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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1/11/05 19:13:03
Name 카랑카
Subject [일반] 서태지 현진영 이수만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 (수정됨)

1985~1995년 사이의 가요사를 정리하여 90년대 가요사라는 글로 작성해봤습니다. 특히 김완선, 서태지, 이수만, 현진영, 이현도등 5명의 주요인물 위주로 작성했습니다. 정확하게는 8090의 가요사가 됩니다.








1. 김완선 댄스음악의 시대를 열다.  




8090년대의 아이돌이라고 할수 있는 소녀가수들, 즉 10대의 나이에 데뷔한 하이틴여가수는 김완선, 이지연, 강수지, 하수빈, 이상은이 유명하였고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하수빈, 강수지, 이지연이 청순가련형의 미소녀아이돌스타일로 인기를 얻었다면 김완선은 섹시하고 도도한 팜므파탈적인 걸크러쉬 매력으로, 이상은은 보이시한 톰보이적인 매력으로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들은 현재 유행하는 아이돌가수들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이지연·강수지는 핑클·장나라에, 이상은은 엠버로, 김완선은 박지윤에 큰 영향을 끼쳤죠. 








1978년 한백희는 인순이를 희자매로 데뷔시킨후에 김완선, 이주노, 박철우를 발굴하여 혹독하게 트레이닝을 시켰습니다.  김완선은 한국가요계에서 최초의 연습생이며 1983년14살의 나이에 발탁되었습니다. 한백희는 희자매가 해체되자 인순이를 솔로로 전향시키면서 "인순이와 리듬터치"라는 백댄서팀을 구성하고 로드매니저로 김광수를 채용합니다.  (1985년, 리듬터치의 백댄서멤버: 이주노, 김완선, 박철우)  한백희는 김완선을 백댄서로 기량을 가다듬게하고 1986년 김완선을 17세의 나이에 데뷔시킵니다.  그 후 인순이, 이주노, 박철우는 한백희곁을 떠나게됩니다. 이때 리듬터치에서 안무를 맡았던 안무가는 이주노와 박철우를 데리고 브레이크 댄스팀 스파크를 창단합니다. 




1987년 한국의 조용필과 김완선등 필리핀, 홍콩, 일본등의 아시아의 정상급 가수등이 참여하는 팍스 뮤지카 87(PAX MUSICA)을 개최합니다. 이때 김완선은 놀라운 기량을 선보이자 NHK에서 한국의 최고아이돌이라는 주제로 10분이나 김완선을 다뤘습니다. 결국 일본에서 진출제의가 들어왔고 이때 김완선은 일본의 프로덕션에서 녹음을 하였는데 일본의 프로덕션에서 춤추는걸 봐야된다고 해서 춤을 추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가수의 안무에 김완선의 안무를 그대로 빼긴후 미국에 데려가 영상을 찍은 사건이 발생하여 크게 실망한 김완선은 한국으로 귀국을 합니다. 이때 라이벌인 이지연이 돌연 은퇴를 하였습니다. 1990년 김완선은 5집을 발표하면서 큰 인기를 끈 후 1991년에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가장무도회가 대히트를 기록하면서 100만장을 팔아치웠고 MBC 10대 가수에 선정되어 최정상의 여가수가 됩니다.




리듬 속의 그 춤을 - 팍스 뮤지카 87(PAX MUSICA)





한국의 최고아이돌 김완선 - 일본 NHK뉴스 방영






https://bit.ly/2Gdgq7m  김완선 - 오늘 밤 Tonight (일본 ABC TV 안녕하세요! 아침해입니다)


https://bit.ly/3ij8nTw  김완선 - 가장무도회


http://goo.gl/F8nhL  김완선 - 오늘밤(데뷔무대)


https://goo.gl/j1lGFr  김완선 - 삐에로는 우릴 보고 웃지


https://goo.gl/Z27ZO8 김완선 - 기분 좋은 날




김완선의 등장은 한 마디로 쇼킹 그 자체였습니다. 10대 소녀였던 그녀가 들고 나온 음악과 스타일, 컨셉, 안무, 무대 구성등은 예전의 기성 가요와는 궤적을 달리하는 파격적이고 신선한 시도였죠.  이 후 가요계는 변화를 거듭했는데  첫번째로 서태지, 소방차, 박남정, 현진영같은 댄스가수들의 등장이죠. 두번재로 이지연, 박준희, 안혜지, 이소은같은 소녀가수의 등장입니다.  그녀들이 데뷔할때 '여고생 가수'라는 것을 크게 어필했는데 10대의 어린 나이의 소녀가수들이  데뷔하는 것이 자연스런 현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여기서 김완선에게 선보인 어린나이에 트레이닝하는 연습생시스템은 현재 아이돌기획사의 표준이 되었습니다. 이수만이 김완선을 모델로 보아를 프로듀싱한것은 유명한 애기입니다.  즉 김완선은 아이돌의 시조이자 현재 유행하는 케이팝의 시조라고 할수 있습니다. 




https://goo.gl/t3I71O  박준희 - 눈 감아 봐도


https://bit.ly/2SzqjPv   이소은 - 노래모음


https://bit.ly/32XaOp3  안혜지 (1989년 데뷔) - 벌써 이 밤이 다 지나고  


 






백두산리더 유현상은 경복여고에서 락밴드 보컬을 하던 소녀를 발견하고 아름다운 미모에 어울리지않은 가창력에 반해 이지연을 데뷔시킵니다. 이지연은 김완선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며 함께 '여고생 가수'로 인기몰이를 하였습니다. 당시 가요톱텐은 중장년층 투표인단의 비중이 컸는데 예를 들면 하이틴 스타는 1위를 할수있지만 연속 5번으로 골든컵을 수상하기는 힘들었으나 이지연은 전 연령의 전폭적인 지지를 끌어내며 골든컵 수상의 영예를 안았습니다. 이지연과 비슷하게 전 연령대에 큰 인기를 끈 동시기 남성 아이돌은 박남정밖에 없습니다.  "바람아 멈추어다오" 이 곡으로 1989년 이지연은 MBC 10대가수상과 KBS 올해의 가수상을 수상합니다. 그러나 어떤 가수와 열애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간후 결혼을 합니다.




이지연 - 바람아 멈추어다오





http://goo.gl/KVpb8    이지연 - 그 이유가 내겐 아픔이었네 (1988)


http://goo.gl/bR3Zjp   이지연 - 늦지 않았어요 


https://bit.ly/33nB51n   이지연 - 난 사랑을 아직 몰라, 박남정 - 사랑의 불시착


 






강수지는 16살때 미국으로 이민하여 가스펠밴드 보컬을 하다가 89년 교포가요제에 금상을 수상하면서 MC였던 송승환을 알게됩니다.  그후 송승환의 국내전화번호와 단돈100달러를 들고 89년에 한국행을 감행하고 그 후 윤상의 프로듀싱 하에 '보라빛 향기' 앨범을 내고 대박을 내면서 데뷔합니다. 청순 아이돌 시조였던 이지연이 돌연 은퇴를 한 후였기 때문에 그 인기를 고스란히 흡수하게 됩니다. 이후 '흩어진 나날들'이라는 곡으로 처음 1위를 하고 각종 상을 휩쓸었으며 '시간 속의 향기'라는 곡이 연이어 히트하면서 인기를 이어갑니다. 그러나 심신과 열애사실이 밝혀지고 그후 일본으로 건너갑니다.




강수지 - 보라빛향기





https://bit.ly/2Sh1vvi  강수지 - 혼자만의 겨울




 






하수빈은 1990년(17세)에  초콜릿CF모델이 되기위해 미국에 갔다가 현지공연프로모터의 눈에 띄어 리사라는 예명을 받고 미국팝가수인 토미페이지한테 "I`m Falling in love"라는 곡을 받아 1992년(19세)에 가수로 데뷔하게 됩니다.  데뷔하고 단 2회 음악방송 전파를 탄 이후 10만장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큰 주목을 받게 되면서 강수지의 라이벌이 됩니다. 특히 남학생 팬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얻기도 했지만 안티 세력도 많이 생성되었죠.




하수빈 - 더이상 내게 아픔을 남기지마 ('92)





zvXOk2.gif (540×360)




https://bit.ly/3cVvB0P   하수빈- 노노노노노










이상은은  1988년 강변가요제에서 담다디로 등장하였는데 무대에서 탬버린을 신나게 흔들어대며 즐기듯 노래하는 중성적 매력의 키 큰 보이시스타일의 모습으로  소녀팬들의 열광적 추종을 이끌어낸 한국가요사에서 가장 파격적인 여자아이돌 중 한명이었습니다.   18세의 나이로 보는 이들의 눈길을 단번에 휘어잡은 이상은은 온갖 매체들의 전면을 도배하기 시작했으며 엄청난 폭발력으로 그해 각종 시상식 수상은 물론 '담다디'라는 영화에서 주연으로 열연까지 하기도 하였습니다. 데뷔하자마자 라디오 DJ를 시작으로 쇼프로MC, CF, 예능, 연기 등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하게 됩니다.   데뷔당시 대학 1학년때, 취미로 작곡하던 복학생 선배가 '강변가요제 나갈 애들 있으면 연락하라'는 말에 나중에서야 용기를 내 찾아갔더니 '어떡하니. 발라드는 다 나갔다'며 준 곡이 바로 담다디. 그 선배의 곡들 중 유일하게 본선을 진출한 곡이었고 그게 대상으로 수상되었습니다. 당시 MC였던 이수만은 당시 보기힘든 이상은의 이런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아  먼 훗날 F(x)의 제작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이상은 - 담다디 (강변가요제: MC 이수만)













또한 이 당시 여가수로 김희애· 윈준희· 장혜리· 양수경이 유명했습니다. 특히 김희애, 하수빈은 가수, 배우, 모델의 영역을 넘나들며 활동하였습니다(김희애: 모델→배우→가수, 하수빈: 모델→가수).  김희애는 모델로 데뷔하여 배우로 크게 성공하였으며 가수로도 활약을 했습니다. KBS2 라디오의 DJ들이 옴니버스 앨범을 만들었는데 수록곡중 김희애가 부른 '나를 잊지 말아요'가 인기를 얻어 가요프로그램에 반짝활동을 하게 됩니다. 뒤이어 엄정화와 장나라가 가수와 배우의 두 영역에서 큰 성공을 거두면서 큰 영향을 끼쳤는데 아이돌들이 가수, 배우, 모델, 라디오DJ, 쇼프로MC등의 광범위한 영역에서 활동하는 것이 매우 당연하게 되어버렸습니다.  참고로 걸그룹은 세또래가 있었습니다.




김희애 - 나를 잊지 말아요





https://bit.ly/3jjiGs3    장혜리 - 추억의 발라드


https://goo.gl/bDf9Jd   원준희(안도희) - 사랑은 유리같은 것 (1989)


https://bit.ly/31XPQqY  양수경 - 사랑은 창밖에 빗물같아요


https://goo.gl/Bc873C  세또래  - 그대를 사랑해


















2.  이시대의 가요계 상황들




1988년 신해철은 아기천사라는 밴드로 강변가요제에 참여하여  슬픈표정하지말아요라는 노래를 불렀는데 예선탈락을 합니다. 절차부심한한 신해철은 이때 탈락한 정석원과 함께 다시 서울대, 연세대, 서강대을 연합한 무한궤도 밴드를 결성한후 대학가요제에 참석합니다. 그해 12월 전략을 바꾸어  관중 호응이 더 높았던 담다디 이상은을 참고삼아 빠르고 경쾌한  그대에게라는 노래로 승부을 봤는데 대성공합니다.   그러나 프로페셔널 뮤지션 활동을 계획하는 신해철과 젊은 시절의 추억으로 여기는 무한궤도의 나머지멤버들간에 괴리가 생기자 신해철은 새멤버를 영입하기로 마음먹습니다. 여러명의 멤버들이 교체되었지만 결국 몇 달만에 무한궤도는 완전해체를 합니다.  




해체이유는 신해철은 정석원과 음악적견해차이였는데 신해철이 무한궤도를 탈퇴하면서 정석원과 장호일, 나머지 무한궤도멤버들은  015B를 결성합니다.  솔로로 전향한 신해철은 댄스곡 "안녕"과 발라드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 "재즈 카페" 등을 히트하며 인기가수로 자리잡습니다. 그러나 락밴드을 하고 싶었던 신해철은  솔로로 2장의 앨범을 낸 뒤 넥스트라는 락밴드를 결성합니다.




무한궤도 - 그대에게(신해철 데뷔무대)





http://goo.gl/haKcEC   신해철 - 재즈까페


http://goo.gl/wWRxqv   N.EX.T - 날아라 병아리 (신해철)


http://goo.gl/lWtYFc   N.EX.T - The Ocean : 불멸에 관하여 (신해철)


http://www.clien.net/cs2/bbs/board.php?bo_table=lecture&wr_id=253707    8090의 락밴드 가요사






양현석은 평범한 직장을 다니다가 우연히 TV에서 백댄서를 하는 친구를 보고 충격을 받아 직장을 그만두고 브레이크 댄스팀 "스파크"에 입단합니다. 당시 80년대 후반에는 수많은 브레이크 댄스팀이 있었는데 스파크, 노피플, 노파킹, 엑스레이등 여러팀이 이태원의 문나이트라는 클럽에서 춤을 췄고 점점 유명해지자 댄서들이 몰리면서 문나이트의 인맥이 형성됩니다. 이때 박남정, 이주노, 박철우가 유명했는데 춤꾼사이에 명성을 떨치면서  양현석, 현진영, 구준엽, 강원래, 이현도, 김성재, 미애, 유영진이 문나이트에 등장하게 됩니다. 




1986년 김완선이라는 댄스가수가 혜성처럼 등장하며 가요계에 큰 파문을 일으키자 여러 기획사들이 군침을 흘리며 댄스가수라는 분야에 뛰어들게 됩니다. 1987년 한밭기획의 이사였던 이호연은 소방차를 기획하여 성공하였고 그걸 발판으로 독립하여 1991년에 대성기획(後身:DSP)를 창립합니다.  그 후 일본의 개그맨인 다운타운이 소방차의 어젯밤 이야기를 오쟈파멘이라는 커버곡를 발표하였는데 일본에서 괘 인기가 있었습니다. 1988년 문나이트에서 춤을 추던 박남정은 기획사의 눈에 띄어 가수로 데뷔했는데  양현석, 이주노, 박철우, 김영완을 백댄서로 영입해 프렌즈팀를 구축합니다.  연이어 1990년 현진영, 1992년 서태지가 데뷔하게 됩니다. 




이때 전영록은 여중생, 여고생의 절대적인 지지을 받으며 연기, 노래, 라디오 DJ 등 다방면에서 활약한 만능 엔터테이너이자 가요계와 영화계를 평정한 스타였습니다. 하지만 박남정, 소방차같은 댄스가수들의 등장으로 점점 밀리게 되죠.   그당시 댄스가요계는 소방차와 박남정, 김완선이 최정상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뒤이어 현진영도 인기를 얻어 그들의 뒤을 바짝 추격하고 있었죠.  그러나 서태지의 등장으로 이들의 운명은 바뀌게 됩니다




또한 1990년 문나이트에서 DJ를 하던 신철은 나미와 "나미와 붐붐"을 결성하여 "인디언 인형처럼"으로  댄서와 랩퍼를 오가면서 활동을 하였습니다.  1992년 신철은 미애와 "철이와 미애"를 결성해 가수로서 활동을 시작하여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박철우는 R.ef로 데뷔, 김영완은 콜라로 데뷔)






소방차 - 어제밤이야기







박남정 - 널 그리며








https://bit.ly/30q8zdC   전영록 - '종이학' [1982 가요대상]


http://goo.gl/EmA0k      다운타운 - オジャパメン


https://bit.ly/36qtiSh    나미와 붐붐 - 인디언인형처럼


http://goo.gl/qkmCP2      철이와 미애 - 너는 왜




 




 




 




 






3. 연예기획사 SM의 탄생




1981년 이수만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 컴퓨터공학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이때 이수만은 미국의 MTV와 미국의 음반산업을 보며 연예기획자로 꿈을 꿉니다. 85년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이수만은 방송활동을 재개합니다. 다시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홍종화라는 작곡가를 설득 끝에 섭외하며 앨범을 발표했으나 실패한 후 가수를 그만두고 프로듀서로 전향하기로 마음먹습니다. 본격적으로 연예기획사를 설립하기 위해 인천 월미도에 헤밍웨이 까페와 방배동 까페를 차려 기획사의 사업자금을 마련한 다음 한동준과 김광진을 영입합니다.




김완선의 등장 이후 댄스음악이라는 새로운 흐름을 놓칠수 없었던 이수만은 한국에 흑인댄스음악을  도입하기로 마음먹고 바비 브라운을 참고합니다. 바비 브라운은 두명의 댄서와 삼각편대를 이루어 춤을 추는 형태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여기서 영감을 얻은 이수만도 3인조 그룹을 기획합니다. 구체적인 구상이 끝난후 이수만은 이태원이나 여러 유명클럽에 찾아다니고, 문나이트에서 최진열을 고용한후 "음반을 낼까 하는데 주변에 춤되고 노래되는 애 있으면 찾아달라"고 일을 시킵니다. 최진열은 평소에 알고 있던 이주노와 현진영을 이수만에게 소개합니다. 이주노와 현진영을 저울질하던 이수만은 현진영이 이주노보다 노래를 잘하는 점에 현진영을 발탁합니다. 이때는 1988년이며 현진영은 당시나이가 16세였습니다.




http://goo.gl/oWteTF   Bobbi Brown - Every Little Step: The Arsenio Hall Show




얼마후 이수만은 나머지멤버를 영입하기위해 댄스페스티벌을 개최하였는데 이주노, 양현석, 구준엽, 강원래, 유영진, 미애등 여러명이 참가하였고 구준엽·강원래팀이 우승하여 최진열의 제의로 SM에 입사하게 됩니다. 당시 김승현이 사회자를 보았고 구준엽·강원래는 와와1기이며 훗날 클론이 됩니다. 이수만은 이들에게 트레이너를 고용해서 기량을 가다듬게 합니다. 1989년 이수만은 송파에서 SM기획를 창립합니다. 최진열에게는 SM기획의 경영과 매니지먼트를 맡기고 홍종화에게는 수석프로듀서를 담당합니다.




1990년 이수만은 제1집 "New Dance"를 발표하며 현진영과 와와(구준엽,강원래)를 데뷔시킵니다. 그후 한동준과 김광진의 앨범도 발표합니다. "현진영과 와와"의 야한여자는 그당시 대세였던 박남정과 김완선, 소방차에 밀렸지만 어느정도 인기를 얻었습니다. 이수만은 후속곡 '슬픈 마네킹'을 발표했는데 인기를 얻어 현진영은  단숨에 그당시 대세였던 박남정의 라이벌로 급부상합니다. 그리고 활동도중에 구준엽과 강원래가 군대문제로 입영하게 되자 이수만은 새로 이현도, 김성재를 와와2기로 발탁합니다.




와와1기 - 현진영, 구준엽, 강원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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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goo.gl/22MjRk 와와1기의 데뷔전 프리뷰


https://goo.gl/CzOtP1 슬픈 마네킹 (현진영, 구준엽, 강원래)




야한 여자 (현진영, 구준엽, 강원래)










와와2기 - 현진영, 이현도, 김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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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진영, 이현도, 김성재 (슬픈마네킹)





https://bit.ly/2HMZh4X    현진영 - 김완선 출연




 




 




 




4. 서태지 대격변을 일으키다




김완선이 선보인 댄스음악에 기획사만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록음악을 하는 가수였던 서태지도 많은 관심을 가졌죠. 당시 서태지와 김종서는 사나위에서 록음악 활동을 하던 중에 신대철과 마찰로 시나위를 떠나게 됩니다. 그후 서태지와 김종서는 무궁화밴드에 입단하고 여러 나이트클럽에 진전합니다.  




어느 날 무궁화밴드는 캐피탈호텔에 공연하게 되었는데 우연의 일치인지 그때 "박남정과 친구들"도 공연을 하러왔습니다. 무궁화밴드의 공연이 끝난후 박남정이 공연을 하였는데 평소에 댄스음악에 관심이 많았던 서태지는 그 공연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그 후 춤을 배울려고 팀원이였던 양현석에게 말을 걸었는데, 양현석은 문나이트에 가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서태지는 한달동안 문나이트를 출입해서 지켜보다가 결국 양현석에게 춤을 가르쳐달라고 하는데 이때 양현석은 레슨비로 한달에 150만원을 부르며 3달 레슨비 450만원을 선불로 요구하여 서태지는 지불하게 됩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레슨을 하기전에 양현석에게 군대영장이 날라왔고, 서태지에게 받은 돈을 돌려주지 못한 채 군대에 가게 됩니다.


이때 서태지는 낮에는 작곡을 하면서 밤에는 연주을 하는 생활을 하였고 드디어 곡을 완성하였는데 때마침 양현석도 의가사제대를 합니다. 8개월간의 군대생활을 마친 양현석은 방정리를 하는 도중에 수첩을 발견하였고 레슨을 해줄려고 서태지에게 연락을 합니다.


서태지는 데모음악을 양현석에게 들려주고 양현석은 서태지에게 "노래가 좋다. 그런데 이 노래는 혼자 하는 것보다 팀을 이뤄하는 게 훨씬 좋을 것 같다"고 조언했고 서태지는 양현석의 조언에 3명의 팀을 결성하기로 결정하고 나머지 멤버를 구합니다. 5명정도의 후보를 탈락시킨후 결국 이주노를 영입하면서 서태지와 아이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후 서태지는 데뷔를 하기위해 여러기획사와 접촉을 하였는데 이때 반도음반사의 기획실장인 유대영은 서태지의 음악을 듣고 제작을 결심하여 서태지와 계약을 합니다. 그후 유대영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총괄매니저가 된후 로드매니저로 최진열을 고용합니다. 당시 최진열은 현진영의 대마초사건으로 큰 곤욕을 겪은 상황이였죠. 그후 서태지가 MBC 특종TV연예에 출연을 합니다. 쇼의 반응은 놀라웠으며 1992년 4월에 서태지의 1집 난 알아요를 발표합니다. 서태지와 아이들은 방송 3사의 가요 순위 프로그램을 모두 석권하였으며, 그해 가요계에 부여된 모든 상을 휩쓸었고 데뷔 음반으로는 최다판매량인 170만 장의 판매량을 기록하는등 대성공을 거둡니다. 그러나 유대영은 서태지와 의견충돌로 결별하였고 그후 서태지는 자신의 기획사를 차린후 최진열을 총괄매니저로 고용합니다.




 


서태지와 아이들  - 난 알아요 (데뷔무대)





http://goo.gl/UFCzDP   서태지 - 시대유감


http://goo.gl/77ZfJu   김완선- 대만TV


https://bit.ly/3i4LAve   박진영 - '날 떠나지마' (1995)






서태지와 아이들은 엉청난 열풍을 일으키는데 그 여파로  소방차와 박남정, 김완선이 지배하는 기존의 댄스가요계는 무너지면서 새로운 댄스그룹들이 우후죽순처럼 데뷰합니다.  소방차는 해체하였으며 박남정은 완벽한 몰락의 길을 걷게됩니다.  그리고 김완선은 돌연 은퇴을 선언하고 얼마후 홍콩, 대만으로 해외진출을 합니다.  그 후 대만에서 진위엔쉬안(金元萱;김원훤)이란 이름으로 활동을 시작했는데 큰 인기를 끌면서 원조 한류가수가 됩니다.




또한 서태지의 파격적인 등장으로 가요계는 변화를 거듭했는데 80년대 유로댄스스타일 가수들이 90년대 힙합댄스스타일 가수들로 세대교체하던 시대였으며 또한 이당시에는 Star TV와 M TV의 등장으로 90년대 초는 한해가 바뀔 수록 음악도 패션도 엄청나게 바뀌던 시대였습니다.  또한 문나이트출신댄서들이 연달아 가수로 데뷔하는데 박남정, 현진영, 양현석이 성공하고 박진영, 유영진, 듀스, 클론, 룰라, DJ DOC등이 활약하면서 90년대가요계에 큰 축을 형성하였습니다. 그리고 문나이트의 출신들로 이루러진 SM, YG, JYP의 기획사들이 3대기획사로 군림하면서 현 가요계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5. 이수만 힙합과 결별하다.




1991년 부산의 야외무대에서 현진영과 와와가 공연을 하는 도중에 갑자기 건장한 남자들이 무대 위로 뛰어올라 현진영을 무대 아래로 끌어내려버립니다.   이 모습을 지켜본 이현도와 김성재는 현진영의 모습에 큰 실망을 하였다고 합니다.  당시 현진영은 대미초혐의로 구속되었는데 SM기획이 경찰의 수사를 받아 최진열, 정해익등 SM의 임직원들이 큰 고초를 껶었으며 회사의 모든 활동이 정지되었고 와와의 활동마저 중단되고 맙니다.  그 후 최진열은 반도음반사의 유대영의 제의로 SM기획을 그만두고 서태지와 아이들의 매니저가 됩니다. SM의 대표이사였던 최진열은 몇년동안 SM기획에서 경영과 매니지먼트를 관리하는 총책임자라 인맥과 노하우가 상당했죠. 




SM의 대표이사들: 최진열 - 정해익 - 김경욱 - 김영민




이때 현진영의 무책임한 행동에 분노한 이현도는 그때부터 다른 기획사로 오디션을 보면서 가수로써 독립을 꿈꾸게 되며 나중에 가수가 된후 현진영을 디스합니다.  한편 자신의 1호 가수가 이대로 무너지는 것을 볼수없었던 이수만의 노력으로 현진영은 1년만에 출소를 합니다. 그후 부활을 꿈꾸던 현진영은 이탁과 함께 여러 곡을 공동작곡을 하였습니다.




1992년 4월에 서태지가 등장하면서 거대한 돌풍을 일으키자 이수만은 잊고 있던 현진영을 찾게되고 8월에 이수만은 현진영의 2집 앨범 "New Dance 2"를 발표합니다. 타이틀곡은 문나이트에서 친한 이탁이 만든 "흐린 기억 속에 그대"였는데 당시 현진영은 커다란 후드티와 한껏 내려 입은 청바지로 코디한 후 빨라진 음악에 맞춰 현란한 댄스를 선보입니다.  '흐린 기억 속의 그대'는 높은 완성도와 함께 굉장한 인기를 얻었으며 같은 앨범의 '너는 왜'는 '현진영 고 진영고'라는 후렴구와 랩도 좋은 반응을 얻었습니다.









또한 과소평가되었던 싱어로써의 자질을 "너는 왜"에서 여성 백댄서와 격렬한 권투춤을 추면서 현진영 Go 진영 Go를 하면서 라이브로 빠른 랩을 소화해내며 대단한 인기를 끌었죠. 이미 서태지와 아이들의 랩과 음악에 익숙한 대중들은 "흐린 기억 속의 그대"에도 커다란 지지를 보냈고, 현진영은 서태지와 아이들을 라이벌로 급부상합니다.  하지만 SM은 2집앨범이 유통사인 서라벌레코드의 부도로 인해 큰 손해를 입어버립니다. 







1993년 성공을 확신한 이수만은 현진영의 3집 "두근두근 쿵쿵"을 발표하였고 서태지와 아이들 2집과 현진영 3집이 정면대결을 펼칠 93년 가요계는 모두를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나 발표한지 일주일 만에 필로폰 투약 혐의로 현진영은 구속되었고 방송정지를 당합니다.  이때의 여파로 무려 40만장을 찍었던 현진영의 음반은 검찰에 압류되고 상품은 소각처리되어 SM은 큰 손실을 보게 되었고 월미도와 방배동의 까페를 매각하여 부도위기를 넘기게 됩니다. 그러나 소속 연예인인 한동준, 김광진, 신동엽, 김승현, 이홍렬이 회사에 미래가 없다고 여겨 떠나게 됩니다. 이수만은 사력을 다해 현진영을 띄웠으나 그때마다 대마초와 필로폰으로 무너졌으며 결국 최종적으로 서태지가 이수만과 힙합주도권 경쟁에 승리하게 됩니다.







 




 






6. 이현도 SM을 떠나면서 힙합을 완성하다.




1991년 현진영의 대마초사건이 터지면서 이현도는 자신의 가요활동이 끝장나게되자 현진영에 대한 분노와 갑작스러운 활동정지로 인한 좌절감으로 고통스러워하다가 이대로 댄서로서 끝날수없다고 마음먹게되면서 음악을 만들고 싶은 강렬한 열망에 붙타올라 신디사이저를 구입하여 곡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후 진로를 고민하기 시작한 김성재는 대학진학을 목표로 공부을 하기시작했고 이현도는 다시 문나이트에 다시 출입을 하면서 춤을 추게 됩니다. 이때 춤을 추면서 울분을 풀고 있는 이현도를  아는 지인이 안타까워하며 오디션을 권유합니다. 그래서 가수로 데뷔하기로  마음먹고 김성재와 함께 코어의 김광수에게 오디션을 보지만 퇴짜를 맞습니다.  미안해진 이현도의 지인은 다시 뮤즈기획을 소개하면서 들어갔으나 사무실이 없어 환경이 매우 열악하였으며 안무를 연습할 무용실이 없어 무용실을 빌려 연습했다고 합니다. 




 




시간이 지난후 현진영이 교도소를 출소합니다. 때마침 자신의 첫곡인 "너에게만"을 완성하여 현진영에게 들려주었는데 매우 좋다면서 곡을 달라고 하였죠. 이에 반신반의하며 이수만에게 들려주었는데 이곡을 극찬하면서 현진영의 "New Dance 2"의 앨범에 수록을 합니다. 이때 현진영이 와와를 다시 하자고 제안을 하지만 큰 자신감을 얻은 이현도는 거절합니다.  이현도와 김성재가 떠나면서 이수만은 2인조였던 와와를 다인원 백댄서팀으로 개편합니다(와와팀에 션, 김송, 김재현이 있었으며 션은 훗날에 지누션으로 데뷔).  그후 김성재는 한양대에 진학하였고 이현도는 실용음악과에 응시를 했으나 떨어지면서 더욱더 작곡활동에 매달립니다. 그러나 악기만으로는 편곡까지 완성한다는 게 무리여서 유대영의 작업실을 빌려 작곡을 하였죠.




마침내 앨범을 완성하여 듀스를 결성하고 93년 4월1일에 데뷔앨범인 '나를 돌아봐'를 발표합니다. 그러나 앨범을 발표한지 한달이 지나도 방송국에서 불러주지 않아 방송활동을 할수없는 절망적인 상황이였습니다. 그때 sbs의 PD가 듀스의 곡을 높게 사면서 sbs의 가요프로그램에 출연을 하게되면서 대중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으며 이후 듀스는 힙합계에 큰 족적을 남깁니다.




한편 구준엽은 이탁과 함께  탁이준이를 결성(1993년)하여 활동하다가 이탁이 마약문제로 수감되면서 실패를 합니다. 그후 구준엽은 강원래와 함께 프로듀서 김창환 사단에 들어가 클론이라는 댄스그룹을 결성(1996년)해 큰 성공을 합니다.  그러나 이탁은 출소한후에 현진영과  I.W.B.H를 결성(1997년)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당시 프로듀서 김창환이 이끄는 라인음향은 김건모, 신승훈, 노이즈, 박미경이 맹활약하며 90년대를 지배한 유명한 기획사였습니다.  이 시기의 발라드는 변진섭, 신승훈, 이승환, 윤상, 윤종신이 유명했습니다.  




듀스 - 나를 돌아봐







탁이준이 - 예감했던 이별





https://goo.gl/Tcesl8 클론 - 쿵따리 샤바라


http://goo.gl/dwsCAH IWBH - 뻗어봐


https://bit.ly/3i39mYv 노이즈 - [1993] 노이즈 - 너에게 원한 건




 




 






7. 이수만 힙합외에 여러가지 시도를 하다 - 김광진, 한동준, 유영진




이수만은 힙합외에 알앤비, 포크록, 발라드등 여러장르를 기획합니다. 이때 한동준과 김광진의 장점을 최대한 살린 1집앨범을 기획합니다. 특히 김광진은 작곡능력까지 있었죠. 김광진은 1991년 한동준에게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라는 곡을 줬고, 같은 해 김광진 본인도 1집 앨범을 발표합니다. 하지만 1993년에 현진영의 필로폰사건으로 회사가 부도위기에 몰리면서 김광진과 한동준은 회사에 미래가 없다고 여겨 그만두게 됩니다. 그후 김광진과 한동준은 명곡을 발표하며 뛰어난 뮤지션으로 거듭나게 됩니다. (김광진의 대표곡으로 편지, 마법의 성등이 있습니다.  한동준의 대표곡으로 사량의 서약이 있습니다.)




https://goo.gl/OCD12T   한동준 - 그대가 이 세상에 있는 것만으로


http://goo.gl/Kwt4XJ   윤하가 부른 한동준의 명곡 - 사량의 서약




1980년대 후반 춤을 추고자 서울로 올라온 유영진은 MBC 무용단에 합격하는데, 여기서 미애를 만나 문나이트와 인연을 맺게 되고 구준엽, 강원래와 친하게 됩니다.  얼마 후 SM기획의 댄스 페스티벌에서 유영진이 참가하였지만 탈락하고 구준엽·강원래가 우승하여 SM에 입사합니다.  그 후 군대에 입대을 하는데 이때 작곡, 연주 등을 독학을 합니다.




1992년 유영진은 군대제대후 가수가 되고자 여러 기획사에 여러 오디션을 봤지만 탈락의 고배를 거듭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유영진은 SM기획에 자신이 작곡한 음악 CD를 보냈습니다. 이때 이수만은 유영진에게 3일 정도 “곡이 더 있냐”고 물어보면서 유영진은 하루에 10곡씩 준비해 들려줍니다. 실력을 인정받은 유영진은 스스로 원해서 종신계약을 맺습니다. 1993년 1집에서는 한국 R&B 역사의 초기작이라 할 수 있는 ‘그대의 향기’가 나왔는데 유영진은 뮤직비디오에서 턴을 하기도 하였고, 1995년 2집에서는 댄스음악 ‘너의 착각’을 내놓는 등 R&B뮤지션과 댄서의 모습을 함께 보여줬습니다. 당시 그의 뒤에는 문희준과 강타가 춤을 췄죠.




https://bit.ly/3cR6MmY  유영진- 그대의 향기






1993년 하반기 현진영쇼크 이후 재기를 꿈꾸는 SM은 새로 오디션을 벌여 서연수와 임범준, 유한진을 발탁하면서 메이저라는 3인조 락밴드를 기획합니다.  성공을 확신한 이수만은 데뷔쇼케이스를 하였고 반응이 매우 좋았습니다. 그러나 방송국에서 이들이 선보인 파격적인 헤어스타일과 도발적의상에 제재를 가했고 단정하게 나오지 않으면 방송활동을 할수 없다고 통보를 하였습니다. 이수만이 사활을 걸고 그들을 설득해도 그들은 비굴하게 음악을 할수없다고 거절하였고 결국 공중분해가 되어버렸죠.  이때의 아쉬움으로 이수만은 훗날에 트랙스라는 락밴드를 기획하게 됩니다.  (서연수:메인보컬,프로듀싱; 임범준:백 보컬, 베이스; 유한진:드럼)




1994년 마지막으로 이수만은 2명의 재미교포로 이루어진  J&J라는 그룹을 선보입니다. 하지만 시장의 반응이 없어 처참하게 망하고 이 모든 기획들이 실패한 SM은 나락에 빠집니다. 결국 수석프로듀서인 홍종화는 SM을 떠나는데 유영진이 그의 자리를 맡게 됩니다




Early spring day (이른 봄날), 1994 - 메이저(Major) 서연수, 임범준, 유한진





http://goo.gl/uvhyK3  J&J 강준식, 김주현 - 미지수야 미지수.1994




 


남은건 유영진뿐.


이수만은 망해가는 회사를 일으켜 세우기 위해 고심하는데 결국 아이돌을 기획하기로 마음먹고 회사의 모든 역량을 쏟아붓기로 합니다.




공략해야 할 타겟은 10대들.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폭발하기 시작한 10대들의 문화소비 성향에 컨셉을 맞추어, 같은 또래라는 동질감, 그리고 순정만화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깔끔한 외모를 주무기로 한 댄스그룹을 결성한다는 계획이었습니다. 당시는 학원폭력이 심각해 ‘자녀 안심하고 학교보내기’ 운동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0대의 건전한 문화가 필요한 시기였죠. 우선 밝은 캐릭터의 멤버 5명을 선발하고, 학원폭력을 고발하는 ‘전사의 후예’를 타이틀로 1집을 제작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우혁, 토니안, 강타, 문희준, 이재원등을 연습생으로 캐스팅한 후 트레이닝을 했으며, 개인별로 외모에 특징을 주는 기법으로 멤버들이 서로가 서로의 단점을 보완하게 했습니다. 최종적으로 그룹 이름은 회의를 통해 H.O.T.(High-Five Of Teenagers: 10대들의 승리)로 결정됩니다. 




이수만이 이런 기획을 하게 된 계기는 1992년경에 뉴 키즈 온 더 블럭이 내한을 하면서 한국에 큰 파장을 일으킨게 주요 계기 중 하나였는데 이수만이 예전부터 기획에 참고하던 미국의 유명 프로듀서 모리스 스타가 기획한 그룹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모리스 스타는 당시 어린 소년을 찾아 수년간 트레이닝을 거친 후 데뷔시켰는데, 그것이 뉴 에디션과 뉴 키즈 온 더 블록 등으로 5인조 아이돌 그룹이였고 바비브라운이 뉴에디션출신입니다. 이수만이 바비브라운을 참고해서 현진영 와와를 발표한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죠. 




또한 이수만은 걸그룹을 프로듀싱하기위해 TLC와 체인징 페이시스를 벤치마킹합니다. 당시 정해익과 김경욱을 비롯한 모든 임직원들이 걸그룹결성을 반대했죠.  그 이유는 당시 1990년대 여러 걸그룹들이 출현했지만 거의 모두가 몇 개월 후에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흐름을 관찰해온 이수만은 기존의 걸그룹들이 외모만 중시한 채 춤과 음악등 실력에 치명적 결함이 있음을 간파합니다. 그래서 걸그룹에 프로라면 프로답게 최고가 되려는 끈기와 집념등의 정신력을 다음어주고 음악시정에서 통용될 만한 실력을 키운다면 시장에 통할수 있다고 SM의 임직원을 설득합니다.  그 후 유영진에게 걸그룹에 대한 프로듀싱을 전념시킵니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이수만이 기획하고 유영진이 작곡한 H.O.T와 S.E.S가 데뷔하게 되고 그야말로 빅히트를 터뜨리면서, 나락에 빠진 회사는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그후 1998년 신화, 1999년  플라이 투 더 스카이, 2000년 보아가 연속으로 히트하면서 아이돌기획사로 완전하게 탈바꿈을 하게 됩니다. 





http://goo.gl/vA9kwb     New Kids On The Block - Live In Seoul


http://goo.gl/FOTnV1      H.O.T.- 아이야




S.E.S. - Love







8. 정리 및 기타사항




여가수 데뷔년도비교
김완선(1986) - 장혜리(1986) - 이지연(1987) - 김희애(가수:1987, 모델:1982, 배우:1983) - 원준희(가수:1988, 배우:1986) - 양수경(1988) - 이상은(1988) - 세또래(1988) - 이소은(19988) - 안혜지 (1989) - 강수지(1990) - 박준희(1991) - 하수빈(가수:1992, 모델:1990) - S.E.S(1997)



가수들 데뷔년도비교
전영록(가수:1975, 배우:1973) - 소방차(1987) - 박남정과 친구들(1988) - 현진영과 와와(1990) - 나미와 붐붐(1990) - 서태지와 아이들(1992) - 철이와 미애(1992) - 듀스(1993) - 탁이준이(1993) - 클론(1996) - H.O.T(1996) - I.W.B.H (1997)

8090의 락밴드들
들국화, 블랙홀, 백두산, 부활, 시나위, 무한궤도, 015B, 넥스트, 서태지밴드

문나이트의 인맥
최진열, 박남정, 현진영, 이주노, 양현석, 유영진, 이탁, 박진영, 클론의 구준엽과 강원래, 듀스의 이현도와 김성재, R.ef의 박철우와 성대현, 신철과 미애, 룰라의 이상민과 신정환, DJ DOC의 이하늘과 김창렬, 지누와 션, 터보의 김정남, 영턱스클럽의 최승민

댄스가수의 그룹의 멤버에 관해서
박남정과 친구들: 박남정, 양현석, 이주노, 박철우, 김영완
현진영과 와와: 현진영, 1기 - 구준엽·강원래, 2기 - 이현도·김성재, 3기 - 션


서태지와 아이들: 서태지, 이주노, 양현석

SM의 초창기사람들
SM의 아티스트들: 현진영, 구준엽, 강원래, 이현도, 김성재, 이탁, 션, 김광진, 한동준, 유영진, 서연수, 임범준, 유한진, 강준식, 김주현
SM의 예능인: 이홍렬, 김승현, 신동엽, 박명수




sm의 대표이사들


1. 최진열(1988) - 이수만은 이태원 문나이트클럽의 DJ였던 최진열을 발탁


2. 정해익(입사:1989, 대표:1992) - 최진열이 강원도 우체국 집배원인 정해익을 발탁. 정해익은 현진영의 로드매니저로 일함


3. 김경욱(입사:1995, 대표:1998) - 김경욱은 이벤트기획사에서 알바을 하다가 300개의 이벤트사의 명단을 입수해 하루에 20군데씩 전화를 하다가 SM기획에 입사함



4. 김영민(입사:1999, 대표:2005) - 김영민은 SM재팬에서 입사한 뒤 일본에서 보아의 로드매니저로 일하다가 해외사업팀장으로 승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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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1/05 19:19
수정 아이콘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우던거친새퀴
11/11/05 19:19
수정 아이콘
박남정은 서태지와아이들 등장하면서 훅간건 아니죠.

동시기에 발매한 비에스친날들까진 성공했습니다.
Mithinza
11/11/05 19:22
수정 아이콘
흠... 원문 링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카랑카
11/11/05 19:26
수정 아이콘
사실 제가 작성한 글입니다. 이번에 다시 한번 수정했습니다.
봄바람
11/11/05 19:31
수정 아이콘
개소문 글은 어지간하면 링크 안하는게 좋습니다. 바이러스 온상입니다. 컴퓨터가 느린 이유가 있었지요.
카랑카
11/11/05 19:35
수정 아이콘
메모장으로 쓸데없는 코드는 전부 버리고 작성했습니다. 안심하고 읽으셔도 됩니다.
11/11/05 19:55
수정 아이콘
유영진의 그대의 향기는 개인적으로 충격이었고 너의 착각은 훗날 HOT의 음악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개인적으로 너의 착각 너무나 좋아했습니다.)
유영진 혼자서 톤을 여러번 바꿔가며 랩과 노래를 했지만 그룹이 소화하기에 좋은 노래였지 유영진 혼자서 소화하기엔 힘든 곡이라고 생각합니다.
스타바보
11/11/05 19:59
수정 아이콘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김광진 님의 동경소녀는 20003년인가 나온
솔로 4집 앨범 수록곡이라서요...
마법의 성, 여우야보다 훨씬 후에 발표한 곡이죠~
그리고 그 당시 동경소녀는 인기가 하나도 없었죠 ^^;
된장찌개
11/11/05 20:22
수정 아이콘
서태지와 현진영이 라이벌이라니.....
그 당시 서태지씨는 극강의 최강자(스타로치면 본좌)였고, 현진영은 그저 강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나마 서태지와 아이들과 어울리는건 듀스죠.
우던거친새퀴
11/11/05 20:37
수정 아이콘
당시엔 라이벌소리 들은적 있습니다.
그리고 듀스와 현진영비교해서 대중적인 인기도에서 현진영이 밀리진 않죠.
까놓고 듀스가 밀리언셀러를 찍어본적이 있나요? 가요차트 1위도 많이 해본팀도 아니고요.
차라리 대중적인기도에서 듀스보단 현진영이 위죠. 짧아서 문제지

제가봤을때 서태지와아이들의 라이벌은
음반판매량으로는 신승훈, 김건모
음악성으로는 신해철 혹은 넥스트
대중적인기로는 현진영입니다. (한순간이지만)

힙합음악의 선구자적인 위치때문에 듀스랑 비교가 되었던거지 사실 둘은 넘사벽이죠. 듀스가 했던 힙합은 이현도 본인이 제대로된건 아니었다고 말했을정도고요. 라이브도 거의 안했던게 듀스죠.
된장찌개
11/11/05 20:41
수정 아이콘
전 그래서 '그나마'라고 한겁니다.
그리고 잠깐이었던것을 그렇게 크게 평가 해주는것이 전 의아하네요. 보는 사람마다 다르겠죠.
우던거친새퀴
11/11/05 21:44
수정 아이콘
듀스가 정규앨범 3장이던가요? 현진영이나 듀스나 잠깐인건 마찬가지죠. 활동기간 합쳐봐야 1년6개월밖에 안되던데요.
현진영은 앨범 1장 1곡이라도 대중적인기로 비교대상의 위치까지 올라간적이 그래도 있긴있었습니다.
듀스는 그나마도 없었습니다.
당시의 현진영은 단기포스로는 남자솔로댄스가수로서 비나 유승준보다 높은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스타바보
11/11/05 20:47
수정 아이콘
듀스 앨범 중 리믹스 앨범이랑 3집 앨범은
무려 '명반' 소리 들어요~
물론 서태지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듀스가 그렇게 무시당할만 한 팀은 아니죠~
요새 랩한다는 가수들 중에 듀스 영향 받지않은
경우가 있을까요???
그리고 3집은 100만 장 넘긴 걸로 알고 있구요~
너무 듀스를 폄하하시는 것 같아 써봅니다~
절름발이이리
11/11/05 21:15
수정 아이콘
서태지와 아이들은 제대로 힙합의 영역에 있었다고 말하기 곤란한데 본문이 댄스와 힙합을 혼용해 사용해, 구도가 많이 뭉개져있네요. 그냥 랩만 들어가면 힙합이란 정도로 쓴게 아닌가 싶긴 한데.. 흠.
'아이돌'로써 서태지와 아이들에 라이벌 구도를 잡았던 건 현진영이 맞습니다. 듀스는 서태지와 아이들은 물론 현진영에 필적했다고 보기도 힘들지요.
우던거친새퀴
11/11/05 21:43
수정 아이콘
뭐 우리나라에서 장르를 따진다는건 좀 웃기긴 하죠.
보통대중가요에 종소리같은거 살짝섞어주면 캐롤이되고
일렉기타소리조금 넣고 보컬이 머리좀 흔들어주면 록이되는데요.
이승철씨같은 사람조차 오늘도난을 불렀기때문에 자신이 정통힙합을 한적이 있다고 지금까지도 말하고 다닐정돈데요.

제대로된이라는 말은 애매하지만 그래도 최소 컴백홈정도까진 되야 힙합이라고 부를 수 있지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카랑카
11/11/05 21:50
수정 아이콘
힙합이 제대로 구현된것은 김영삼이 집권하면서
전두환,노태우로 대표되는 군사정권이 끝난 시점이죠.
노태우정권하에서 힙합을 제대로 했다간 바로 방송정지을 당할수있었습니다.
현진영이 활동한 시기는 말그대로 태동기라고 하면 될겁니다. 본격적으로 힙합이 등장한건 김영삼이 집권하면서 부터이죠.
11/11/05 22:05
수정 아이콘
힙합이 한국에서 제대로 구현된것은 90년대후반 서태지와 아이들 4집부터입니다.
그리고 전문적으로 힙합만 한 가수는 드렁큰타이거가 처음이고요
그 이전은 힙합은 댄스음악에 부속품에 불과했고요
된장찌개
11/11/05 21:55
수정 아이콘
근데 송파SM시절 얘기에 박명수씨 얘기는 왜 안나올까요?
11/11/05 22:01
수정 아이콘
현진영씨는 '흐린기억속에그대' 앨범 포스는 대단했죠
인기만으로 따진다면 서태지와 아이들에 필적 했습니다.
그러나 딱 그 앨범 하나죠 본문에 나와 있는 것처럼 필로폰으로 훅 갔죠

듀스는 한번도 서태지와 아이들에 필적했던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그러나 90년대초반 그 당시 댄스가수들은 특히 그룹중에서 수명이 1년을 넘지 못했습니다.(서태지와 아이들도 4년밖에 못했죠)
그 상황에서 듀스는 댄스 가수로 3년이나 인기를 끌었습니다.
그리고 듀스가 댄스가수지만 힙합쪽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고
해체뒤에도 룰라, 유승준, 언타이틀 같은 당대 최고 인기를 끌었던 댄스가수들에게 큰영향을 미쳤죠

저는 개인적으로 이런면에서 서태지와 아이들의 라이벌을 굳이 꼽으라면 현진영보다 듀스를 뽑겠습니다.
현진영은 딱 한해만(한해도 아니죠 몇개월) 반짝했고 그가 남긴 유산은 전혀 없기때문이죠

그리고 예전에 제가 PGR에 글을 쓴적이 있는데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를 라이벌로 했다가 많은 사람들이 반발 했었죠.
그래서 느낀건데 웹상에서 서태지는 왠만해서 건들지 말자입니다.
카랑카
11/11/05 22:11
수정 아이콘
현진영과 서태지는
그당시시점에는 그시대에서 라이벌이라고 했습니다.

그당시 언론과 사람들이 서태지가 시대을 뒤흔들 뮤지션으로 성장할것을 예측할수 있었나요?
그시대에선 언론이 라이벌이라고 떠들었고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서 현진영은 그저 그런 댄스가수로 전략했고
서태지는 더욱더 폭발적으로 성장해서 당대최고의 뮤지션이 된거죠.
당시의 시점과 현재 시점은 엄연히 다릅니다.
카랑카
11/11/05 22:20
수정 아이콘
시점을 구분합시다.
당시에 보는 시점과
현재에서 커리어까지 관찰할수 있는 시점은 엄연히 틀립니다.
11/11/05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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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에는 당연히 현진영이 라이벌이었죠 듀스는 당시에 비교도 안되죠 이후에 재평가받은거지
11/11/05 2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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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태지와 아이들 당시 라이벌은 이현우로 느껴지는 분은 안계신가요?
MBC에서 '난 알아요'로 십몇주간 1위를 유지할때, 항상 상대는 거의 이현우였던걸로 기억하거든요. 크크
개인적으로 현진영은 환상속의 그대가 내리막길일때 등장해서 1위를 차지해서, 라이벌이라기보다는 그냥 바통터치한 느낌이 강했네요.
그리고 이후 서태지와 아이들 앨범이 나올때 이현우처럼 초장기간 1위후보에 계속 같이 올라왔던 타 가수는 없던것 같았구요.

다들 라이벌 얘기하시길래 추억이 생각나서 한번 써봤습니다~
된장찌개
11/11/05 2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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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벌은 지석진씨......
Go_TheMarine
11/11/05 23: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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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합니다.
난알아요로 17주연속 1위하고 환상속의 그대로 활동 중이었던 때 현진영씨가 치고
올라온걸로 기억합니다..
전 흐린기억속의 그대가 인기있던게 겨울로 알고 있었는데 여름에 앨범발표 했네요;;;
만약 겨울에 활동한게 맞다면, 서태지와 아이들 활동중단한 시기에 치고 올라온것 같네요.

그리고 이현우씨 말고도 초장기간 1위후보였던 가수는 타타타의 김국환씨와 흥보가 기가막혀의 육각수가 떠오릅니다.
abstracteller
11/11/05 2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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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담인데 이번에 UV가 발매한 디지털싱글 문나이트는 정말 잘 올드스쿨 힙합이 제대로 녹아든 노래인 것 같습니다.
랩도 본토 올드스쿨 느낌이 물씬나고요.(진짜 본토랑 비슷한...) 거기다가 세련된 토크박스 이용과 아르헨도 랩은 중박이상 해줬습니다.
UV는 천재인 것 같네요.
11/11/05 2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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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의 스토리를 대부분 알고 있다는 점에 스스로 놀랐습니다.
현진영, 구준엽, 강원래 등이 고등학교 직계 후배넘들이고 워낙 노는 것도 좋아해서 겹치는 영역들이 많았었던 기억이 나네요.
마지막에 언급된 메이저의 노래 중 '이른 아침'이라는 곡 즐겨 들었고 메이저는 정말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청년들이었죠.
우던거친새퀴
11/11/06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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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서태지가 난알아요를 부를때인지 환상속의 그대를 부를때인지 모르지만
노사연의 만남인지 김수희의 애모인지 하여튼 1위후보로 붙어서 진적도 있다고 알고있습니다.
네오크로우
11/11/06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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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흐... 이건 뭐 딱 봐도 그때 방송장면들이 휙휙 지나가네요~ 한창 혈기왕성한 고등학생시절이었으니..

춤도 그렇고 노래도 그렇고 박남정씨의 비에 스친 날들 참 좋아했었는데 너무 못뜬 게 아쉽..;;
잉명성
11/11/06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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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잘 봤습니다.
스터너
11/11/06 00:43
수정 아이콘
제가 80년생인데 그러니까 92년도에서 93년도초중까지는 현진영포스도 엄청났었습니다.
오히려 서태지테이프는 없었어도 현진영이 유행시킨 후드티와 춤은 곧잘 따라했었죠.
후속앨범의 히트 문제였지 그 짧은 1년정도는 우열을 가리기 힘들정도 아니였나요?
아무로나미에
11/11/06 01:45
수정 아이콘
저도 80년생인데 1991년 5학년때 수학여행에서 14개 반중 7반이 현진영의 슬픈마네킹을 장기자랑했고 6학년 1학기에는 모두가 난알아요 2학기에는 거의 대부분 흐린기억속의 그대였습니다. 그시절의 우리들은 서태지가 지금만큼의 거물이라는 느낌보다 신인가수 중 우리의 느낌을 가장잘알아준 가수였습니다. 현진영이 어찌보면 댄스 그룹의 포문을 열었기 때문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더 수월하게 받아들여진 것도 사실이고, 1992년 당시에는 라이벌 구도이기도했습니다. 게다가 토크쇼를 하던 이수만의 전폭적인 지원도 있었죠(그때 이름은 기억안나지마,이수만이 진해하던 10대 위주의 버라이어티의 주제곡도 현진영곡이었고, 캐릭터도 후드티입은 그래픽이었으니까요) 1992년 당시에는 라이벌이 맞지요. 하지만 결국 서태지의 신화는 1993년 하여가부터 시작된거니까요. 앨범판매량이나 잠적하고 압도적인 인기나 말이죠. 그 뒤로 현진영은 훅갔고요.
우던거친새퀴
11/11/06 02:20
수정 아이콘
솔직히 서태지는 모르겠지만
현진영이 마약사건없었고 자기관리 잘했더라면(뭐 의미없는 가정입니다만)
유승준이나 비보다는 훨씬 높은 평가를 받았을거라 생각합니다.
11/11/06 02:51
수정 아이콘
이런저런 연예사가 있었군요. 재밌네요 잘 봤습니다.
애패는 엄마
11/11/06 03:45
수정 아이콘
다른 댓글에도 달려있듯이 박남정씨는 서태지의 아이들 열풍 등장과 함꼐 훅 간건 아니고
김광진씨의 동경소녀는 발매 당시에는 정말 인기가 없었으며 (전 앨범과 비교될 정도로)
윤상씨의 영입은 sm의 아티스트 색깔 강화라기보다는 프로듀싱 강화로 봐야죠. 강수지씨때부터 소위 아이돌 가수에게도 곡 주는 걸 즐겨했던 윤상씨이고 sm에서도 하는 역할이 그쪽이었으니깐요.
리리릭하
11/11/06 09:40
수정 아이콘
중간중간에 곡의 완성도와 대중적인 인기, 라이브 가능 여부와 곡마다의 춤 실력이 모두 혼재해서 나오니 헷갈리는 부분이 있군요.
그리고 90년에 데뷔해서 이미 커리어 정점을 찍었던 015B를 92년 데뷔의 서태지와 비교하는 것도 좀 이상하고, 015B의 경우 6집의 회사 독립전까지 대중 취햐을 철저히 파악하면서 큰 인기를 구가했던걸로 기억합니다만, 애초에 댄스음악이 주가 아니니, 경쟁자를 굳이 찾는다면 신승훈이나 김건모가 되겠지요. 넥스트도 93년에 데뷔하여 외종사촌인 서태지와 별로 부딪힐 일이 없었고, 댄스음악이 아니라 밴드에 기초한 락음악을 했으니 직접적인 비교는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메티스
11/11/06 12:18
수정 아이콘
현진영 같은 경우에는 서태지가 활동이 뜸했던 겨울즈음에 나와서 후드티에 격렬한 댄스로 서태지가 없는 틈을 현진영의 겨울로 만들어
놨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그 때는 참 대단했던걸로 기억합니다. 근데 한방에 훅가서 그렇지 단기 포스로는 굉장했지 않았나요?
지금도 노래방가면 분위기 띄우기 용으로 흐린기억속의 그대를 많이 부르곤 합니다. 정장 마이를 후드티로 만들어 입고서 말이죠... 잉?
카서스
11/11/06 13:17
수정 아이콘
김광진의 동경소녀가 그렇게 인기가 없었나요?;

하긴 노래방에서 저말고 다른사람이 부르는걸 본적이 없군요 (...)
카랑카
15/02/01 15:06
수정 아이콘
토토가를 기념하며 글을 모두 수정하고 재작성해서 리뉴얼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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