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3/08/31 10:07:53
Name 알고보면괜찮은
Subject [일반] 고려 현종 이야기- 축복받지 못한 탄생
  고려사 열전 헌정왕후 편에 따르면 헌정왕후는 경종 사후 개경 왕륜사 남쪽에 있는 사저에 나가 살았다고 하는데 어느날 요상한 꿈을 꾸게 됩니다.  곡령에 올라 소변을 누니 온 나라에 흘러 넘쳐서 모조리 은빛 바다로 변하는 꿈이었죠.
  ...뭔가 어디서 많이 본 내용같지 않습니까?  예, 삼국유사에도 이런 비슷한 내용이 있죠.  김유신의 누이 보희가 여동생 문희(후에 문명왕후)에게 비단 치마를 받고 판 꿈이 이런 내용이었죠.  그 결과 문희는 김춘추(무열왕)와 눈이 맞아 아들(문무왕)을 낳고 왕비가 되었죠.
  뭐가 오리지널이든 간에 헌정왕후도 점쟁이에게 해몽으로 아들을 낳으면 한 나라를 가질 거라는 말을 듣습니다.  헌정왕후는 의아해했죠.  당연한 일일 겁니다.  과부였으니까요.
  하지만 아들이 생길 길이 아주 없는 것만은 아닌 모양입니다.  헌정왕후 집 근처에는 태조와 신성왕후 김씨(신라 경순왕의 사촌누이)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족 욱(郁)(헌정왕후의 아버지 대종 욱과는 한자가 다릅니다.  나중에 아들 현종에 의해 안종으로 추존)이 살고 있었습니다.  헌정왕후와는 이복 숙부 조카사이였죠.  하여튼 둘이 가까이 살다보니 서로 왕래하며 지내다가 결국 정을 통하게 되었고 결국 헌정왕후가 왕욱(안종)의 아이를 임신하게 됩니다.
  왕후가 만삭이 될 때까지 주변에서 쉬쉬한 터라 성종은 누이동생에게 뭔 일이 있었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알게 되는데 그 경위에 대해 고려사에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 성종 11년(992) 7월, 왕후가 안종의 집에서 자고 있는 사이 그 집안 사람들이 장작을 뜰에 쌓아놓고 불을 질렀다. 불길이 맹렬히 솟아오르자 백관들이 불을 끄러 달려오고 성종도 급히 와 안부를 물으니, 집안 사람들이 마침내 사실대로 알렸으며 이에 왕은 안종을 유배보냈다.
[네이버 지식백과] 경종(景宗) 후비 (국역 고려사, 2006.11.20, 경인문화사)"
  
  헌정왕후가 안종의 집에 머무른 건 고려사 편찬자들이 그녀의 행동을 더 나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꾸며낸 거라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과부가 재혼도 하지 않은채 임신했다는 건 아무리 비교적 성에 대해 개방적인 인식을 갖고 있었다는 고려의 사회상에 비쳐 보아도 영 좋은 일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오라비인 성종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겠죠.  안그래도 또 다른 경종의 왕후이자 자신의 누이동생 헌애왕후도 스캔들을 일으켰는데 또 다른 누이가 이런 일을 일으켰으니 왕실의 권위가 바닥에 떨어지다 못해 땅을 뚫고 들어갈 기세였죠.
  현대에 들어와서는 자식 없는 과부가 이런 일을 하는 게 뭔 문제냐는 얘기가 나오지만, 글쎄요,  헌정왕후야 청상과부(언니 헌애왕후의 출생년도를 기준으로 추정하면 헌정왕후가 현종을 출산할 당시 헌정왕후는 27,8세 정도였습니다.)긴 했지만 그 사통 상대인 왕욱은 어땠을까요?  
  안종 왕욱의 출생년도는 알 수 없지만 어느 정도 범위까지는 추정가능합니다.  왕욱의 모후 신성왕후가 태조와 혼인 하게 된 이유는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이후 두 왕실의 관계를 돈독하게 하기 위해서 입니다.  그래서 경순왕이 사촌 누이인 신성왕후를 추천하여 보냈고, 태조도 딸 낙랑공주를 경순왕에게 시집보내죠.  신라가 고려에 항복한 게 935년 11월이므로 신성왕후가 태조의 후비가 된 것은 936년 초일겁니다.  그리고 태조가 사망한 해가 943년이죠.  즉, 안종은 936년~943년, 유복자일 가능성을 고려하더라도 944년 내에 태어났을 겁니다.  그렇다면 현종이 태어났을 때인 992년에 안종은 많으면 57세, 적어도 50, 49세였겠죠.  나이가 뭔 상관이냐고 하실 분도 계실텐데, 그 옛날에 절에 출가 한 것도 아니고(고려 왕자들은 스님이 된 경우가 많았습니다.), 왕족이 쉰 가까이 혹은 쉰 넘어서까지 솔로였을 가능성은 제로에 가깝죠.  역사서에 명확하게 기록에 남은 것은 아니지만 안종 왕욱은 당시 유부남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실제로 성종이 둘의 사통 사실을 알게 된 게 안종의 본처가 이 사실을 알고 노하여 사람을 시켜 소문을 퍼뜨리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야사도 있는 모양입니다.)  헌정왕후가 임신하여 만삭이었기도 했지만 왕욱만 처벌받게 된 이유도 아마 이 때문이었을 겁니다.
  하여튼 성종은 두 사람의 사통 사실을 알고 숙부인 왕욱에게 "숙부께서 대의를 범해 귀양가시니 몸가짐을 조심하여 애태우지 마시오."라고 말하고 사수현(지금의 경상남도 사천시)에 귀양보냅니다.  귀양지에 도착해서 돌아가려는 압송인에게 왕욱은 이런 시를 지어 배웅하죠.

"그대와 같은 날 서울을 떠났건만
그댄 먼저 돌아가고 나만 못 돌아가네.
여함(旅檻)에선 사슬에 매인 듯한 원숭이 신세 탄식하고
헤어지는 정자에선 나는 듯 달려가는 말이 부럽기만 하네.
서울의 봄 그리는 마음은 꿈속에만 오가고
해변 고을 풍광에 눈물 옷깃에 가득하여라.
성주(聖主)의 한 말씀 응당 바뀌지 않으리니
설마 어촌 갯가에서 평생 늙게 하시리오."
[네이버 지식백과] 태조(太祖) 왕자 (국역 고려사, 2006.11.20, 경인문화사)

  그리고 왕욱이 귀양가는 그 날 헌정왕후는 산통을 느끼고 해산을 합니다.  고려사에서는 왕후가 부끄러워 울부짖으며 집에 돌아오던 중 대문에 도착하자마자 산기를 느껴 대문 앞 버드나무 가지를 부여잡고 해산을 하다 사망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대문 밖에서 아이를 낳았다는 건 아마 고려사 편찬자들의 왜곡, 과장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리고 아비가 귀양 가고 어미가 죽은 날 태어난 이 아이가 후에 현종이 되는 왕순입니다.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치토스
13/08/31 10:51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13/08/31 10:53
수정 아이콘
김호진 & 신애 이야기군요. 김호진 참 멋있었는데....
홍차소녀
13/08/31 10:54
수정 아이콘
역사 공부를 하면서 좋은 업적을 많이 남겼던 현종에 대해 꽤 호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출생의 사연이 있었는지는 몰랐습니다.
아버지가 귀양가고 어머니가 죽은 날 태어났다니...... 어떤 과정으로 왕이 되었는지도 궁금하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겟타빔
13/08/31 12:37
수정 아이콘
현종이야기를 드라마로 만들면 좀 좋겠나 싶은데 현실은 충혜왕...
Liberalist
13/08/31 23:03
수정 아이콘
고려 현종이 참 다이나믹한 삶을 보냈죠. 어려서 고생을 많이 해서 그런가 딱히 오래살지도 못한 느낌이고.

잘 보면 요즘 막장 드라마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불륜, 출생의 비밀 같은 필수요소 다 갖고 있는데 왜 드라마화가 안 되는건지;;
13/09/01 05:40
수정 아이콘
현종 얘기야 천추태후가 있으니 향후 몇년간 드라마화 될 일은 없을겁니다. 괴작이라는 게 아쉽지만 다룰만한 얘기는 다 다뤘죠.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46229 [일반]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빨아 먹은 방어선(3) - 아라스 [3] swordfish6241 13/08/31 6241 3
46228 [일반] CrossFit fundamental [60] 동네형9455 13/08/31 9455 3
46227 [일반] 2013년은 과연 플러스인가, 마이너스인가 [16] '3'5888 13/08/31 5888 0
46226 [일반] 고려 현종 이야기- 축복받지 못한 탄생 [6] 알고보면괜찮은4573 13/08/31 4573 3
46225 [일반] <단편> 카페, 그녀 -14 (부제 : 연애하고 싶으시죠?) [17] aura5666 13/08/31 5666 1
46224 [일반] [오피셜] 크리스티안 에릭센 토트넘 이적 [19] 고윤하6376 13/08/31 6376 0
46223 [일반] 엘리시움 Elysium 보고 왔습니다. (스포 있습니다) [34] 王天君7508 13/08/31 7508 1
46221 [일반] 빠돌이를 양산 중입니다. [11] 트린4923 13/08/31 4923 0
46220 [일반] [해축] 기성용, 선덜랜드 1년 임대 확정 [63] Charles8305 13/08/31 8305 1
46219 [일반] 편지를 쓴다 [3] 눈시BBbr5065 13/08/31 5065 1
46218 [일반] 그 때 대한민국이 울었다 - 생방송 이산가족찾기1 [5] 김치찌개4154 13/08/31 4154 1
46217 [일반] 서울 4대 매운 떡볶이 [17] 김치찌개7525 13/08/31 7525 0
46216 [일반] 서울권 일본라멘 평가 [58] AfnaiD11783 13/08/30 11783 6
46215 [일반] 역사상 가장 많은 피를 빨아 먹은 방어선(2)- 아라스 공방전 시작 [3] swordfish6680 13/08/30 6680 3
46214 [일반] 저는 쓰레기입니다 [34] 삭제됨6833 13/08/30 6833 1
46213 [일반] KT가 주파수 전쟁 승리하였네요! [34] 이쥴레이7919 13/08/30 7919 1
46212 [일반] 이석기 의원이 사실상 시인했네요. [102] 미스터H11317 13/08/30 11317 1
46211 [일반] 권신의 시대 ④ 오만 [3] 후추통9008 13/08/30 9008 8
46209 [일반] [해축] BBC 금일의 가쉽 [71] V.serum5840 13/08/30 5840 0
46208 [일반] 렉과 원판 봉을 배제한 저예산 초간단 홈짐 구성 가이드 [17] 애플보요8879 13/08/30 8879 4
46207 [일반] 오늘은 불금.. 퇴근 시간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여러분.. [30] k`6295 13/08/30 6295 1
46206 [일반] 이 달에 본 책, 영화, 웹툰, 드라마 그리고 음악. 최고는 웹툰 <아는 사람 이야기> [10] 쌈등마잉7186 13/08/30 7186 2
46205 [일반] 통진당을 이해해보자 - 그들은 어떻게 주사파가 되었는가 [83] ㅇㅇ/7654 13/08/30 7654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