [연재] 빼앗긴 자들 - 24


요 며칠 간 이상한 기분이 들어 요양을 예정보다 조금 일찍 마치고 돌아온 일레키우스 황제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아연실색을 금하지 못했다. 무슨 일이 없기를 간절히 바랐는데, 정녕 신은 나를 조롱하는 것인가? 그토록 힘겹게 얻은 아들이건만, 육체의 축복을 받지 못했고, 그것에 낙심하던 차 지성의 은총을 얻은 것에라도 감사하며 지내왔는데 인제 와서 그의 미래를, 우리 모두의 미래를 부숴버리다니?

“오오, 신이여…….”

“폐하, 폐하!”

황제는 그대로 혼절해 버렸다. 수호 기사들이 재빨리 부축하였기에 추한 모습으로 바닥에 나뒹구는 것은 면할 수 있었지만, 바람에 나부끼는 천 조각 같은 모습으로 황제의 침실로 업혀가는 것만큼은 어찌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될 것을 예상하고 있던 의료단은 때를 맞춰 수호 기사들과 함께 황제의 처소로 향했다. 한동안 소란이 일었다. 여러 사람이 왔다 갔다 하며 한참 동안 바쁘게 뛰어다녔다.

“폐하께서 쓰러지셨답니다.”

황제에 대한 소식은 발 빠르게 마누엘의 침실로도 전해졌다. 마누엘의 곁에서 극진히 그를 간호하던 요안네스는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안나는 그런 그를 위로했으나 아그네스는 정신을 놓은 듯 그저 멍하니 있을 뿐이었다. 무리도 아니었다. 자신보다 더 마누엘을 사랑하던 그녀였으니까. 그것을 잃은 남성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은 능히 알고 있었다. 거세형을 받은 죄수들이나 환관을 볼 때면, 그것을 잃은 대신 목숨은 건지지 않았느냐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 적도 있던 그녀였으나, 그 사람이 내 사랑하는 남동생일 경우에는 완전히 얘기가 달라졌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이렇게 넋이 나간 것은 동생이 후사를 보지 못한다는 것 보다는, 그가 일이 있는 뒤부터 며칠 동안이나 눈을 뜨지 못했다는 것 때문이었다.

“아그네스, 아버지께 같이 다녀오지 않으련?”

계속 여기에 있어봤자 당장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기도하며 마누엘이 눈을 뜨기를 바라는 것뿐. 아그네스는 고개를 저었다. 안나도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다만 주의를 좀 다른 곳으로 돌려 볼 심산이었다. 정말로 아버지께 가 봐야 하기도 했고.

“마누엘이 정신을 차렸는데…… 제가 없으면 슬퍼할 거에요.”

동생의 파리한 안색을 쓸어내리는 아그네스의 팔이 깊은 슬픔에 잠긴 듯 바들바들 떨려왔다. 이내 그것은 성난 맹수처럼 날아오르며 요안네스의 목덜미를 움켜잡았다.

“오라버니는 왜 아무것도 하지 못했었죠? 마누엘이 그렇게 큰 사고를 당하는데…… 오라버니는 왜 대체 보고만 있었던 거에요!”

“아그네스!”

놀란 안나가 소리치며 그녀를 요안네스에게서 떼어 놓으려 했다. 요안네스는 가볍게 안나에게 손짓하며 놔두라 했다. 이걸로 아그네스의 분이 풀릴 리는 없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누군가를 탓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는 정말 눈앞의 아무에게라도 분풀이해야만 그 화가 누그러질 터이니.

“미안하구나. 더 조심해서 돌봤어야 하는데…….”

“제대로 서지도 못하는 걸 뻔히 알면서 왜…… 왜……!”

목덜미를 잡은 손에서 힘이 풀려나갔다. 고개를 떨구고, 요안네스의 가슴에 얼굴을 묻으며 아그네스가 소리높여 울었다. 너무나도 처량하고 안쓰러웠기에 옆에서 시중들던 내의들과 시종들도 모두 고개를 돌리며 눈물을 흘려보냈다.

말없이 눈물을 닦아내던 안나는 문득, 보았다. 죽은 것처럼 움직이지 않던 마누엘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잘못 봤나 싶어 다시 한 번 바라보자 이번에는 손가락이 조금 더 몸쪽으로 당겨졌다. 나지막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아그네스를 조심스럽게 끌어당기며 안나는 마누엘을 가리켰다.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순간, 손은 더는 떨리지 않았다. 눈이 떨리고 있었다. 파르르 움직이던 그것은 이내 한 꺼풀 벗겨지듯이 들어 올려지며 세상을 바라보았다. 투명한 창 너머로 말갛게 빛나는 푸른 호수가 보였다.

“마누엘! 마누엘, 정신이 드니? 응? 누나 알아보겠어?!”

요안네스를 팽개치다시피 밀쳐내며 아그네스는 마누엘의 손을 움켜잡았다. 연신 그의 손에 자신의 볼을 비벼대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녀를 향해 마누엘의 눈동자가 또륵, 굴러갔다. 이내 다른 쪽으로 굴렀다. 안나를, 그리고 요안네스를 바라보다가 그에게 고정되었다. 요안네스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기억을 일시적으로 잃게 하는 약을 썼으나 그것이 어디까지 잃게 할지는 몰랐다. 남성이 연달아 파괴되는 극렬한 고통이었다. 만일 기억을 잃었다고 해도, 그 고통을 기억하고 있다면 나는 어찌 되는 거지?

마누엘은 말이 없었다. 자신에게 머물던 천 년 같던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내리며 그의 눈은 다시 아그네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웃었다. 천진난만한 미소로 헤- 하고 웃었다. 아그네스도 따라 웃었다. 주르륵 입가를 통해 흘러내리는 그의 침을 닦아주면서도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이제 고비는 넘긴 건가요?”

안나는 의료단장인 궁중 내의에게 물었다. 내의가 뭐라고 마악 말을 하려는 순간, 옆에 있던 칼리스토가 먼저 내뱉었다.

“이제 시작입니다.”

궁중 내의와 안나의 눈이 그에게 향했다가 다시 마누엘에게 옮겨갔다. 그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언제나 바라봐도 마음이 차분해지는 귀여운 미소였다. 고비가 시작이라는 그의 말은 언뜻 이해하기 어려웠다.

“마누엘, 누나 알아보겠니? 응? 말 좀 해 봐.”

아그네스는 동생이 웃고만 있자 조금 불안했는지 그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그녀를 향해 다시 헤- 하고 웃는 마누엘은 뭔가를 말하려는 듯싶었으나 부르르 입술을 떨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웃을 뿐이었다. 마치 백치처럼. 여전히 침을 흘리며. 이상했다. 어렸을 때면 몰라도,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지성을 갖추며 흘리지 않던 침이었다. 심한 주걱턱 때문에 자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침이 흘러내려 시종이 옆에서 주기적으로 침을 닦아주기는 했으나 깨어 있는 동안은 이런 적이 없었다.

안나는 저도 모르게 떠오른 생각에 경악하고는 두 손을 들어 올리며 입을 가렸다. 비명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고개를 돌려 칼리스토를 바라보았다. 크게 뜨인 그녀의 눈에 칼리스토가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는 것이 보였다. 그토록 듣고 싶어 하지 않던 말이 흘러나왔다.

“조금 더 지켜봐야 알겠지만…… 전하께서는 많은 것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어쩌면 빼앗긴 것일 수도 있겠군요.”

빼앗겼다는 말이 유난히 안나의 귓가에 울렸다. 요안네스는 고개를 쓱 돌리며 칼리스토를 바라보았다. 그의 미간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칼리스토는 입을 다물고는 안나를 한번 바라본 뒤 가만히 눈을 내리깔았다.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간 요안네스의 시선은 놀라움에 가득 찬 안나와 마주쳤다. 살짝 찡그렸던 표정을 급히 풀며 요안네스는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빼앗겼다고……? 무엇을? 누구에게?’

안나의 눈에 의혹이 피어 올렸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왜 저 둘의 시선 나눔이 이렇게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는 거지? 겉으로 드러난 것 외에 무엇인가가 더 있는 건가? 모두가 이쪽에 관심을 가지면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물어보련만, 다른 이들은 듣지 못한 듯했다. 어쩌면 들을 수 없었을는지도 모른다.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어떤 의사 표현도 하지 못한 채 그저 멍한 눈동자로 웃고만 있는 동생을 향해, 하염없이 쏟아내는 아그네스의 울음소리가 너무나 컸기 때문이다.



황제의 얼굴에 그늘이 졌다. 잔잔하게 웃던 미소도 사라졌다. 대신 눈물이 함께 했다. 흐르고 흘러서 더는 나오지 않을 거라 믿었건만 눈을 감을 때마다 숨을 내쉴 때마다 그리고 이렇게 눈앞에 앉아서 해맑고 웃고 있는, 침을 질질 흘리는 마누엘을 볼 때마다 눈물은 끝없이 흘러내렸다.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어디부터 뒤바뀐 것이었을까. 과도한 기대가 모든 것을 뒤틀어 놓은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그저 운명의 장난인 것인지? 원망하고 또 원망해 봐도 그들의 신은 아무 말이 없었다. 누구도 황제에게 미소를 돌려주지 못했다.

마누엘을 지키지 못해 죄송하다고 읍소하며 자신에게 중벌을 내려줄 것을 간청하는 요안네스는 또 무슨 잘못이 있단 말인가. 형제간에 함께 목욕했을 뿐인데. 그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저 그 자리에 함께 있었을 뿐인데……. 차라리 요안네스가 대신 사고를 당했더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안 했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후사를 볼 수 없는 마누엘 대신 모든 방면에서 뛰어남을 증명한 요안네스를 다음 후계자로 다시 지목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말들도 이미 나돌고 있었다. 그게 싫어서 마누엘의 탄생을 기다렸거늘. 그가 훌륭하게 자라나는 것을 보며 장래는 밝다고, 죽기 전까지 온 힘을 다해 그를 지원해 줄 것을 생각했건만, 그 기대와 소망은 모래성처럼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기억이라도…… 돌아오게 할 방법은 없는 것인가?”

황제의 물음에 내의들은 모두 고개를 조아렸다. 기억을 왜 잃어버렸는지도 정확히 모르는데 그것을 돌아오게 하는 걸 알 리 만무했다. 일레키우스는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옛 수석 내의의 제자인 칼리스토를 응시했으나 그는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일말의 기대도 사라져버렸다. 그에게 신묘한 의술을 물려받았을 것이 분명한 제자도 모른다 하니, 이 세상에 마누엘의 기억을 되찾을 방법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낙심한 황제는 마누엘을 한 번 더 끌어안은 뒤, 조용히 밖으로 향했다. 바깥 날씨가 요사스러울 정도로 추우니 안에 계시라는 시종장의 권유도 뿌리치고 그는 황궁의 남쪽으로 향했다.

저 멀리 자줏빛 방을 품은 채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탑이 보였다. 문득 서글퍼졌다. 언젠가 다시 저 방이 이용된다면 새로운 자줏빛 출생의 황제가 태어날 것이겠지만, 한번 단절된 자줏빛의 가호는 그 권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천 년 가까이 끊이지 않고 이어져 내려오던 콤네노스 황가의 정통성 있는 자줏빛 황제는 더 이상 등장하지 못할 것이다. 물론 그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죽기 전에 한 번 더 아들을 낳을 수만 있다면 그 아이를 통해 자줏빛의 가호는 계승되리라는 것을.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타나시우스의 교리상 재혼하는 것은 네 번이 한계인 까닭이다. 사혼은 짐승이나 하는 짓이라고 길길이 날뛰던 총대주교를 어르고 달래고 협박까지 해대서 간신히 얻은 자줏빛 출생의 아들이었는데……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황후, 내 그대를 볼 낯이 없구려.’

천 년 역사의 계승을 위해 후계자를 목숨까지 희생해 가며 생산해 주었건만, 그것을 지키지 못한 것은 자신이었다. 하늘에서 만날 이레네 황후에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어쩌면, 그녀도 이 참담한 현실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폐하, 날씨가 너무 차옵니다. 이만 안으로 드심이…….”

황제의 망토가 바람에 미친 듯이 휘날리는 것을 보자 안 그래도 추워 죽겠는데 시각적 효과까지 곁들여지니 더욱 추워진 시종장이 한 번 더 괴롭게 간했다. 황제는 들리지 않는다는 듯 손을 들어 올려 딴소리를 해댔다.

“저 계단이 보이는가.”

“네? 아, 네, 보입니다, 폐하.”

“마누엘이 하드리안의 도움으로 처음으로 직립한 뒤, 바로 저 계단을 걸어 내려갔었지. 바다가 보고 싶다면서 말일세.”

황제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오르자 바다고 뭐고 간에 일단 안으로 드심이 라는 말은 그대로 목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임기 삼십 년 차에 접어든 시종장은 비록 얼굴이 얼어붙기는 했지만 더할 나위 없이 황제의 마음에 동조하고 안타깝기 그지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황제는 말없이 계단으로 향했다. 길게 이어진 계단은 바닷가를 에워싼 높다란 성벽까지 늘어져 있었다. 눈이 한 차례 와서 그런지, 아니면 바람이 불어서 자질구레한 먼지들까지 모조리 날려버려서인지 왠지 계단이 유난히 반들반들해 보였다. 마누엘이 처음으로 걸어 내려간 계단이기에 특별히 관리하라고 일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 계단을 걸으며, 다시 한 번 더 그 날의 기쁨을 느껴보고자 했다.

그러나 그것은, 더는 허락되지 않는 것이었다.

“폐하!”

순간적으로 미끈, 하더니 세상이 뒤집어졌다. 뭔가가 뒤통수를 강하게 후려치고는 이내 땅이 잡아당기듯 몸이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돌았다. 세차게 돌았다. 멈출 수 없는 소용돌이 속에서 마침내 당도한 곳은 차갑게 식어 있는 성벽이었다. 황제는 울컥 피를 토해냈다. 저 멀리 시종장이 시종들과 미친 듯이 달려 내려오는 것이 희미하게 보이는 듯싶었다. 착각인지 마누엘의 모습도 보이는 것 같았다. 꿈결 같은 몽롱한 소리가 들리기에 바라본 하늘에서는 황후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얼굴 가득 눈물을 품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웃으려 했다. 울지 말라고, 웃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세상이 점점 붉어졌다. 눈을 뜨고 있기가 힘들었다. 간신히 팔을 뻗어 잡은 그녀의 손길을 느낄 새도 없이, 황제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국장이 선포되었다. 황태자가 황망한 사고를 당해 정신을 놓은 가운데 황제마저 계단에서 굴러떨어진 충격으로 돌연 붕어하자 황실은 혼란에 빠졌으나 뛰어난 지도력을 갖춘 요안네스의 지휘 아래 빠르게 사태를 수습하고 장례식을 치렀다. 보름에 걸쳐서 진행된 장례식이 끝나고 황제의 유해를 카타콤에 안치할 때까지 안나와 아그네스의 눈에서는 눈물이 마르지 않았다. 전날 너무 많이 울어서 오늘은 울지 않을 거라 생각을 했건만, 몸속에 있는 수분이란 수분은 모조리 눈물이 되어 흘러내리는 것만 같았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음에도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멍하니 있거나 헤- 하고 웃는 표정을 짓는 마누엘을 격한 감정으로 끌어안으며 아그네스는 특히나 더 서럽게 울어댔다. 그렇게 열심이었던 동생인데. 아버지를 대신해 이 거대한 제국을 다스리려고 그토록 노력했는데, 그런 아버지를 제대로 떠나보내지도 못하고 이제는 정말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죽음만을 기다릴 신세가 되어 버린 동생이 안타깝고 마음이 아파 눈물이 흘렀다.

“아그네스, 기운을 내거라. 네가 이렇게 슬퍼하면 폐하께서 천국에 이르는 머나먼 여정을 어찌 시작하시겠느냐.”

요안네스가 눈가에 눈물을 가득 머금은 채 말하자 아그네스는 고개를 돌려 바라보더니 뺨을 타고 눈물이 흐르는 순간 그의 품에 안겼다. 요안네스는 팔을 뻗어 안나도 끌어안아 주었다. 말없이 눈물을 삼키며 두 동생을 위로한 요안네스는 고개를 들어 마누엘을 바라보았다. 놀랍게도 그의 눈동자에는 눈물이 맺혀있었다. 찰랑거리는 호수와 같던 그것은 이내 주르륵 흘러내렸다.

“마누엘…… 정신이 드는 게냐?”

요안네스의 말에 안나와 아그네스는 마누엘을 바라보았다. 그동안 참아 온 슬픔을 모두 쏟아버리려는 냥 눈물을 흘리는 그의 모습에 간신히 추슬렀던 마음이 무너져내렸다. 결국, 그들은 다시 한 번 더 서로를 끌어안은 채 황제가 세상에서 떠나는 마지막을 눈물로 배웅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날 밤, 요안네스는 마누엘의 처소를 찾았다. 잠자고 있는 마누엘을 안쓰럽다는 듯이 바라보던 아그네스는 그의 등장에 살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무리하는 것이 아니냐.”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 곁에 계속 있어주면 기억이 돌아올 것 같아서요. 오늘도…… 그랬었잖아요.”

아그네스의 눈가에 다시 눈물이 차오르는 듯했다. 요안네스는 가만히 그녀를 끌어안아 주었다.

“그래, 이제는 내가 곁에 있어주마. 그러니 너는 가서 좀 쉬어라. 병자를 간호할 때에는 주변 사람들이 더 힘을 내야 한다고 누가 그러더구나. 너까지 쓰러져버리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

“하지만 마누엘이 깨어났을 때 아무도 없으면…….”

“괜찮다. 내가 있겠다고 하지 않느냐. 이번에는 아무 일 없도록 잘 지키고 있을 테니 가서 눈 좀 붙여라. 혹시 무슨 일이 있으면 얼른 알려주도록 하마.”

안 그래도 아그네스 역시 몹시 피곤한 상황이었다. 잠을 푹 자본 게 언젠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였다. 그랬기에 조금 더 버티던 그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마누엘의 이마에 살며시 입을 맞추고 요아네스에게 예를 올린 뒤 방에서 나갔다. 옆에서 대기하던 시종에게 목이 타니 차를 준비해 달라 말한 요안네스는 시종마저 방에서 나가자, 가만히 품에서 두 개의 병을 꺼내 들었다.

‘확실히 해야겠지…….’

이미 마누엘은 무슨 이유에서건 간에 거의 백치가 되어 있었다. 조금 전의 기억만 잃게 하는 약이 효과가 너무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상상을 초월하는 격통 속에서 약이 부작용을 일으킨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오늘 마누엘은 황제의 장례식 중에, 자신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 어쩌면, 기억이 사라지지 않은 것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안나와 아그네스는 눈치채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요안네스는 볼 수 있었다. 그 눈물은 분명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담고 있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깊은 분노도 담겨 있었다. 눈물을 쏟아내면서도 자신에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떠올라 요안네스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만히 병의 마개를 연 그는 마누엘의 입가에 흘러내린 침을 닦아냈다. 조심스럽게 녹색병의 약을 한 방울 흘려 넣고는 다시 기억을 잃게 하는 붉은색 병의 약을 흘려 넣었다. 칼리스토의 말이 맞다면 이렇게 동시에 두 개의 약이 투입될 경우 완전히 백치가 되어 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목욕탕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영원히 기억할 수 없을 것이고, 자신은 더 이상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가슴 졸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애초에 이럴 계획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이것이 최선이었다.

요안네스는 약병을 다시 품 안에 집어넣었다. 때마침 시종이 방으로 들어왔다. 요안네스는 그가 건네주는 차를 한 모금 마신 뒤, 가만히 마누엘의 손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언제 불순한 마음을 먹었느냐는 듯 마누엘을 위해 밤새 기도를 올리며 극진히 간호하기 시작했다.



“권좌를 오래 비워둘 수는 없습니다. 전하께서 용단을 내리셔야 합니다.”

머리가 허연 안드로니코스 백작이 이제 때가 되었다는 듯이 말했다. 요안네스는 고개를 들어 올려 그를 응시했다. 백작은 자신의 측근으로 오랫동안 충성을 바쳐온 자였다. 또한, 그는 대영주 회의의 수장이자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직위 중 하나인 국새상서를 맡고 있었다. 황제의 명령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뿐만 아니라 권좌가 비어 있고 그 자리를 차지할 마땅한 후계자가 없을 때에는 섭정의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였기에 그의 말 한마디에는 다른 이들보다 더 큰 무게가 실리는 법이었다.

그런 그가 요안네스에게 대놓고 제위에 오르라 말하고 있었다. 물론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그 역시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결코 생각 없이 그냥 내뱉은 말이 아님은 분명했다.

“나는 정통 후계자가 아닐세.”

“보름 전까지는 그랬겠지요. 하지만 이제는 아닙니다. 마누엘 전하께서는 정사를 돌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제 더는 남자라고 하기도 힘듭니다.”

“내 동생이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삼가줬으면 하는군.”

“그러지요. 하지만 제가 어떻게 말하든 사실은 변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간에 두 가지 중 선택을 하셔야 할 것입니다. 마누엘 전하를 옹립하고 전하께서 섭정을 하시다가 마누엘 전하께서 승하하신 뒤 제위에 오르시던가, 아니면 지금 공동황제에 오르셔서 직접 황제로서 통치하시던가. 결국, 전하께선 제위에 오르시게 될 겁니다.”

백작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군주로서 가장 중요한 일은 후사를 보는 일이었다.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정통성을 가진 후계자의 존재는 그 자체만으로도 황권 강화에 큰 힘이 되었다. 반면 아무리 그 스스로가 유능하다고 한들 대를 이을 아들이 없다면 황권은 흔들리고 나라는 분열될 가능성이 높았다. 콤네노스 황가가 천년의 세월 가까이 제국을 다스리는 가운데 후사를 보지 못한 황제들도 여럿 있었다. 그때마다 자줏빛 출생의 명예로운 칭호를 가진 황제의 형제들이 서로 제위에 대한 계승권을 주장했고 피를 부르는 내전을 거듭한 끝에 누군가가 새롭게 황제로 등극했다. 그러나 약한 정통성에 대한 끊임없는 잡음과 제위 찬탈에 관한 불만은 또 다른 내전을 불러일으켰다. 새로 권좌에 오른 자도, 추방당하거나 처형당한 자도 모두 내전의 희생양이 되어 버렸다. 계승권을 가진 자들이 다 죽어 나자빠질 때 즈음에야 내전은 마침내 마무리되곤 했는데 그때면 황권은 이미 나락으로 떨어진 뒤였다.

가문이 사라지고 나라가 전복될 그런 위기를 몇 차례 겪은 후부터 황제들은 황후 외에 후처나 첩을 두어 그들 소생의 아이들도 모두 제위를 계승할 수 있게 하려 했으나 아타나시우스의 교리상 불가능했기에 총대주교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칼날과 파문이 오고 가는 와중에 황제와 총대주교는 절반씩 양보해 두 번까지 가능했던 결혼을 네 번으로 늘리게 되었다.

마누엘은 그렇게 해서 가능하게 된 네 번째 결혼을 통해 일레키우스 황제가 어렵게 얻은 자줏빛 출생의 정통 후계자였다. 사실 요안네스가 자줏빛의 가호를 받지 못하며 태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많이 안타깝기는 했지만, 아들이 또 태어나지 말란 법도 없었고, 또 비록 다들 태어나며 죽거나 병에 걸려 일찍 죽긴 했지만 요안네스 이전에 이미 넷의 아들을 두었던 황제였기에 그렇게 크게 걱정을 하지는 않았었다. 그 대가로 말년까지 걱정해야 하는 운명이 되어 버렸지만.

“전하께서도 이제 혼인을 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정통성에 대한 문제는 그것으로 모두 해결이 될 것입니다. 게다가 전하와 같은 정력을 가진 분이라면 황실이 번영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겁니다. 제가 보기에 전하께서 제위에 오르시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도 없는데, 전하께서도 그리 생각지 않으시옵니까?”

“나는…… 오래전에 제위에 대한 마음을 버렸었다네.”

“그렇다면 이제 다시 주워담으시면 되는 일입니다.”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지 않나.”

거듭되는 요안네스의 거부 의사에 백작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손을 들어 올려 가만히 맞잡아 비비던 그는 미묘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전하, 항간에 이상한 소문이 떠도는 것을 알고 계시온지요.”

“소문이라니?”

“마누엘 전하께서 목욕탕에서 사고를 당하신 게 아니라…….”

요안네스의 눈썹이 살짝 일그러졌다. 원래대로라면 이쯤에서 그 대화는 마무리를 져야 했지만, 백작은 요안네스의 진짜 속내를 수면 위로 끄집어내기 위해 이 대화를 시작한 것이었다. 따라서 그를 도발할 것이 분명한 말을 꺼내 놓았다.

“전하께서 마누엘 전하를 그리 만든 것이 아닌가, 하는 소문입니다.”

“……어느 놈들이, 그딴 가당치도 않은 소문을 내고 다닌단 말인가……!”

요안네스는 언성을 높이지는 않았으나 분기를 참는 듯 음성이 떨려왔다. 백작은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가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제게는 숨기실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사실을 말씀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사고였든, 전하의 의중이었든, 결과적으로 보면 이는 전하께서 제위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게 된 것이니까요. 하오니, 전하나 저나 이미 답을 알고 있는데, 굳이 이렇게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지 않겠습니까? 그만 마음을 주워담으시고, 이제 안나 공주님과 혼인할 준비를 하시는 편이 낫다고 생각됩니다.”

요안네스는 무슨 대본이라도 써온 것처럼 막힘없이 말하는 백작을 착 가라앉은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어떤 속내를 가지고 저렇게 말하는지는 익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안드로니코스 백작은 오랫동안 자신의 측근임과 동시에 황제를 보좌하여 제국을 경영하는 대영주 회의의 수장이었다. 단지 요안네스와 사적으로 가까워서 그를 제위로 밀어 올리려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제국의 주인이 될 자이기에 그를 황제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그래야 제국이 혼란스러운 시기를 이겨내고 다시금 세상을 호령할 것이 분명했기에.

그 앞에서 자신의 속마음을 숨길 필요는 없었다.

“……혼인 준비는, 내가 안나와 이야기를 나눈 뒤에 준비해도 늦지는 않을 걸세. 내게 말미를 주게.”

“알겠습니다. 그럼 준비하면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백작을 물린 뒤 요안네스는 가만히 등받이에 기대 천장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려 창밖을 응시했다. 어둠이 내리는 하늘을 배경으로 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소복이 쌓인 눈이 세상의 모든 더러운 것들을 덮어주고 있었다. 자신의 죄도 저렇게 지워질 수 있을까. 말하지 않은 이상 아무도 모르겠지만, 자신이 동생에게 저지른 죄는 그를 대신해 황제가 되어 오랫동안 전력을 다해 다시금 제국이 번영케 한다면 씻어지는 것일까. 그를 대신해 수많은 아이를 낳아 가문이 사라지지 않게 한다면 덮어지는 것일까.

무엇이든 간에, 이미 벌어진 일이었다. 마누엘은 백치가 되었다. 물론 그게 정말 약의 효과인지 아니면 그것이 터지는 충격으로 맛이 가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예전으로 돌아올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아버지 역시 허망하게 가 버리셨다.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서 그렇게 가실 줄 누가 알았으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고민한다고 해서 과거가 바뀌지는 않았다. 그가 할 일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었다.

‘오늘은 늦었으니 내일 가봐야겠군.’

안나에게 혼인에 대해 어떤 식으로 얘기를 꺼낼지 궁리하던 요안네스는 해가 떠오를 무렵에야 간신히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오랜만에 목욕을 하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대충 수건을 걸친 채 밖으로 나오던 칼리스토는 우뚝 멈춰 섰다. 아무도 없어야 할 자신의 처소에 웬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인기척이 들리자 조용히 뒤돌아섰다가 칼리스토가 반 나신이라는 것을 알고는 그대로 다시 돌아섰다. 민망해진 칼리스토는 재빨리 옆에 내던져 두었던 겉옷을 꿰입었고 부산을 떨던 소리가 사라지고 헛기침 소리가 들리자 여인은 다시 뒤로 돌았다.

“안나 공주님께서 여긴 어인 일이시옵니까.”

칼리스토는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예를 올렸다. 기별도 없이 밤에 불쑥 찾아왔다가 므흣한 장면을 보게 되었던 안나 역시 조금 전의 것은 이미 기억에서 지웠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예가 아닌 줄 아나, 물어볼 것이 있어서 급히 왔습니다.”

“좌정하시지요. 차를 내오겠습니다.”

잠시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향이 그윽한 차가 대접 될 때까지 안나 공주는 말이 없었다. 다만 끊임없이 흔들리는 눈동자를 통해 칼리스토는 뭔지는 몰라도 대단히 중대하거나 혹은 믿기 힘든 어떤 것을 논하러 온 것이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에게 온 것으로 보아 어떤 약물을 찾는 것이리라 잠정 결론을 내린 뒤, 차를 내놓으며 입으로는 다른 것을 물었다.

“찾으시는 약이라도 있으신지요.”

“감사히…… 뭐라고요?”

의례적인 감사를 표하려던 안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칼리스토는 두 발자국 정도 뒤로 물러서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기 편하게 해 주었다.

“내가 약을 찾을 거라고 왜 생각을 한 거죠?”

“아니면 의원인 제게 오실 리가 없으니까요. 특히나 이런 야심한 시각에.”

혹시 이 남자는 천재인가 싶었던 안나는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들어 올렸다. 가만히 향을 맡으며 맛을 음미했다. 놀랍게도 자신이 즐겨 마시는 차였는데 시녀들이 타 주는 것 보다 그 맛이 훨씬 좋았다. 칼리스토를 자신의 시종으로 쓰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순간적으로 떠올랐다가 사라져 갔다.

“입에 맞으실까 모르겠습니다.”

“……흡족하군요. 고맙습니다.”

마음속에 있는 것을 쉽게 터놓기 어려웠던지 그녀는 한동안 말없이 차를 마시며 앞에 놓인 다과를 들었다. 이것 또한 놀라울 정도로 맛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자신의 입맛에 꼭 맞았다. 이 남자는 어쩌면 요리사 출신일지도 모른다 하는 생각이 들 무렵 칼리스토가 입을 열었다.

“하면, 이제 어인 일이신지 말씀해 주실는지요.”

“……먼저, 내가 이곳에 오늘 온 것에 대해서는 비밀로 해야 합니다.”

“알겠습니다.”

“내가 하는 말, 우리가 나눈 대화 역시 비밀로 해야 합니다. 그래 줄 수 있겠지요?”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좋아요. 그럼 말하죠. 혹시…… 당신이 가진 약 중에, 진실을 말하는 게 하는 약 같은 게 있을까요?”

안나의 물음에 칼리스토는 가만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포로나 첩자를 잡았을 때 아주 유용하겠군요. 자백을 받아내는 것이 무척이나 쉬울 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역사에 그런 약이 등장한 적은 없었을 겁니다.”

“……역시 그렇군요. 그럴 거라 예상했어요.”

진실을 말하게 하는 약이라니. 그런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것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본 자신이 우스워서 안나는 지체할 것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만히 고개를 숙인 뒤 후드로 머리를 덮으며 뒤돌아 나가려는 그녀의 뒤로, 칼리스토는 아직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다는 듯 말했다.

“저한테도 없다고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만.”

“……?”

“어디에 쓰실 건지 감히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안나는 고개만 돌려 칼리스토를 바라보았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지금 이 자는 역사에 등장조차 하지 않은 약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그런 전설 같은 약이 정말로 있다는 말에 살짝 마음이 들떴지만 이내 의문으로 가득 찼다. 그랬기에 안나는 섣불리 입을 열지 못했다. 말해도 될까. 마누엘의 전속 내의이기도 하니 믿을 만하지 않을까, 생각도 들었으나 동시에 감히 자신과 말장난을 하려던 그의 행동에 안나는 살짝 언성을 높였다.

“지금 공주인 나에게 이야기를 들어보고 내어줄 만하면 내어주겠다고 말을 하는 건가요? 내가 그대에게 그렇게 우스운 존재입니까?”

“그런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공주님.”

“……나는 동생처럼 그대를 전적으로 신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그대가 마누엘을 정성을 다해 진료하는 것에는 감사하고 있으니 조금 전의 일은 잊어드리지요. 그대도 내 질문은 잊어주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사죄의 의미로 이것을 드리겠습니다.”

칼리스토는 찬장을 뒤적거려 여러 가지 병들 사이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투명하고 작은 유리병이었다. 안나의 손에 조심스럽게 들려준 칼리스토는 말했다.

“‘티오펜타 베리타스’라는 약입니다. 색은 보시는 것처럼 없지만 약간 쓴맛이 납니다. 진실은 쓴 법이니까요. 사용하시려면 그에 합당한 것에 섞어서 쓰시는 것이 나을 겁니다. 예를 들면 공주님과 아드리아 공작 전하께서 즐겨 드시는 커피가 적당하겠군요.”

안나는 가만히 칼리스토를 바라보았다. 이 남자, 확실히 뭔가를 알고 있다. 마누엘을 향해 빼앗겼다 말한 것도 그렇고, 요안네스와의 그 이상한 눈빛 나눔도 그렇고, 지금 자신이 누구에게 이걸 쓸지 안다는 식으로 말하는 것도 그렇고…… 의문점투성이였다. 마치 없다는 듯 말해놓고는 돌변해서 약을 내주는 것도 수상하기 짝이 없고.

그녀는 약병을 슬쩍 앞으로 내밀었다.

“이걸 그대에게 먹어보라 하고 싶군요.”

“그러시지 않을 거라 믿기에 그 약을 드린 것입니다. 제 작은 호의를 무시하시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

“……이 약에 다른 효능도 있나요?”

“음, 약을 먹은 후 다소 충동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자신이 숨겨놓은 진실을 의도하지 않게 말해버린다면 당혹스러울 테고 또 어느 정도 화가 날 법도 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정확히는 저도 모릅니다. 말씀드렸듯이, 역사에 존재하지 않는 약이니까요.”

“효과는, 얼마나 오래가죠?”

“아마 차 한잔 마실 정도는 될 것입니다.”

“이번 일이 해결되면, 내 그대를 다시 부르겠습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공주님.”

칼리스토는 깊이 머리를 숙여 예를 올렸다. 안나는 유리병을 품 안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은 뒤 밖으로 향했고, 그곳에서 그녀를 호위하는 자들과 함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고개를 든 칼리스토는 어둠 저 너머에서 흔들리는 인영을 바라보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아마도 영원한 기다림이 될 테지요.”



----------



넘 올만이라... 보실 분이.... 계실까요....? ^^;;;
근데, 25편 역시 아마도 영원한 기다림이 흘러야...... 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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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만사다반사
14/12/17 09:24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올리셨네요!
역시 만능 칼리스토?
얼른 다음 편도 부탁드립니다
가브리엘대천사
14/12/17 10:27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뵈어요~
25편은 영원한 기다림이 흘러야...... 흐흐흐흐.....;; 몇주 동안 쓴 거 이번에 다 올려서, 다음편은 역시 기약이..... ㅠㅠ
뭐, 그치만 세상만사다반사 님께서 제 부족한 글에 대한 감상 선물(!!)이라도 주신다면.... 다음 편에 대한 영양분이 듬뿍 제공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일까요? ^^;
세상만사다반사
14/12/17 11:12
수정 아이콘
지금은 긴 글을 쓸 수가 없는 상황이라..ㅠ
이따 저녁때 왕창 써보겠습니다!
그러니 얼른 올려주세요! 올 해 가기전에.흐흐
가브리엘대천사
14/12/17 11:21
수정 아이콘
우와~ 저를 위해 그렇게 소중한 시간을 사용할 결심을 하시고.... 미리 감사합니당. ^^ 저녁에 오나전 기대하겠습니다!! (....인데 그동안의 우호적인 댓글과는 반대로 욕(?!)이 바가지로 들어 있는 반전 감상은 아니겠지요.... 크크크...)
세상만사다반사
14/12/17 19:43
수정 아이콘
앞으로 몇명의 고자가 더 등장하게 될 지 기대됩니다 ( 이보시오 의사양반..) 마누엘이 과연 기억을 찾게 될 지.. 또 요한네스의 진실을 알게 될 안나의 미래는...
여하튼 칼리스토와 그 스승은 뭐하는 사람들이길래 저런 초능력적인 능력을 발휘 할 수 있는걸까요.. 할 수 있다면 저도 오래된 종교에 좀.. 굽신굽신..
하여간, 1부에 마무리 되었던 칼리엔 이야기와 더불어 요한네스의 왕위찬탈.. 각국에서 벌어지는 왕자의 난(? ) 그리고 두 사건에 모두 등장하는 칼리스토의 정체..
(그나저나 칼리스토 그것을 이용해 칼
리엔이 아이를 가지게 되면 그건 누구 애일까요..)
저도 이렇게 글 쓰는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네요ㅠ
아... 나도 절단신공 해보고 싶다!
눈빛, 표정, 복선을 암시하는 말 한마디..
아직 인물에 대한 설정이 끝나지 않아 더해지는
인물들에 대한 스토리까지.. 여러모로 정말 재밌게 보고 있습니다!
그러니 후딱 다음편을 내 놓으시지요! 클클
가브리엘대천사
14/12/18 02:06
수정 아이콘
으앜크크크크크.... 감상의 시작을 고자 얘기로 하시다니 +_+! 대놓고 고자를 기대하시는군요! 흐흐... 2부는 잘 모르겠고, 3부에선 또 다른 고자가 예정된........;;

음... 칼레인이 칼리스토의 고환(;;)을 이용해 아이를 낳게 된다고 해도... 둘은 일란성 쌍둥이니까 DNA도 같을테고, 따라서 자기 아들이라고 해도 전혀 틀린 것은 아니겠지요. ^^ 그러나 칼레인은 신의 권능을 통해 그것이 복원된 것으로 나와 있으므로..... 흐흐흐.... 그리고 더 이상 칼레인은 존재하지 않지요.... (설마 모르시는 건 아닐테고..... 제가 스포일러 한 건 아니겠죠? 크크...)

저도 글을 더 '재미있게' 잘 쓰고 싶어요 ㅠㅠ 6년 동안 쉬다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장르 시장 쪽 트렌드가 완전히 바뀌어서 제 글은 절대로 먹히지 않더라구욤. 이번 글도... 어디에 올리든 한결 같이 인기가 없다는...;; 그래서,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는 거 여기저기 올려서 댓글이라도, 하나라도 더 냠냠하자는 신념으로 여기저기에 올리고 있답니당. 그러다가 운 좋게 세상만사다반사 님처럼 즐겁게 봐 주시면서 댓글도 달아주시는 독자님을 만나면 저에게는 기쁜 일이지요. :) 하지만 그거랑 집필 속도는 별개....... (후다닥~)

암튼, 이번주말까지 바쁘고, 담주도 학회 가야해서 바쁘고... 그 담주도 할일이 태산... 이라 바쁘지만... 그래도, 올해 가기 전에 한편을 더 올려볼 수 있도록 노력해 보겠습니다만 장담은 못 합니당. ^^; 아시겠지만 2부를 시작한 이후 (정확히는 21편부터 24편까지) 한 편당 분량이 매 회당 점점 길어지고 있기 땜에.... '한편'에 의미를 부여해서 반토막 짜리 내용을 올리면 서운하실 것 같다는.... ^^;;

감상 매우 매우 감사합니다. 제게 기쁜 영양분이 되었습니당. ^^ 감기 조심하시고, 다음에 뵈어요~
꾸벅.(__)
세상만사다반사
14/12/18 11:12
수정 아이콘
아.... 칼리스토가 칼리엔에게 그것(?)과 생명을 불어넣어주고 승화한게 아니라.... 소울체인지...(바디체인지인지 소울체인지인지는 잘..) 한 것이었네요. ㅠㅠ 잘 못 봤었네요..ㅠㅠ

여튼 최근 판타지 계열의 작품들이 큰 인기를 끌지는 못하고 있는 것 같아서 조금 아쉽습니다만.. 그래도!!!! 전 재밌습니다. 재밌으면 되지요!

글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가브리엘대천사
14/12/18 11:17
수정 아이콘
그것을 복원시키고, 생명을 넣어주고, 신체를 강탈!! 한 거지요. 흐흐... 그러면서 죽네 마네 울면서 오스카 주연상 뺨칠 정도의 연기를 선보인......;;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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