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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0/09/18 01:21:33
Name nickyo
Subject [일반] 추억은 무엇일까.
24000원짜리 이어폰을 받았다. 아, 선물은 아니고 주문을 한 상품이 도착했다는 뜻이다. 냅다 노트북에 박고 음악을 틀어보았다. 아아 이거다. 고등학교 1학년때 57000원을 주고 샀던 이어폰과 똑같은 느낌의 이거. 그때의 유니트를 그대로 쓴 이어폰인 만큼 최근에 나온 쟁쟁한 것들보다야 성능이 뛰어나겠냐만은, 그래 이 음색. 고1시절에 들었던 몇몇 노래를 듣는 순간 떠오르는 교정이나 교복, 축구공이나 매점, 교실이나 책상 따위의 색깔을 한층 선명하게 해준다. 추억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을, 추억으로 만들어 주는것이다.


추억은 무엇일까.

서랍에 숨은 구닥다리 예전 핸드폰일지도.
펜꽂이에 꽂혀 먼지쌓여가는 몇년도 수능 기념 사인펜일지도
어린시절에 도장에서 주었던 옆차기 하는 금색 트로피일지도.
보내지 못한 누렇게 뜬 연애편지의 오글거림 일지도.


아쉽고, 아련하고, 무덤덤하고, 부끄럽고, 그럼에도 아직까지 색바래지 않은 기억들. 어쩌면 그런게 추억일까.
그렇지만 맘 한켠에 남겨져있는 색 바랜 기억들, 흑백과 세피아톤으로 버무려진 기억들. 어쩌면 그런것도 추억일까.


참 슬픈일도, 좋은일도 많았다. 아무렇지 않았던 것들도 커다랬고, 그렇게 커다랬던 것들도 온데간데 없다.

사람이 남길 수 있는게 무엇일까. 내가 살면서 가지고 갈 수 있는건 무엇일까.
잠들기 전에 그려본다. 지나오며 느꼈던 많은 아련한 것들에 대해서. 어설프고, 어줍잖고, 안타까웠던 날들에 대해서.
어리석고, 순진하고, 요령없던 그 날들에 대해서.


추억은 무엇일까.
아마도 그건
시간이 지나가며 남겨준 선물이 아닐까.

이제는 돌아오지 않는 매 순간의 삶을
언제든 꺼내어 볼 수 있게
시간이 지나가며 남겨준 선물일꺼야. 분명히.

후회에 대한 울음은
먼 훗날 추억에 대한 미소가 될거야.
너무 빨리 도망가는 시간은
그래도 선물 하나 남겨주고 가니까.


추억이 무엇인지 알 거 같아.
그건 쌉싸름하지만 참 아름다워.


그래도 말이지.
이 순간이 추억이 되는건 참 싫다아.
내가 추억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도
추억으로 만들어 버리는 시간이 얄밉다아.
돌아갈 수 없는 길을 걷는게 사람의 삶이지만서도
자꾸만 멈춰 서 있고 싶구나.


당신은 나를 기억해 줄까.
당신은 나를 추억해 줄까.

당신에게 시간이 주는 추억이라는 선물상자속에서
나는 어떤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까
그저 같이 일했던 나이 어렸던 학생으로 남을까.
귀찮게 굴었던 짜증나는 아이로 남을까.
그것도 아니면, 그냥 횡단보도를 스쳐지나가는 행인처럼
그렇게 옅게 스케치되어 남을까.

영화나 드라마 속 주인공들은 참 멋지고 완벽해서
누군가의 추억상자에서 제일 큰 방을 차지할텐데.

당신의 추억상자속에 나는 들어갈 수 있을까.
흐르는 강물처럼 흘러가는 시간속에서
당신은 나를 건져내어 줄까.

시계바늘은 돌아가고, 하얀 달력은 찢어지는데
나랑 당신의 거리는 언제나 책상 두개.
어차피 이런거라고 애써 위로해보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서러움에 눈물만 한없이 삼켜내어
다시 오지 않겠지요. 책상 둘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


언제부터 이런건지
나 혼자만 이런거지.
후회와 한숨은 쌓여만 가는데.
그래도 위로해보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시간을 잡을수만 있다면.
흐르고 변하는걸 어떡해. 하지만 이렇게 빨리 떠나가면
아직은 보내고 싶지 않은데. 이렇게 사라지는건 아닌거지. 붙잡아 보지만 물결같은 당신은 다시 돌아오지 않겠지요.

다시 오지 않겠지요. 책상 둘을 마주하고 있는 우리.


당신은 날 기억할까요.
당신은 날 추억해줄까요.

어떤 모습으로라도 좋으니까
당신의 추억상자 한켠에 내 방을 만들어 줘요.
이제는 시끄럽지 않게, 그곳에 홀로 앉아 조용히 웃음짓고 있을테니까.
창문 하나 없고 문짝도 하나 없더라도,
조용히 앉아서 언제든 웃고 있을테니까.


추억은 무엇일까요.
그건 시간이 준 선물이죠.
흐르는 시간에서 꺼내 말리면
영원히 가슴에 남을 그런 선물이죠.
살면서 한번씩 웃음짓고 울상짓게 할 수 있는
그런 게 추억이죠.
어쩔 수 없게 되어버린 것들에 대해
아쉬움에 웃음짓게 해주는
그런 선물이죠.

책상 두개의 거리가 땅과 하늘이 되어버릴때,
혹은 하늘과 하늘, 땅과 땅의 거리가 되어버릴때에,
우리가 가져갈 수 있는건 무엇일까요.
나는 당신을 추억상자속에 꼭 담아서 갈거같아요.
그러니 당신도 아주 옅어도 좋으니 한번쯤 기억에서 꺼내어 웃어주길바래요.
그것만으로도 난 추억이 될 수 있을거에요.

추억은 무엇일까요.
그건 시간이 준 선물이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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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otaiji
10/09/18 02:02
수정 아이콘
기억과 그리움이 합해진 것, 그게 추억인것 같습니다. 전 아직도 몇개의 기억을 추억으로 바꾸어놓고
그리워 하고있습니다.
그랜드
10/09/18 02:18
수정 아이콘
어떤 책에서 읽었던 구절이 떠오르네요.

"추억을 모두 기억할 수는 있지만, 기억을 모두 추억할 수는 없다..."
DavidVilla
10/09/18 02:38
수정 아이콘
단순 추억 이야기일 줄 알았는데, 역시 약간 다르군요. '당신'의 등장이 그렇게 느껴지게 합니다.

추억.. 제가 참 좋아하는 단어지요. 본문과는 상관없을지 모르지만, 그냥 일반적인 '추억'에 대해서 몇 자 적어보자면, 위에 첫 댓글 달아주신 seotaiji님의 닉네임만 보아도 무수히 많은 추억들이 떠오르네요.

하나. 저는 동네에서 가장 어린 아이였습니다. 국민학교에 막 입학해서 막내 생활이란 걸 시작했지요. 동네 형들은 6학년부터 3학년까지 정말 다양했지만 저는 막내라서 늘 따라다니며 배우는 입장이었죠. 응? 그런데 이게 서태지와 무슨 연관이 있느냐.. 어느 여름날이었습니다. 저는 그 형들을 따라 제법 먼 곳으로 이사간 어떤 형의 집에 놀러가는 길이었죠. 그 때 저희가 불렀던 노래가 서태지와아이들의 '우리들만의 추억'입니다. 이게 왜 아직도 기억나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늘 이 노래를 들을 때는 그 장면이 어렴풋이 떠오르곤 합니다. 드래곤볼 그림을 기가 막히게 똑같이 그리던 형, 반장을 밥먹듯 하던 형,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주먹과 달리기 부문에서 우월함을 과시하던 형 등.. 아~ 그립네요.

둘.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산 가요 테이프가 바로 서태지와아이들 4집입니다. 그 날은 주말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부모님이 저와 동생을 데리고 서울에 있는 초대형문고인 교보문고(지하였는데, 아마 맞겠죠? 그 날 지상에서는 닭장차들로 가득했어요. 대모중이었던 듯; 길거리에서 저녁 먹고 있던 전경들이 생각나요.)로 데려갔었죠. 물론 그 곳을 구경함과 동시에 책을 사려고 갔었지만 저의 미칠듯한 억지로 결국 서태지와아이들 4집도 장바구니에 담고 말았지요. 그렇게 그 테이프는 저와 함께 몇 년을 붙어 살았는지 모릅니다. 몹시 어렸던 동생 녀석이 뭣도 모르고 녹음 버튼을 눌러서 테이프 중간 중간에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이 들어있으며, 어떤 부분에서는 아버지의 호통까지 녹음되어 있는 나의 소중한 테이프.. 비록 낡고 늘어나서 버린지도 꽤 오래 되었지만 그 추억들은 결코 잊을 수 없겠지요.

셋. 중학교 2학년 때였을 겁니다. 어느 날 국사 선생님께서 수업이 끝날 때쯤에 숙제를 하나 내주시더군요. '다음 수업 전까지 인터넷에 들어가서 '서태지와아이들'의 '발해를꿈꾸며'라는 노래 한 번씩 듣고 올 수 있도록!'. 당시 저는 서태지를 좋아하면서도 그 노래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이 없었습니다. 들어는 봤지만 거의 모르는 수준이었다고 봐야겠지요. 하지만 국사 선생님의 이 말 한 마디에 이 곡은 제게 최고의 곡으로 급부상해버렸습니다. '울트라맨이야'와 '인터넷전쟁', '대경성'에 미쳐있던 때에 '발해를꿈꾸며'라는 옛(?)곡을 역사적 인식과 함께 새롭게 듣게 된 건 정말 너무나도 감사한 일입니다. 이 노래를 들을 때마다 국사 선생님의 모습이 떠오르네요. 지금도 몸 건강히 교단 잘 지키고 계시겠지요?

아.. 사실 관련된 추억들은 끝도 없지만, 지나치게 길게 나열하면 곤란하리라 생각하고 이쯤에서 그만 적겠습니다. 댓글 적기 위해서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황홀하기만 합니다..

끝으로 '추억'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제게 소중한 기억들을 떠올려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그리고 오늘 글은 약간 '시'의 느낌이 강한데, 제게는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와서 좋았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니, 잘 감상했어요.^^
캡틴 토마토
10/09/18 08:19
수정 아이콘
"당신"에 대한 기억을 미화시켜 추억하고 있는 한 사람으로
적잖게 공감되는 글이네요..^^"

추억은 시간이 남겨준 것은 맞지만 선물인지는 잘...
아, 하긴 선물이라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니 일리있는 말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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