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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10/17 11:59:46
Name 글곰
Subject [일반]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어제 오늘 갑자기 피지알에 시 이야기가 많이 올라오네요.
그래서 제가 대한민국 근현대를 통틀어 최고의 시라고 생각하는 시를 소개하는 글을 쓸까 했는데...
아. 도저히 쓸 수가 없습니다. 너무나도 훌륭한 시여서 감히 뭐라고 말을 덧붙일 수가 없네요.
이 시의 아름다움을 설명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나요?
설명따윈 필요하지 않아요. 그냥 이 시는 그 존재 자체로 아름답습니다.

굳이 사족을 부연하자면, 이 시는 삶의 거대한 무게에 짓눌리다 점차로 초연해지는 한 사람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이런 주제의 시는 아주 흔하지만 이만큼 잘 쓰여진 시는 결코 흔하지 않지요.

삶은 대체로 힘들다지만 그래도 꿋꿋이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는 시여서
특히 여러가지 힘든 일로 우울한 분들에게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쉼표가 유독 많이 쓰였는데 쉼표의 위치에 유의해서 읽어 보시면 더욱 감명깊습니다.
마치 우리의 삶처럼 끝간 데 모를 높은 계단을 한 단씩 천천히 올라가는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쓸데없는 중언부언은 그만두고 시 나갑니다. 감상하세요.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
백석

어느 사이에 나는 아내도 없고, 또,
아내와 같이 살던 집도 없어지고,
그리고 살뜰한 부모며 동생들과도 멀리 떨어져서,
그 어느 바람 세인 쓸쓸한 거리 끝에 헤매이었다.
바로 날도 저물어서,
바람은 더욱 세게 불고, 추위는 점점 더해 오는데,
나는 어느 목수네 집 헌 삿을 깐,
한 방에 들어서 쥔을 붙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이 습내 나는 춥고, 누긋한 방에서,
낮이나 밤이나 나는 나 혼자도 너무 많은 것같이 생각하며,
딜옹배기에 북덕불이라도 담겨 오면,
이것을 안고 손을 쬐며 재 우에 뜻없이 글자를 쓰기도 하며,
또 문밖에 나가디두 않구 자리에 누워서,
머리에 손깍지벼개를 하고 굴기도 하면서,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 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턴정을 쳐다보는 것인데,
이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 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나는 이런 저녁에는 화로를 더욱 다가 끼며, 무릎을 꿇어 보며,
어니 먼 산 뒷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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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로로
13/10/17 12:21
수정 아이콘
개인적으로 백석 시인이 정말 대단한 이유가
참 쉽게 쓰여져서 읽기 편한데도 금방 다가와 여운이 남는다는거예요..
이 시도 그렇지만 고등학교 때 읽었었던
비구니? 여승? 나오던 그 시도 한번 읽고 잊혀지질 않더군요..
13/10/17 13:54
수정 아이콘
여승
백석

여승은 합장하고 절을 했다.
가지취의 내음새가 났다.
쓸쓸한 낯이 옛날같이 늙었다.
나는 불경처럼 서러워졌다.

평안도의 어느 산 깊은 금점판
나는 파리한 여인에게서 옥수수를 샀다.
여인은 나어린 딸아이를 때리며 가을밤처럼 차게 울었다.

섶벌같이 나아간 지아비 기다려 십년이 갔다.
지아비는 돌아오지 않고
어린 딸은 도라지꽃이 좋아 돌무덤으로 갔다.

산꿩도 섧게 울은 슬픈 날이 있었다.
산절의 마당귀에 여인의 머리오리가 눈물방울과 같이 떨어진 날이 있었다.


아.... 딸 있는 입장에서 이 시 다시 읽으며 배껴 쓰다 보니 눈물이 찔끔 나네요.
13/10/17 12:39
수정 아이콘
저는 백석 시 중에 '흰 바람벽이 있어' 를 재수때 책상에 붙여놓았네요
답답하고, 미래가 보이지 않을 때 혼자서나마 이 글들을 읽으면서 위로를 받았습니다.

이 흰 바람벽엔
내 쓸쓸한 얼굴을 쳐다보며
이러한 글자들이 지나간다

- 나는 이 세상에서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살어가도록 태어났다
그리고 이 세상을 살어가는데
내 가슴은 너무도 많이 뜨거운 것으로 호젓한 것으로 사랑으로 슬픔으로 가득 찬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를 위로하는 듯이 나를 울력하는 듯이
눈질을 하며 주먹질을 하며 이런 글자들이 지나간다

- 하늘이 이 세상을 내일 적에 그가 가장 귀해하고 사랑하는 것들은 모두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하니 그리고 언제나 넘치는 사랑과 슬픔 속에 살도록 만드신 것이다
초생달과 바구지꽃과 짝새와 당나귀가 그러하듯이
그리고 또 프랑시쓰 잼과 도연명과 라이넬 마리아 릴케가 그러하듯이

외로울 때, 내가 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고 느껴질때,
다른 사람들은 별거 아니라고 지나치는 것에 혼자 상처받으며 힘들어 할 때
이 구절을 읽으며 많이 힘이 되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시를 공부하면서, 가장 마음에 와닿았던 시들이 이용악과 백석의 시들이었던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13/10/17 13:57
수정 아이콘
이용악은 못 읽어봤네요. 한번 찾아봐야겠습니다.
'흰 바람벽이 있어'는 뭐랄까...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을 시로 읽는 기분입니다.
13/10/17 12:4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13/10/17 13:26
수정 아이콘
잘 안읽히고 쉽게 이해 안되는 저의 문학적 소양 부족이.... 흑
13/10/17 13:45
수정 아이콘
음. 잘 이해가 안 가신다면 아마 몇몇 낱말이 낯설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옛날 표현도 있고, 또 백석이 고향 사투리를 써서 시를 썼거든요.
샅->삿자리. 갈대 돗자리
누긋한 -> 눅눅한
딜옹배기->질옹배기. 질항아리
턴정->천정
나줏손 -> 저녁즈음
쥔을 붙이었다 -> 세를 들었다
13/10/17 13:30
수정 아이콘
시의 우열을 가리는 것이 부질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저도 개인적으로 한국 시 최고로 꼽는 시네요!

짧지만 글곰님의 글과 함께 읽으니까 시가 더 잘 와닿네요!

백석시를 보면 백석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아주 강하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요.

당시 어느 누구에게도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학식, 조선보다 몇배는 잘 살았던
일본 사람에게도 뒤지지 않는 패션센스와 준수한 외모, 여러나라말에 능통하고, 글도 아주 잘쓰는
그런 백석이지만 당시 유행가였던 '아서라 세상사'를 들을 유성기를 살 돈이 없을만큼 가난했고
가난해서 사랑에 여러번 실패했지요. 이런 가난한 환경 속에서, 식민시대라는 민족의 불운 속에서
백석은 끝없이 고뇌하고 괴로워했지요.

그런 환경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믿음을 끝까지 내려놓지 않으면서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고 외치던 백석.

재주가 뛰어나고 불우했다는 점에서 당시의 또다른 천재 이상과 비슷하면서도 이상과는 달리
백석에게는 무엇인가 강인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네요.

오랜만에 백석시나 다시 읽어야겠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13/10/17 14:00
수정 아이콘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좋죠. 추운 겨울에 읽으면 정말 따스해집니다.
그나저나 백석이야 뭐 키 크고 잘생겼고 공부 잘 하고 시 잘 쓰고 여자 잘 만나고 다녔던 완전체 같은 양반이라...
돈이 없었기에 시인이 되었지, 돈이 있었으면 천하의 놈팽이가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흐흐흐.
prime number
13/10/17 15:06
수정 아이콘
천하의 놈팽이라 상상하니 더 짜릿하게 매력적이시네요; 흐흐;;
그래도 시를 쓰셨을듯하고 시도 여전히 아름다웠을듯. (다른 감수성이었겠으나)
백석의 시를 처음 접하고 가슴이 찌르르 아프면서 아득했었는데
미모를 알게 되고 멘붕이... (꽃미남의 조상도 아니고 이게 뭔가.. 문인의 외모?가 아니시잖아...)

김영한씨가 법정스님께 길상사 기부하면서(책쓰며 부풀린 이야기나 기부 뒷이야기도 말이 여러갈래입니다만 패스하고)
"자기재산은 백석의 시 한 구절만큼의 가치도 없다" 고 했다지요.
저는 길상사?, 베르사이유나 피라미드랑도 백석의 시와는 안 바꿀련다! 했거든요..(오버 자제효;)

"이 시의 아름다움" 하시길래.. 저도 딸리는 지력도 지력이거니와 백석詩의 아름다움은 필설로 뭐라 표현이 안됩니다.
13/10/17 13:46
수정 아이콘
이 시의 문체는 이 시의 제목과 관계 있습니다. 이에 유의하여 읽으시면 그 의미가 보다 더 다가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자세한 설명은 생략하겠습니다 흐흐
13/10/17 13:49
수정 아이콘
다른 분들을 위해 자세한 설명을 붙이면(흐흐)
제목인 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은 [신의주시 남쪽의 유동(읍면동 할 때의 동) 박시봉 씨 댁에서 보냅니다] 라는 뜻입니다.
예전에 서간문(편지)를 보낼 때 저렇게 써서 보냈습니다. 요즘으로 치면 보내는 사람, 혹은 From이라고 써 놓은 부분이지요.
엘렌딜
13/10/17 13:51
수정 아이콘
고3을 앞둔 겨울 이 시를 읽으면서 혼자 눈물을 지었던 적이 있습니다.
서른이 지나서, 많이 좋아했던 사람을 떠나 보냈던 지난 겨울 홀로 방에서 읽으며 다시 한번 눈물 지었던 기억이 나네요.
저도 글곰님처럼 가장 좋아하는 최고의 시입니다.
Liberalist
13/10/17 15:58
수정 아이콘
저도 제 개인적인 감상일 뿐입니다만, 시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느낀 것은 서정주의 시가 아니라 백석의 시였죠.
서정주가 한국의 20세기 대표 시인이네, 천재네 하지만, 제 마음 속 20세기 넘버원 시인은 어디까지나 백석입니다. 흐흐;;
루크레티아
13/10/17 16:10
수정 아이콘
저는 댓글의 여승이 제일 좋더군요.
我無嶋
13/10/17 17:37
수정 아이콘
저도 백석만한분이 없는것 같아요.
人在江湖
13/10/17 18:57
수정 아이콘
오. 제목보고 뭔가 했는데 대물을 낚은 기분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지금뭐하고있니
13/10/18 02:20
수정 아이콘
제가 힘들 때 제 형제같은 친구녀석이 이 시를 보냈죠.

군대에 있을 때라 메일로 왔었는데, 그 때 출력한 A4지를 아직도 가지고 있습니다.
버릴 수가 없더군요..
제겐 정말 뜻깊은 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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