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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봐도 좋은 양질의 글들을 모아놓는 게시판입니다.
Date 2011/07/05 23:54:56
Name madtree
Subject 서른둘 즈음에
"니 그거 아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를 들으며, 이젠 꽤 익숙한 자세로 핸들을 돌리던 친구가 말했다.

"김광석 죽었을때 서른 한두살 밖에 안됐었다드라."

"그럼 도대체 '서른 즈음에'는 언제 부른건대?"

"진짜 서른 즈음일때 부른거지."

그렇구나... 김광석은 우리나이로 꼭 서른셋에 죽었다.

어째서일까? 나는 줄곧 김광석이 서른이 훌쩍 넘어서 서른 즈음에를 불렀을 거라고 생각했다.

당연하지... 서른을 지나쳐왔으니까 진저리치며, 버둥거리며, 도망치고 벗어났으니까 그렇게 잘 알고 있었겠지. 서른에 관해서... 당연히 서른이 넘어서 불렀겠지.

서글프고 서러운 노래, 안타까워서 발을 구르게 했던 노래, 술잔을 기울이게 했던 노래.

그런데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빤히 보고있는 것처럼 청춘을, 세상을, 서른을 담담하고 따뜻하게 노래한 김광석은 지금의 나보다 어렸구나.

"기분이 이상하네. 우리가 나이를 많이 먹긴 엄청 많이 먹은거 같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광석이 마흔까지 살았다면, 마흔이 되어서 '서른 즈음에'를 들었다면 어쩌면 쑥스럽다거나 부끄럽다는 생각을 하진 않았을까?

내가 몇년 전의 내 일기를 볼때 그렇듯이...




"애엄마가 되면 다들 그런 유치한 노래를 다 잘부르게 되는거야?"

"나는 애기가 싫어. 그나마 니 딸이라서 이정도라도 이뻐해주는거야."

친구들은 모두 애기엄마가 되었다.

10년하고도 더 오래전 우리는 같은 옷을 입고 같은 공간에서 같은 생각을 하며 살고있었다.

하지만 이제 친구들은 내가 모르는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다.

뽀로로와 빼꼼과 토마스가 가득한 나라.

할 수 있다면, 대마왕에게 잡혀간 니나를 찾는 이상한 나라의 폴처럼 구하러 가고 싶다.

예방접종과 지능발달교재의 이름을 주문처럼 달달 외우면 구할 수 있을까?

니들이 살고 있는 나라는 너무 어려워.




"야 초 세개를 좀 깊이 박고 두개를 위로 빼봐 스물세살처럼 보이게..."

우리는 모두 생일이 6월이다.

초를 몇개 드릴지 묻는 빵집 종업원의 말에 쭈뼛거리며 서른두개를 달라고 말하고는 폭죽은 필요없다며 케익을 받아들고 돌아섰다.

폭죽 씩이나 터트릴 기분이 아니야.

"빨대처럼 초도 뽑아가게 해주면 좋겠어."

비맞은 중처럼 중얼중얼... 불만스러운 건 많아도 케익은 맛있다.

"나는 체육복 윗도리 밖으로 빼서 입고 싶었는데 엄마는 꼭 안으로 넣어서 배바지로 입혀가지고..."

어릴때 친구를 만났으니 어릴때 이야기를 한다.

"나는 리키마틴하고 주윤발은 느끼해도 용서가 된다고 생각해."

여자끼리 모였으니 남자얘기를 한다.

세상에서 제일 시시한 대화들을 늘어놓으며 우리는, 우리의 서른둘을 자축했다.




"최대리 차샀다며?"

참견하기 좋아하는 사무장님이 이러쿵저러쿵 간섭을 한다.

"친구신랑한테 다 맡기고 저는 돈만 냈어요."

"그러면 되나 좀 따져보고..."

무한대로 확장하려는 사무장님의 오지랖을 단칼에 자르며 내가 말했다.

"제 친구는 총알이 빗발치는 전쟁터에서도 저 구하러 온댔어요. 그 친구신랑이니까 다 믿고 맡겨도 되요."

정말 그랬다.

어느날 친구는, 베트남전쟁에서 친구를 구하러 왔다 친구의 시신만 겨우 수습하고 자신도 죽게된 어느 병사의 이야기를 인용해 이런 친구가 되고 싶다는 메일을 보냈었다.

뜬금없이... 그래도 감동했다.

우리는 참 어리고, 착하고, 손발이 오그라들게 유치했다.

그리고 나를 구하러 오겠다는 그 친구는 얼마전 세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이번 정권에 그렇게 반대하더니 출산장려정책에만 이렇게까지 부응해주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

산후조리를 하는 친구의 얼굴을 보러갔다.

숙제도 세수도 식사도 안하시겠다는 초등학교 1학년 큰아드님과 항공기 이륙시 데시벨에 맞먹는 괴성을 지르며 내등에 올라타는 둘째따님, 그리고 이제 막 태어난 아기...

그래 여기가 전쟁터구나. 미안해 친구야. 나는 너를 구하러 오질 못했네.




서른둘이 되었다. 친구들은 모두 애기엄마가 되었다. 나는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나는 그저 서른둘이 되었다.

우리는 모두 서른둘이 되었다.

어른인가? 어른인가보다.

서른 즈음에를 듣는다.

스무살에 들었던 서른 즈음에와 서른이 되어 들었던 서른 즈음에와 지금 듣는 서른 즈음에는 모두 다르다.

"김광석은 왜 죽었을까?"

장국영은 왜 죽었을까와 더불어 수년째 나를 안타깝게 괴롭게 우울하게 하는 질문을 다시 떠올려본다.

답이 없는, 절대 내가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에 잠시 머리를 굴리다 그만둔다.

하지만 늘 JSA 최고의 대사는 송강호의 "광석이는 왤케 일찍 죽었네?" 라고 생각했다.

딱 내 맘 같아서...




아무것도 한게 없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았더니 어느새 서른둘이 되었다.

드라마처럼 근사한 남자가 무심한척 툴툴거리면서 나타나지도, 무슨무슨 기획실의 실장님이 되지도 않았다.

그래도 나쁘진 않다.

간신히 끄트머리를 잡고있는 청춘과 점점 더 멀어져가며,

즐거웠던 어제와 매일 이별하며,

나처럼 서른둘이 되어버린 친구들과

그냥 그렇게 살고 있다.

* OrBef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11-11-30 0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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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의 뿔
11/07/06 00:11
수정 아이콘
20살 때 노래마을의 "나이 서른에 우린"이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30살이 되면 뭘 하고 있을까?30이라는 나이가 오긴 오는건가' 이랬었는데
벌써 서른하고도 다섯해를 넘기고 있는 오늘이네요. 그런데 요즘 들어 희한한 것은 과거의 즐거웠던 기억은 점점 사라져가는 대신에 미래에 대한 걱정이 그 자리를 메꾸고 있다는 것이겠네요.
유재석과면상
11/07/06 00:12
수정 아이콘
와~글 재밌게 잘 쓰시네요.
사실 pgr에서 긴글은 잘 안 보는데 이번에는 순식간에 읽어버렸네요!!흐흐
가끔 글 써주세요~
fd테란
11/07/06 00:38
수정 아이콘
잘 읽고 갑니다.
저도 서른 둘 즈음에 별일없이 그냥 그렇게 소박하게 살고 싶네요.
읽으면서 꼭 라디오 나레이션 듣는것처럼 잔잔한 느낌이 있네요.
장기하와 얼굴들의 별일 없이 산다 신청합니다 아 이게 아닌가
정용현
11/07/06 00:50
수정 아이콘
이번에도 잘 읽었어요~
음 이 글을 읽으신 분들에게 작성자로 검색해서 모든 글을 다 읽어보시라고 꼭 추천해드리고 싶습니다.
11/07/06 00:58
수정 아이콘
반갑습니다. 저도 서른 둘입니다.
결혼은 꿈도 못꾸고 있고 친구들 애기가 하나였는지 둘이였는지도 이제는 모르겠습니다.
본문에 있는
"아무것도 한게 없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았더니 어느새 서른둘이 되었다.

드라마처럼 근사한 남자가 무심한척 툴툴거리면서 나타나지도, 무슨무슨 기획실의 실장님이 되지도 않았다."
라는 부분이 참 와닿네요.

"그래도 나쁘진 않다." 이부분은.. ㅠㅠ 전 나쁘던데요..

글 잘읽었습니다.
Who am I?
11/07/06 01:04
수정 아이콘
서른이 되면 되게 섭섭할줄 알았는데..그냥 한살한살 먹어가는 정도의 섭섭함만 있어서 조금 아쉽기도 하고..그렇네요.

남들처럼 잘살지 못한게 아쉽지는 않은데, 남들보다 덜 놀았던게 좀 아쉽습니다.
딱히 덜 논건 없긴 한데, 좀 덜 놀고 서른까지 왔다는 후회가 남네요. 으하하하.
11/07/06 01:09
수정 아이콘
아직 스물둘밖에 먹지않은 학생입니다. 서른 즈음이란 어떤 느낌일까요. 중학생 때 스물 즈음을 생각하는 것 과는 차원이 다른 느낌일 것 같네요. 무섭습니다. 서른이 다되어 간다는건...
개념은?
11/07/06 01:15
수정 아이콘
저도 이런 아무렇지도 않은... 지극히 평범한... 하지만 그 안에서 생각하게 되는... 그런글을 쓰고 싶어요ㅠ
제가 정말 좋아하는 따뜻한(?) 글이네요. 잘 보고 갑니다
쎌라비
11/07/06 01:17
수정 아이콘
잘 보고 갑니다. 저도 멀지 않았네요..
R U Happy ?
11/07/06 01:33
수정 아이콘
스물 갓 넘고 그 노래를 부르곤했었지요.
사춘기 여자애들이 난 스물까지만 살꺼야라고 종종 말하던 것처럼 .. 아무것도 모르면서 뭔가 아는양 ~ 크큭
그런데, 그 나이가 되도 아직도 잘 모르겠네요. 나는 별로 변하지 않았는데 ~ 세상은 어쩜 이리도 빠른지 !!
11/07/06 01:42
수정 아이콘
예전에는 이런류의 글을 보면 난 아직멀었지?이런생각을 했었는데... 이젠 진짜 몇년을 남지 않아서 그런지 참 요새 많이 갑갑해지네요..!!진짜 저는 고등학교때 정말 20살이 빨리되고싶다라는 생각을 많이 가졌었는데...이젠 나이가 먹어가는게 왜이렇게 갑갑한지 모르겠네요. 하지만 뭐 방법있나요?^^; 다시 힘내야죠!!^^ 글 잘봤습니다!!
데미캣
11/07/06 01:4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아직 스물 중반이지만.. 어느땐가 그런 생각을 했죠. 지금 내가 가진 감성과, 감정. 볼거리, 느낌들이 주류인 이러한 세상에서 살고 있지만.. 그러한 감정들과 느낌이 점차 과거의 것으로 밀려난다면.. 나는 과연 그런 서글픈 현실을 감당할 수 있을까.

80년대 특집을 할때 같이 티비를 보시던 어머니의 그 서글픈 표정, 티비를 바라보시던 그 서글픈 눈빛을 옆에서 조용히 지켜보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렇게, 지나간 이야기들과 추억들을 바라보며 쓸쓸해하던 당신의 모습들. 그 당시엔 그저 슬픔을 이해하려 노력했지만 어느샌가 노력이 필요하지 않을 정도로, 와닿기 시작하는군요. 나도 저런 나이가 되가는 구나..라는 생각이 들면 벌써부터 덜컥 겁이 나네요. 하루하루 세상의 중심에서 이탈해 나가는 느낌.. 아직 그렇게 많은 나이가 아닌데도 서른 즈음에의 가사가 벌써 와닿기 시작하는건.. 제가 너무나도 겁쟁이기 때문이겠죠.

밤에 참 많은 생각이 들게끔 만드는 글이네요. 추천 드립니다.
11/07/06 02:25
수정 아이콘
간만에 좋은 글 잘 봤습니다 ^ ^
roaddogg
11/07/06 02:26
수정 아이콘
동갑이시군요. 서른 둘 되어도 저같은 경우에는 별반 달라지는 건 없더랍니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찌질거리면서 어영부영 사는게 똑같죠. 서른이 별거던가. 잉여인생- 난 안될꺼야.
morncafe
11/07/06 02:28
수정 아이콘
노래 '서른 즈음에' 의 수필 버전이군요 :) 글 잘읽었습니다.
공방양민
11/07/06 07:27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글 종종 써주세요

요새 추게나 에게글이 너무 안나오는데 추천 한번 날려봅니다?
11/07/06 08:18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너섬매니아
11/07/06 08:42
수정 아이콘
고 김광석 님이 살아계셨더라면 또다른 느낌의 '마흔 즈음에'같은 노래도 부르지 않았을까요. 자유롭게 꿈꾸며 살던 청춘과 이별하는 것이 아쉽기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론 초보 아빠로, 남편으로서 그 때는 전혀 몰랐던 낯선 생활과의 새로운 만남이 즐거운 요즘입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m]
11/07/06 08:43
수정 아이콘
추천 합니다.
11/07/06 09:10
수정 아이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냥 지나보니 서른이 넘어 버린, 내가 뭘 했지 하는 생각도 드네요. 공감이 많이 갔습니다.
11/07/06 09:23
수정 아이콘
"옛날부터 계속 묻고 싶었는데, 왜 서른한 살짜리 여자하고만 결혼하죠? 일부러 노린 거 아니에요?"
"아, 그건 그래. 난 이제 막 서른을 넘긴 여자가 좋아.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나름대로 확고한 가치관도 가지고 있고, 그러면서도 새로 시작할 수 있고.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나이잖아."
"적당히 손질하면 몸도 아름다워지고요?"
-
야마모토 후미오의 <내 나이 서른하나>라는 단편집에 실려 있는 '서른한 살'이라는 단편의 한 구절입니다. 일본 나이로 서른하나면 우리 나이로 서른둘이나 서른셋이죠. 충분히 매력 있는 나이입니다.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니라 매력적인 서른둘의 나인 것이지요.^^


---
저는 외려 스물아홉 즈음에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흥얼거렸습니다. 막상 서른이 되고 나니 아무렇지 않더군요. 다만 내가 꿈꾸던 서른이 아니구나, 하는 현실만 느껴져서.


---
지금의 내 나이는 스물두 살
스물에다 둘을 더한 그런 나이죠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다운 그런 나이지만
때론 나도 모를 슬픔 밀려오지요

지금의 내 나이는 스물다섯 살
스물에다 다섯을 더한 그런 나이죠
사랑도 진실도 모두 이뤄질 것 같지만
세상 사는 일이 어디 그런 건가요

세월이 흘러서 하나 둘씩 꿈도 멀어지고
내 맘 더욱 비어만 가는데
세월이 흘러도 사랑의 상처는 깊어지고
난 다시 길을 떠나가네


지금의 내 나이는 스물아홉 살
스물에다 아홉을 더한 그런 나이죠
내 친구들은 사랑 먼 옛날의 얘기지만
아직 내 모습 사랑 찾는 내 모습

지금의 내 나이는 서른다섯
서른에다 다섯을 더한 그런 나이죠
예전 같으면은 예쁜 손자 볼 나이지만
잠 못 드는 이 밤 아직 쓰린 이 가슴

세월이 흐르면 모두 잊혀질 줄 알았지만
내게 아직 그리운 사람들
세월이 흐르면 내 모습도 함께 변하지만
난 다시 길을 걸어가네

ㅡ우리동네 사람들, '지금의 내 나이'

-
한때 서른이 되면 뭔가가 명확해질 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지요. 하지만 지금도 명확한 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뭐 어쩌나요. 길 위에 있는 사람들이니 그저 길을 걸어갈 뿐이지요.


---
누군가 "인생은 주관식인 것 같지만 선택지가 많은 객관식이다"라고 말하더군요. 그 말에 꽂혀서 계속 되뇌이고 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서른둘에 아이 셋 딸린 인생이 정답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아닐 수도 있겠지요. 한때는 아무것도 아닌 게 몸서리 치게 싫었는데, 지금은 아무것도 아니라서 다행이란 생각도 들어요. 요즘 세상 너무 유명한 것도 피곤하잖아요.^^;; 다만 아직 꿈꾸는 게 있으니 그를 향해 달려갈 뿐입니다.
켈로그김
11/07/06 10:55
수정 아이콘
서른 즈음에.
서른에 결혼을 했는데..
10월에 듣는 것과 12월에 듣는게 아주 다르더라고요..

나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나.. ㅠㅠ
하늘의왕자
11/07/06 16:40
수정 아이콘
아무것도 한게 없다. 그저 하루하루를 살았더니 어느새 서른둘이 되었다.

드라마처럼 근사한 남자가 무심한척 툴툴거리면서 나타나지도, 무슨무슨 기획실의 실장님이 되지도 않았다.


저는 서른 둘의 남자지만, 이 문구 참 와닿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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