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 자유 주제로 사용할 수 있는 게시판입니다.
- 토론 게시판의 용도를 겸합니다.
Date 2010/10/20 07:50:01
Name 빵pro점쟁이
Subject [일반] 구두.2
구두.2 - 퀵턴하는 여성





내가 안 다니게 된 길이 하나 있다

지금은 물론 이사왔기 때문에 갈 일 조차 없지만
자주 다니던 길을 스스로 봉쇄해버려야 했던 슬픈 전설이다

양재천 둑방길 아래에 아파트며 오피스텔이며, 학교가 줄지어 나오는
왕복 2차선을 따라 난 좁은 뒷길이 하나 있는데

차들도 쌩쌩 안 달리고
학생들 하교 시간 아니면 비교적 한적한 편이고
가로수가 이어진 구간도 있어서 좋기도 한데다가
무엇보다 신호등이 없다는 점이 매력이라
성급하지만 조용하고 사람 섞이는 걸 싫어하면서 빠르게 걷는 내가
매우 애용하는 길이었다

하루는 조금 이른 저녁이었는데
겨울이라 그런지 꽤나 어둑어둑 했었고
가뜩이나 운이 없게도 난 그 길의
흔히들 우스개의 소재로 많이 이용되는 장소, 굴다리 밑을 딱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 만화나 소설 처럼 반대쪽에서는 옛 연인이..는 멍멍이뿔
그냥 사람 한명이 나타났다

일반 성인이 20여보만 걸어도 통과할 거리였지만
시력이 안 좋은 나로서는
옷차림이나 체형을 보아 그 사람이 젊은 여자일 거라 추측할 따름이었고
얼굴이나 그런 거 전혀 확인이 불가능했는데
아무튼 이 상태대로라면 굴다리 안에서 마주치게 될 판이었다

그리고 운이 좋았던 것인지 나빴던 것인지
반대편의 여성은 시력이 좋았던 것 같다

나를 인식하자마자 얼굴을 확인하는가 싶더니
바로 퀵턴(바이오 해저드 게임에서 방향을 180도 바꾸는 액션)을 구사해
좀비로부터 도망가는 질 발렌타인과도 같이
순식간에 오던 방향으로 사라져 버렸다

순간 난 정신이 멍해지는 걸 느끼고 제자리에서 멈추고 말았다

지금이야 워낙 비슷한 에피소드도 많이 알려졌고
유명 연예인의 발언도 있었고
여성분들이 목소리도 많이 내고 계셔서
무식한 나도 알고 있는 남자가 조심해야 할 밤길 사항이지만
당시엔 인터넷 인구도 많지 않던 시절이라
그저 계용묵 선생님의 수필만 읽어본 나로서는
이럴 수도 있다는 사실과 내가 직접 당했다는 실감이
꽤나 큰 갭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그 사건이 터진 무렵은 무려...
제대한지 1주일? 2주일도 안 되었을 쯤이다

길고 길었던 2년 2개월의 추억과 함께 위병소를 등지며
할 수 있다는 근거없는 무한 자신감으로 똘똘 뭉쳐
인생을 주물러 댈 준비를 하고 있던 게 바로 엊그제인데
그 날의 충격은 꽤나 컸고
당했던 패배감 역시 이루 다 설명 못할 지경이었다

그 여자의 퀵턴은
당시엔 나루토 유행어가 없던 시절이었지만

아마 난 안 될거야

딱 그 상태로 만들어버리는 놀라운 테크닉이었다

물론 반대쪽에서 오던 여성분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고
그 현명한 대처는 존경심마저 일 정도의 빠르기였다고 칭찬하고 싶다

허나

난 남자, 그 분은 여자인 것도 문제였고
그 시각에 딱 둘만 거기를 지난 것 또한 문제였고
내가 갓 전역한 빡빡머리 아저씨인 것도 문제였고
내 걸음이 일반인에 비해 유독 빨랐던 것마저 문제였지만

하필이면 또 내 인상이 참 더럽게 생겼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던 것 같다

컴컴한 어둠을 헤치고서 맹렬한 속도로 다가오는
야수와 같은 눈빛의 거친 인상의 사내(불행하게도 그게 나다)에게서
자기 방어는 무조건 필수라 생각하고
지금도 그 생각엔 변함이 없다

퀵턴 한방에 무너져버린 내 자신감을
보상받을 길이 없다는 것이 좀 슬프긴 하지만
여성분들의 무서운 밤 거리 제공에
예나 지금이나, 앞으로도 내가 일조하고 있다는 사실이
한없이 미안할 따름이다


===============================================
혹시라도 이후에 어두운 밤길에서 저를 만날
젊은 여성뿐만 아닌 모든 분들을 위하여 글 남깁니다
"해치지 않아요"



---------------------------------------------------------------------------------------------------------
구두.1
구두.2
구두.3
구두.4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스푼 카스텔
10/10/20 08:48
수정 아이콘
밤길에 여자분이 앞에 있으면정말 난감하죠 앞지르려고 빨리 걸으면 여자분은 더 빨리 걷고... [m]
비소:D
10/10/20 09:39
수정 아이콘
위로의 말씀을 드리고 싶으나
저였어도 최소 지인한테 전화하거나 퀵턴할 상황인듯 ㅠㅠ
천마도사
10/10/20 11:55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추천
25896 [일반] 부산 캐치볼 모임 시간 및 장소 (확정안) [6] NeOmI3578 10/10/20 3578 0
25892 [일반] [야구] 광저우행 티켓 한 장은 없던 일이 될 것 같습니다 - 김태균선수 AG 출전예정 [10] 달덩이6292 10/10/20 6292 0
25891 [일반] 일본 자전거 일주중 ■ 히와사■ [5] Eva0103771 10/10/20 3771 0
25889 [일반] [야구] 트윈스의 오늘과 내일 ① 타격 [82] 설탕가루인형6634 10/10/20 6634 2
25888 [일반] 한국시리즈 가 끝났지만.. 어제 있었던 이해할수 없는 사건 [46] 알콜부이10082 10/10/20 10082 1
25887 [일반] 구두.2 [3] 빵pro점쟁이3719 10/10/20 3719 0
25886 [일반] [음악이야기] 오, 사랑 - 루시드 폴 [7] 체념토스4432 10/10/20 4432 0
25885 [일반] 레인보우의 신곡과 소녀시대의 댄스버전 뮤직비디오가 공개되었습니다. [14] 세우실6536 10/10/20 6536 0
25884 [일반] 아무거나 대충 들어보는 음악들 (1) 오래된 노래들 [5] Schizo4851 10/10/20 4851 0
25883 [일반] 2010 마구마구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10/19(화) 4차전 리뷰 [33] 멀면 벙커링4618 10/10/19 4618 0
25882 [일반] [야구] 광저우 1장의 추가 탑승 티켓이 생겼습니다. [148] Askesis7943 10/10/19 7943 0
25881 [일반] 옷 한벌 드랍.. #2 ㅡ Levi's Silver tab 청바지 드립니다~ (쪽지로 보내주셔야됩니다ㅠ) [153] Fiat Pax6140 10/10/19 6140 0
25879 [일반] [오피셜]웨인 루니 이적요청(번역)-퍼거슨 인터뷰중 눈물 흘리다. [116] 아우구스투스9043 10/10/19 9043 0
25878 [일반] 듀어든 씨의 이영표 선수에 관한 칼럼에 관한 제 생각 [28] 삭제됨5376 10/10/19 5376 0
25877 [일반] 2010 마구마구 프로야구 한국시리즈 4차전 불판 [480] EZrock11935 10/10/19 11935 0
25876 [일반] 리버풀 팬들이 질+힉을 욕하는 이유~ [15] 아우구스투스5999 10/10/19 5999 0
25875 [일반] 2010년 41주차(10/11~10/17) 박스오피스 순위 - 돌아온 박스오피스 [13] 마음을 잃다4946 10/10/19 4946 0
25874 [일반] 3월부터 공공장소 흡연시 과태료 10만원 + 금연성공기 [51] 삭제됨5179 10/10/19 5179 2
25872 [일반] 아오,,또 열받는 기사가 나왔네요.. [22] 부끄러운줄알7386 10/10/19 7386 0
25870 [일반] 월드시리즈에서 보고 싶은 꿈의 대결 뽑아보기 [16] 페가수스3912 10/10/19 3912 0
25869 [일반] 감사합니다. [7] SAI-MAX3600 10/10/19 3600 0
25868 [일반] 슈스케] 허각의 우승이 코앞에?? [32] 부끄러운줄알7333 10/10/19 7333 0
25867 [일반] 카드뮴 낙지는 중국산??? [7] 아우구스투스4305 10/10/19 4305 0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1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