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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5/31 18:54:18
Name 파우스트
Subject [일반] 500원 두 개의 용기.

 시내에서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지하철 역 바로 앞에서 불현듯 발걸음을 돌려 버스정류장으로 향한다.
딱 참아줄 수 있을 만큼의 햇살이 따사롭게 내리쬐고 있었기에 버스를 타고가면 차창 밖 오후의 풍경이 아름답게 보일 것 같았다.
401과 939를 보내고 나서 724를 기다린다. 이번엔 줄을 재빨리 서야지. 뛰어가서 자리를 차지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생각하던 그 중에 724는 벌써 와있었다. 아. 또 꼴지다. 줄을 기다리면서 공연히 주위를 휙 한 번 돌아본다.
버스가 승객들을 먹으면서 동시에 싸고 있다. 괜히 웃긴다.
올라타고 보니 내 자리는 남아있지 않았고, 나는 터덜터덜 중간으로 걸어간다.
그리고 이왕 서서 가는 김에, 정말 최선을 다해서 멋있게 손잡이를 잡아본다. 그 때 앞에서 누가 말한다.

 "아가씨 돈 안냈어요."

 기사님이 제일 앞 좌석에 앉은 아가씨를 보고 한 말 같았다. 대학생 같다.
아마도 이어폰을 꽂고있다가 잔액이 부족하다는 소리를 못 들은 것 같다. 잠깐, 금액이 안 뜨는데 그걸 못 봤을까?
단말기에 카드찍기는 항상 바쁘게 지나가니 못 볼 수도 있지. 나도 아까 잔액이 500원 남은 걸 겨우 확인했잖아.
여자는 가방과 지갑을 뒤지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난처해한다.

 "다음에 내릴게요."

 다같이 난처해지는 순간이다. 여자는 내 옆에 와서 벨을 누른다. 쪽팔려하는 것 같다.
근데, 예쁘다. 하얀피부와 중간 정도 길이의 머리가 잘 어울린다. 도와주고 싶다. 아?
못 도와준다. 내 카드에도 돈 없잖아. 나는 나를 책망한다. 돈 좀 넣어놓지 그랬냐.
아니, 아니다. 애초에 난 저 여자를 도와줘야할 이유가 없다. 왜 도와줘야하지?
남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라고 배워서? 네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크리스챤이라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냥 이건 오지랖이다. 저 사람이 예쁜 여자가 아니었더라도, 머리 벗겨진 아저씨였더라도 나는 도와줬을까?
그래. 그냥 예뻐서 그런거다. 밝히기는.

 나는 마음과 함께 가방을 고쳐맨다. 짤랑 소리가 들린다.
사이드 백을 뒤져보니 500원짜리 두개가 굴러다닌다. 줄까?
뭔 소릴 하는 거야. 대학생은 현금기준 1100원입니다. 멍청아.
아냐. 나이많은 사람이 보면 고등학생으로 볼 수도 있는데?
그래. 준다고 치자. 그래서 뭐하려고? 번호라도 받으려고? 너 저번에 기찻간에서 여학생한테 쪽지로 번호 줬는데 연락 안오고 까인 거 기억안나냐? 그리고 500원짜리 두개가 뭐야? 쿨하게 카드로 여기 한 명 더요, 도 아니고 지폐도 아니고 500원짜리 두개는 좀 아니잖아.

 논리충 이성이 한바탕 독설을 날리자 감성은 조금 움츠러든다. 역시 감성은 쫄보충이다.
통쾌하면서도, 약간은 이상한 기분이 든다.

 그리고 버스는 멈춘다. 여자는 내리고, 문이 닫힌다.
나는 멍하니 여자의 뒷 모습을 바라볼 뿐이다. 체념한 듯 주머니속의 500원 두개를 꺼내 본다.
들여다 보니 하나는 2001년이고 다른 하나는 2006년이다.
저 여자와 나는 2001년과 2006년에 각각 한 번씩 만난 적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지금처럼 그냥 지나쳐 버렸겠지. 나는 문득 다리가 저려오는걸 느낀다.
자리가 하나 있다. 아까 그 여자의 자리. 나는 잠깐 망설이다, 앉아버린다.

 창 밖은 내가 생각했던 대로 기분좋은 오후의 풍경이다. 햇살이 따뜻하게 내리쬔다.
손에 쥔 500원 동전 두 개를 가만히 비비어 본다. 인연은 삼세번이라고 어디선가 들었던 것 같은데,
이번이 정말 세번째일까? 나는 이어폰을 귀에 꽂고 버스의 덜컹거림을 느낀다.
그리고는 생각한다. 다음에 다시 그 여자를 볼 때까지, 이 500원 동전 두 개는 안 쓰고 가지고 있어야겠다고.
어쩌면 한 번 더 볼 수 있을 지도 모르잖아. GS25에도 가끔씩 3+1 행사를 하니까.
그리고 500원 동전 두 개를 주면서 말해야지. 

 그 때 그냥 주고 싶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니 다른 마음은 딱히 없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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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름발이이리
15/05/31 18:56
수정 아이콘
논리만 신경쓰면 중요한 걸 놓칠 수 있다니깐요.
파우스트
15/05/31 19:01
수정 아이콘
이리님의 이런 말씀은 항상 묘합니다.
강원스톼일
15/05/31 19:09
수정 아이콘
그냥 생각이 너무 많다가는 기회를 놓친다는말 아닌가요?
딱히 다른 묘한의미를 숨겨두신것깉진 않은데
파우스트
15/05/31 19:52
수정 아이콘
논리와 감성을 적절히 혼용하는 사람이 묘하다는 뜻이었습니다. 저는 그게 어려워서요..
Catheral Wolf
15/05/31 18:57
수정 아이콘
대구분이시군요
파우스트
15/05/31 19:54
수정 아이콘
대밍아웃 하기 싫었는데 있는 그대로의 상황을 적다보니 그만..
냉면과열무
15/05/31 19:10
수정 아이콘
그냥 타라는 버스기사분드 계시던데...
python3.x
15/05/31 21:37
수정 아이콘
제가 오늘 그렇게 버스를 탔죠ㅠㅠ
이름모를 기사아저씨 감사합니다.
인간흑인대머리남캐
15/05/31 19:15
수정 아이콘
container 가 아니라 courage 였구낭...
파우스트
15/05/31 19:50
수정 아이콘
제목학원 수간신청 해야할까요
15/05/31 19:53
수정 아이콘
수... 무슨 신청이요?
CoMbI CoLa
15/05/31 19:17
수정 아이콘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나오는 글 같은 느낌이네요.
다음번에는 100원짜리 1개도 준비하시길..
파우스트
15/05/31 19:50
수정 아이콘
집에와서 보니 가방안에 100원 더 있더라구요. sigh..
조리뽕
15/05/31 19:20
수정 아이콘
저라면 조용하게 '혹시 100원있으세요?' 했을 것 같네요. "아뇨" 하면 그냥 얼버무리고, "네" 하면 '여기 1000원이요' 짤랑짤랑
강원스톼일
15/05/31 19:34
수정 아이콘
근데 천원을 내주는거야 그렇다치고 그.다음은 어떡하죠?
'하핫 그쪽이 예뻐서 대신 내드린겁니다 찡긋!'
'어디까지 가세요? 뭐 버스비대신 내려서 커피한잔만 사주시죠'

뭐 어떤멘트를 해야 좋을지
조리뽕
15/05/31 19:44
수정 아이콘
아마 '감사합니다' 이러시겠죠? 그럼 그냥 '아 네^^' 이러고 마는 거죠. 뒤는 없습니다. 그냥 쿨하게 주고마는거죠. 돈은 그냥 편의점에서 캔커피 하나 사먹은 셈 치고, 마음은 뿌듯하고 ^^ (이런걸로 며칠 뿌듯해 하는 스타일이라 크크) 여기까지가 제 스타일이었고
뭔가 해볼 의사가 있다면 버스안에서 주고 받는 대화보단 (아마 버스에서 작업멘트 날리면 아무래도 보는 시선도 있고 불편x1000000 될 것 같네요) 쭉~ 가다가 내리시는 곳에서 자연스레 따라 내린 다음, 대화를 이어갈 것 같아요
(저도 이쪽에 볼일이 있었다는 둥, 그쪽이 맘에 들어 번호라도 받고 싶은 마음에 원래 내리려던 곳에서 몇 정거장이나 지나 왔다는 둥 하면서요)
파우스트
15/05/31 19:52
수정 아이콘
고수시네요! (그런데 저는 정말 다른 마음은 없었습니다..)
조리뽕
15/05/31 20:17
수정 아이콘
글을 너무 잘쓰셔서 저도 모르게 감정이입이 되네요.. 껄껄 그런데 사람일 혹시 모르니깐요 본문에도 나와있듯이 그 만남자체가 어쩌면.. 뭐 그런거죠
지나가다...
15/05/31 19:33
수정 아이콘
이거 보니 왠지 대학생 때 전철 역에서 어떤 여성이 굉장히 추워 보이기에 따뜻한 캔커피를 사서 드린 기억이 나네요.
물론 그게 끝이었습니다.
15/05/31 19:47
수정 아이콘
국민학생 버스 요금이 120원이던 시절에 50원짜리 두개 10원짜리 두개를 내고 버스에 탔는데
요금을 70원 밖에 내질 않았다며 화를 내는 버스 기사에게 50원짜리 두개를 냈다고 얘기를 해도(동전통에는 50원짜리가 여러개 있어 제가 몇개를
냈는지 입증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습니다.)
돈이 없으면 없다고 사실대로 말하고 탈 것이지 어디서 어린 게 벌써부터 거짓말이냐고 호통을 치는데
분명히 요금을 제대로 냈음에도 거짓말쟁이로 몰리는 당황스러움과 억울함에 입은 얼어붙고 눈앞이 깜깜해지더군요.
어떤 형뻘로 보이는 분이 묵묵히 100원을 동전통에 넣어줘서 그 상황은 무마됐지만..

웃긴 게 10여년 후에 다른 여자분께 비슷한 상황이 발생하고 있는 걸 버스에 탔다가 목격하게 됐습니다.
10년이 더 지났는데도 변하질 않는구나 하는 답답함에 그냥 천원짜리 한장 요금통에 넣어주고,
자기가 돈 때문에 이러는 게 아니라는 버스 기사에게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돈 때문에 그러는 거 같구만. 한마디 해줬던 기억이 나네요.
This-Plus
15/05/31 20:48
수정 아이콘
요금통이 꽉 차서 터져나갈지라도 기사분이 받은 급여는 차이가 없다는 걸 감안해보면
꼭 돈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닐 것 같은...
Jon Snow
15/05/31 20:26
수정 아이콘
저는 중학생 시내버스 340원 마을버스 300원 시절에
300원 내고 시내버스 탔다가 굉장히 무안을 당한 기억이 나네요.
문제는 100원짜리 맥주사탕을 입에 물고 있어서 더 혼났어요.
40원 덜 냈던 저도 잘못했지만 400원 내고 60원 거슬러 주지도 않으면서....
근데 집에서 학교가 겨우 3정거장 이어서 봐주나 했는데 2정거장 가서 내리라고 하더군요;
그땐 순순히 내렸는데 참 기사님 너무 했어요.
토다기
15/05/31 20:52
수정 아이콘
다년간의 경험으로 다시 만난다는 건 정말 드라마같은 일이죠. 아 물론 드라마 없었습니다.
낭만토스
15/05/31 20:53
수정 아이콘
갑자기 근래 화제가 되었던 버스길막녀가 생각나네요
갈색이야기
15/05/31 21:04
수정 아이콘
대구군요.
파우스트
15/05/31 21:05
수정 아이콘
님도 대구군요?
15/05/31 21:46
수정 아이콘
수성구(시지) 아니면 북구(칠곡) 사시는군요?
CGV 대구 아님 대구한일에서 보셨을것 같은데 크크크
파우스트
15/05/31 21:51
수정 아이콘
오잉...? 내 신상의 상태가!?
2막4장
15/06/01 00:29
수정 아이콘
너무 단서가 많아요 크크크
히로카나카지마
15/05/31 21:10
수정 아이콘
저를 속이면 안 되어요
파우스트
15/05/31 21:12
수정 아이콘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비토히데요시
15/05/31 21:37
수정 아이콘
결국 여자는 예뻐야되네요.
라이즈
15/05/31 21:39
수정 아이콘
202번은 항상 자리가 널널합니다.
오빠나추워
15/05/31 22:23
수정 아이콘
저라면 저한테 번호 주시면 제가 대신 찍어 드릴게요 했을듯 합니다.
이사무
15/06/01 11:29
수정 아이콘
다음에 내릴게요
오빠나추워
15/06/01 13:11
수정 아이콘
크크.. 뭐 그럼 인연이 아닌가 보다 하면서 제 외모를 탓해야겠죠...
영원한초보
15/06/01 00:28
수정 아이콘
3+1=여성분, 여성분 남자친구, 여성분 남자친구친구, 글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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