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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5/30 11:08:11
Name Andromath
Subject [일반] 8인의 반역자 (완결) - 페어칠드런
1부: https://ppt21.com../?b=8&n=57901
2부: https://ppt21.com../?b=8&n=57901

글을 마무리하기에 앞서...

원래는 페어차일드 창립자들이 되는 소위 '8인의 반역자'에 관한 이야기로 간단히 몇 자 정도로 적어 볼 요량이었는데, 좀 더 부연 설명을 더하려는 욕심에 이런저런 곁다리를 넣다보니 글이 많이 늘어졌네요. 거기에 가족 방문이다 업무다 하면서 시간이 많이 걸렸습니다. 사이트 분위기가 뒤숭숭하지만 몇 년 동안 지켜봐왔던 기억을 되돌아볼 때 결말은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1편과 2편이 윌리엄 쇼클리의 재능과 실패에 관련된 것에 집중했다면, 마지막편은 그의 제자뻘이 되는 로버트 노이스의 재능과 성공, 그리고 아쉬웠던 점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합니다. 기술적인 내용도 추가하였으니 참고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페어차일드

앞서 작성한 글에서, 스스로를 캘리포니아 그룹이라 지칭한 젊은이 8인이 윌리엄 쇼클리 - 그들을 미국 동부에서 서쪽 끝 캘리포니아에 세운 자기 회사까지 데려온 - 에게 집단으로 반기를 들었고, 결국 모두 그를 떠났다는 사실까지 말씀드렸습니다. 사태를 여기까지 내몬건 윌리엄 쇼클리의 그야말로 경악할만한 경영 능력과 당시 급발전하던 반도체 업계를 내다보지 못했던 그의 안목, 거기에 고집, 이 세 박자가 어우러진 결과였고요.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들의 반역은 페어차일드 모회사로부터 페어차일드 반도체 -이들의 신사업이 될- 에 대한 투자를 이미 약속받았기에 가능했습니다. 어찌되었든, 쇼클리는 이들 캘리포니아 그룹의 여덟명, 자세히 말하면 그들 중 일곱명 더하기 자신이 총애하던 로버트 노이스까지 자신을 떠나는 사실에 분개하면서 이들 배신자 여덟명은 어디에서도 성공할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습니다. 언론에서는 이들을 반역의 8인, 'traitorous eight'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결과는 물론 정반대가 되었습니다. 이들 캘리포니아 그룹이 세운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1960년 초에 반도체 분야의 공룡이 된 반면, 쇼클리의 쇼클리 반도체는 1961년부터 망조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결국 영원히 문을 닫습니다.

캘리포니아 그룹의 8인 중에서, 가장 주목해야할 인물은 로버트 노이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두번째 글에서 로버트 노이스의 학창 시절과 쇼클리 반도체에 입사하게된 계기까지 설명드렸습니다. 그 후 노이스는 쇼클리 반도체에서도 인망을 얻었고, 그토록 사람 못 믿는 쇼클리 본인도 노이스를 쇼클리 반도체의 R&D 책임자로 앉히는데 주저함이 없었으며, 많은 문제를 그와 상의하고 결정했습니다. 더군다나 노이스 본인이 학위 시절부터 연구해온 반도체 분야의 전문가이기도 했습니다. 다시 본 주제로 돌아와서, 윗 문단에서 제가 이들 여덟명을 지칭하기를 캘리포니아 그룹의 8인이라고는 했지만, 쇼클리 반도체를 떠나 새 사업을 하자는 계획을 최초로 세운 것은 로버트 노이스를 제외한 일곱명 뿐이었습니다. 그들의 신 사업을 서포트해줄 회사를 찾는데에 있어 뉴욕의 투자 회사의 도움을 받기로 결정한 것도 이들 7인이었습니다. 로버트 노이스 본인은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알고있긴 했습니다. 먼저 이들 7인으로부터의 회유가 있었지만, 노이스는 쇼클리의 신임을 받고 있었고, 쇼클리를 동경해 미국 서부까지 왔으며, 무엇보다 그는 쇼클리 반도체의 R&D 책임자였습니다. 그 때문인지 노이스는 최초에는 쇼클리를 떠나자는 7인의 의견에 반대를 표시합니다.

결국 노이스가 그들과 합류하게 된 것은 페어차일드로부터의 투자가 결정되기 직전이었습니다. 다른 일곱명의 설득도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왜일까요? 어찌보면 노이스는 본인도 괴팍스러운 쇼클리에 지쳐서 슬슬 다른 길을 찾아보고 있는 중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 간에 어떤 교감이 있었는지는 밝혀진 것이 없지만, 노이스는 다른 일곱명의 움직임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것도 아니었고, 어찌보면 막판에 숟가락만 얹었다고 볼 수도 있을까요? 스타트업에 있어서 막판에 누군가를 참가시킨다는 사실은 몇 가지가 전제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 그를 꼭 참여시키지 않을 수밖에 없을 이유
둘. 다른 공동 창업자들의 동의
셋. 투자자의 동의

첫번째와 두번째는 그의 쇼클리 반도체까지의 이력과 앞으로 설명드릴 노이스가 남긴 페어차일드에서의 업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보다도, 페어차일드 모회사부터 노이스가 이들 7인의 신사업에 '지도자로서' 참여하기를 원했습니다. 학창시절부터 유명했던 스포츠맨으로서, 페어차일드에서의 그의 위치와 능력 모두 노이스를 신사업의 수장으로 앉히는데 주저함이 없게 했습니다. 모양새는 좀 다르지만 미생에서 오차장이 김부련 부장 모셔오자고 할 때랑 비슷해 보이네요. 하지만 뒤늦게 합류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간의 잡음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이들 총 여덟명은 똑같이 주식을 나눠가졌고, 노이스 본인 부터가 직책상 위에 있긴 했지만 굳이 자기 자신의 위치에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노이스는 본인의 직책을 이용해서 꾸준히 페어차일드 모회사에 본인을 비롯한 공동창업자들에 대한 대우를 좋게 해줄 것을 요구했습니다. 그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는 이들간에 잡음이 나고 분열되고 납니다만, 좀 더 후의 이야기가 됩니다.




성공

캘리포니아 그룹이 페어차일드 반도체를 설립한 이후, 이들이 세운 목표는 한 가지, 실리콘 기반의 트랜지스터를 최대한 빨리 상업화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쇼클리 반도체에서는 절대 이룰 수 없었던 목표였습니다. 이들은 족쇄에서 풀려난 말처럼 급속도로 성과를 내면서,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설립한지 15개월이 채 안 되는 1958년 후반기부터는 수익을 내기 시작하는데 성공합니다. 페어차일드 모회사가 투자를 약속하면서 내건 한도인 18개월보다 훨씬 이전의 일이었습니다.

이들의 성공에는 복합적인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1950년대에는 트랜지스터를 판매할 시장이 형성되어가던 상황이었습니다. 전화가 보급되고 있던 시기였고, 라디오는 널리 쓰이고 있었습니다. 크기와 성능 모든 면에서 트랜지스터는 기존에 쓰이던 진공관을 능가하기 시작했고, 트랜지스터를 대량으로 생산하는 기술이 발전됨에 따라 가격도 점점 내려가면서 보급률도 점점 늘어납니다.

또한 이러한 성장의 이면에는 미국이 냉전 기간 동안 군수 산업에 투자한 천문학적인 돈이 있었음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당시 반도체 분야에서 가장 큰 돈 줄을 잡고 있었던 것은 군수 회사들과 이들과 계약한 미국 정부였습니다. 쇼클리도 원래는 벡맨 인스트루먼츠과 접촉하기 전 레이선 (Raytheon)과 먼저 트랜지스터 상업화에 관련된 사업을 시작하려 했었습니다, 비록 무산되기는 했지만요. 게다가 1957년 소련이 스푸트니크 1호를 쏘아올린 이른바 '스푸트니크 쇼크'는 미국을 어마어마하게 놀라게 했고, 이후 미국은 과학 기술 발전, 특히 군수 산업과 우주 개발에 더욱 더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점에서 페어차일드는 꽤 운이 좋은 시기에 설립이 되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트랜지스터도 꽤 고가의 물건이였고, 나중에 발명되는 집적 회로도 초기에는 엄청난 가격의 물건이었습니다 (초창기 컴퓨터의 가격 생각하시면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비록 이건 시스템 전체로 파는 물건이지만요). 이런걸 대량으로 발주해서 사줄 기관은 정부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보면 정부 주도의 투자와 그에 따른 군수 시장의 확대가 초기 미국 반도체 산업의 발전을 견인했다고 볼 수 있는데, 후에 가면 꼭 그게 전부 만은 아니게 됩니다. 기술의 발전과 기업들의 양적인 성장은 더욱 더 거대한 잠재력이 있던 민수 시장이라는 파이를 키웠습니다. 컴퓨터와 트랜지스터를 이용한 소형 가전들의 성능이 발전하면서 시장의 크기가 점점 더 커지게 되고요. 비록 1970년 중반부터는 미국 기업들이 일본 기업들에게 턱 밑까지 추격당합니다만...

마지막으로, 이들 우수한 인재들이 후에 실리콘 밸리가 되는 캘리포니아 구석에서 모이게 된 것이 결정적인 이유였다고 봅니다. 이들 여덟명은 어찌되었든 쇼클리 밑에서 어느 기간 훈련 받았고, 자신의 연구 성과 뿐만이 아니라 다른 반도체 연구 기관들, 예를 들면 벨 연구소나 TI에서 개발된 기술들을 빨리 습득하고 적용할 수 있을만한 지식도 있었고 의욕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반도체 산업이 세계적으로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이대로 쇼클리 밑에 남아있으면 안 된다는 위기 의식을 이들 8인들은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다시 원 주제로 돌아와서, 페어차일드가 처음에 집중했던 것은 트랜지스터들을 하나의 기판 위에 대량으로 생산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트랜지스터는 실리콘 기반의 diffusion transistor* - 혹은 메사 (mesa) 트랜지스터라고 불리는 것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보장된 성능 안에서 트랜지스터를 대량으로 싸게 만들어서 판매하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또한 로버트 노이스는 이러한 페어차일드의 사업 방향을 그들의 스폰서인 페어차일드 모회사에 제시하는데 있어, 트랜지스터를 싼 값에 생산함으로써, 트랜지스터를 고치는 대신 새로 구매하는 것이 경제적으로 이득이 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지금은 당연한 상식이지만 당시는 트랜지스터가 고가였기 때문에 노이스의 주장은 어느 정도 앞을 내다본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참고로 1958년에 상업화하기 시작한 페어차일드 메사 트랜지스터가 IBM에 판매될 때의 단가는 150불이었습니다. 여기서 캘리포니아 그룹이 쇼클리 반도체에서 받던 연봉이 1000~-2500불이었습니다 (이들의 페어차일드 반도체 설립 직후 연봉은 15000불 정도였습니다).

여기까지 설명드린대로, 초창기 사업의 방향은 하나의 실리콘 기판 위에 많은 트랜지스터를 만들고 이걸 잘라서 파는 것이었습니다. 1958년에는 페어차일드의 첫번째 메사 트랜지스터인 2N697을 상품화합니다. 그리고는 곧 이어 메사 트랜지스터의 단점이었던 안정성 문제를 planar process**라는 방법으로 해결한 planar transistor를 상품화합니다. 이건 본격적인 집적 회로와는 아직 거리가 있었습니다. 이건 발상의 문제일 뿐만 아니라 기술의 한계 때문이었습니다.

첫번째 이유는 트랜지스터를 대량으로 하나의 기판 위에 만드는 방법이었습니다. 트랜지스터를 하나의 기판 위에 생산하는 방식 자체는 1955년에 벨 연구소에서 이미 발명했는데 (photoengraving**), 문제는 만들어진 트랜지스터들의 성능이 시간이 갈 수록 저하된다는 점이었습니다. 이는 실리콘이 공기와 접촉하면서 변화하면서 생긴 문제였는데, 페어차일드는 앞서 말씀드린대로 캘리포니아 그룹 8인 중 한 명인 진 호에니가 발명한 planar process라는 기법으로 이 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있었습니다.


진 호에니 (Jean Hoerni)


다만 여기서 예상치 못한 일이 하나 있었는데, 이는 페어차일드의 엔지니어들이 아닌, 특허 담당 변호사였던 존 롤 (John Roll)이 회의 중에 던진 과제였습니다. 1958년, 호에니가 개발한 planar process를 특허화하고자 열린 회의에서, 변호사 롤은 새로이 개발된 기술 (planar process)을 응용해서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냐는 식의 물음을 던졌습니다. 노이스는 그 자리에서, 이 기술을 이용하면 하나의 웨이퍼 위에 트랜지스터 뿐만 아니라 기타 회로를 구성하는데 필요한 다른 부품들과 이들을 연결하는 와이어를 전부 형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아이디어를 냅니다. 그리고 아이디어를 낸 이상, 이 변호사가 낸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팀이 집중됩니다.

두번째 문제는 트랜지스터들을 하나의 기판에 구성하는 문제였습니다. 기존에는 트랜지스터들이 형성되면 그걸 그대로 하나씩 잘라서 팔았기 때문에 트랜지스터들 간 간섭의 문제를 고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기판 위에 트랜지스터들을 그대로 두고 회로를 형성하기 시작한 이상 이 문제를 해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간단히 설명드리면, 두 가지 형태의 트랜지스터인 p-n-p와 n-p-n이 인접해 있다면 이들 사이에 p-n-p -- n-p-n과 같은 의도치 않은 접합이 형성됩니다. 이 문제는 결국 직접 해결하지 못해서 외부에서 특허를 사오는 방향으로 해결합니다.

이를 토대로 1959년 초에 페어차일드는 실리콘 기반의 첫번째 집적 회로를 발명하는데 성공합니다. 그런데 1958년 TI의 잭 킬비 (Jack Kilby)가 비슷한 아이디어로부터 시작한, 게르마늄 기반으로 만든 '첫번째' 집적 회로를 발명합니다. 킬비는 이 공로로 2000년에 노벨상을 받습니다 (노이스는 1995년에 이미 사망했습니다). 킬비는 최초라는 관점에서, 노이스는 실용성이라는 측면에서 둘 다 집적 회로의 발명자로 인정을 받는 것 같습니다.


잭 킬비


최초의 집적회로


페어차일드의 집적 회로가 킬비의 집적 회로와 다른 점은, (1) 각 부품간을 연결하는 알루미늄 연결선이 기판에 집적 형성된 상태로 실리콘 산화물로 보호되고 있다는 점과 (킬비 집적 회로는 flying wire라고 해서 위 사진에서 보시는대로 트랜지스터간 연결선이 완벽하게 집적 회로의 일부인 형태로 되어있지는 않았고, 외부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2) 게르마늄 대신 실리콘을 기반으로 회로를 만들었다는 점이었습니다. 비록 시기상으로는 킬비가 좀 더 앞섰지만, 페어차일드의 작품이 좀 더 실용적이었습니다. 집적회로의 아이디어 자체는 거슬러 올라가면 어느 정도 역사가 된 것이라서 (W. A. Dummer, 1952) 시기가 겹친 것은 거의 우연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를 계기로 페어차일드와 TI는 5년 동안 지리한 소송전을 벌입니다. 해결이 된 것은 페어차일드와 TI가 이미 크로스 라이센스 계약을 맺어서, 더 이상 소송이 필요가 없게 된 시점이었습니다.

메사 트랜지스터와 planar 트랜지스터의 발명으로 페어차일드는 생겨난지 3년만인 1960년에는 직원 수만 만 명이 넘는 회사로 성장해있었습니다. 1960년부터는 집적회로의 발명을 토대로 실리콘 기반의 디지털 회로 칩을 판매하면서 페어차일드는 급성장하게 됩니다. 또한 1965년에는 아날로그 칩을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1960년도에는 페어차일드는 RTL (resistor-transistor logic; register-transfer-level이 아닙니다;) 및 DTL (diode-transistor logic) 기반의 칩들을 판매하면서, 후에 TI가 TTL (transistor-transistor logic) 기반 칩들을 내놓기 전까지 전성기를 누립니다.

또한 페어차일드는 이전까지 존재했던 동부의 회사들과는 다른 분위기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선, 노이스가 일전에 주장한대로 창업자들의 위치는 비교적 수평적이었습니다. 또한, 개개인의 구성원이 여러 단계를 거쳐 보고하는 기존의 시스템 대신에 노이스 본인이 직원들의 의견을 직접 듣고 평가하기를 좋아했습니다. 자유로운 복장 규정 또한 페어차일드의 산물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 노이스가 한 번은 회사에 반바지를 입고 온 것이 지금까지도 놀라웠던 일로 회자될 정도입니다. 또한 개개인의 구성원들에게 더 많은 혜택을 줄 것을 - 결국 실패했지만 - 요구했습니다. 그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노이스가 가졌던 천성 덕택도 있었겠지만 쇼클리의 경영 스타일이 가져왔던 쇼크 탓도 있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최대한 직원들과 친화적이고자 노력했던 그의 스타일이 초반에는 페어차일드를 키우는 원동력이 되었지만, 후술할 후의 생기는 큰 정치적 문제들을 해결하는데에는 장애물이 되고 맙니다.




분열

최근의 스타트업들에서도 자주 볼 수 있는 창업자들간의 분열도 여기서 볼 수 있습니다.

최초의 균열은 페어차일드 초기에 만들던 메사 트랜지스터에서 부터였습니다. 캘리포니아 그룹 중 고든 무어가 이끄던 팀은 트랜지스터의 한 종류인 p-n-p 트랜지스터를, 반면에 진 호에니가 이끌던 팀은 다른 종류인 n-p-n 트랜지스터를 개발했습니다. 이 두가지 트랜지스터들을 빠른 속도로 개발해서 상업화하는 것이 1958년 페어차일드의 목적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무어가 비교적 p-n-p 트랜지스터를 빠르게 개발하는데 성공한데 비해 호에니의 팀은 n-p-n 트랜지스터를 개발하는데 시간이 걸렸습니다. 사실 두가지 트랜지스터는 doping에 쓰이는 물질이라던가 기타 recipe가 다르기 때문에 어느 하나가 가능하다고 다른 하나가 쉽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무어는 호에니의 느린 실적이 페어차일드를 성장시키는데에 걸림돌이라고 비난했고, 호에니는 자신의 일이 올바르게 평가받지 못한다는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말씀드린 planar process를 만든 것은 진 호에니의 공적입니다. 사실 planar process가 없었다면 메사 트랜지스터의 안정성 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불가능했고, 실리콘 기반 집적 회로를 개발하는 것도 가능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무어는 이러한 호에니의 공적을 높게 평가하는데 부정적이었습니다. 이렇게 보니 무어가 분열의 핵심으로 보이네요. 하지만 문제는 노이스가 이들간의 분열을 잘 조율하지 못했다는 점에 있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친화적이었지만, 나쁘게 말하면 노이스는 많은 이러한 갈등에 있어서 단호하게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꺼렸습니다. 더군다나 공동 창업자들간의 문제였으니, 더더욱 그러했을지도 모릅니다.

가장 큰 분열의 계기는 모회사 페어차일드가, 1959년 페어차일드 반도체 창업자 8인의 주식을 일괄 매입하기로 결정한 점에 있습니다.
두번째글에서 간단히 설명드렸지만, 페어차일드 반도체가 생겨날 때 생긴 계약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하나. 캘리포니아 그룹 8인은 전체 1325주 가운데 800주, 즉 각각 100주씩을 가지고, 225주는 이들을 도와준 뉴욕의 투자회사인 Hayden, Stone & Co에, 300주는 남겨놓는 것으로 한다.
둘, 투자의 대가로 캘리포니아 그룹은 신 사업을 위한 138만 달러를 제공받는다.
셋, 캘리포니아 그룹 8인은 주식을 소유하고는 있으나, 의결권은 모회사인 페어차일드에 양도한다.
넷, 신 사업은 2년 안에 수익을 내었으면 하며, 모회사는 창업 후 3년 안에 캘리포니아 그룹의 주식을 300만달러에, 그 후 5년 안에는 500만달러에 일괄 구입할 수 있다. 그리고 주식 매입과 동시에, 신 사업은 모회사의 부서로 편입된다.

여기서 나빴던 조항은 3과 4입니다. 3은 이해할 수 있어도, 4 때문에 페어차일드의 창업자들은 그들의 업적에 대한 대우를 충분히 받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페어차일드 모회사가 바로 1959년, 페어차일드가 막 박차를 가하기 시작한 시점에 이들의 주식을 300만달러에 구입하고자 하였기 때문이었죠. 캘리포니아 그룹의 한 명인 제이 라스트는 이런 행동에 항의합니다. 이들의 신사업이 빛을 발하면서 주식이 오르기도 전에 모회사에 지정된 가격에 판매하는 것도 불만인데다가, 기껏 수익이 나려는 시점에 의욕을 꺾어버리는 행동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사실 1960년만 지나도 이들의 주식은 500만불에 양도되어야 했습니다. 페어차일드 모회사가 어찌보면 신사업이 싹수가 있는 사업이라는 것을 일찍 내다보고 행동을 일찍 옮긴거죠. 어쩌면요... 그런데 페어차일드 모회사는 라스트의 행동에 그를 배임과 횡령 혐의로 고소하는 것으로 보답합니다. 결국 이러한 어처구니 없는 대우에 라스트와 위에서 언급된 호에니는 회사를 떠나서, Teledyne이라는 회사의 지원아래 Amelco라는 회사를 새로 세웁니다. 이 과정에서 무어와 노이스는 별로 한 것이 없습니다. 노이스는 더군다나 신 사업의 수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요. 후에 다른 8인 중 2인인 유진 클라이너와 쉘든 로버트가 Amelco에 참여하면서, 캘리포니아 그룹은 정확이 둘로 쪼개지게 됩니다.

그 후의 페어차일드의 행적을 간단히 묘사하자면, 정점에 다다른 후의 끝없는 추락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페어차일드 반도체에서는 큰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운틴 뷰 (도시 이름입니다)에 위치한 생산팀과, 팔로 알토 (역시 도시 이름입니다)에 위치한 개발팀간의 갈등이었습니다. 우선, 생산팀은 개발팀이 요구한 성능치에 맞춰 생산하는 것이 벅참을 갈 수록 느꼈습니다. 그 이유는 현대의 반도체 미세 공정에도 중요한 방진 문제였습니다. 그 당시 연구자들은, 생산된 트랜지스터의 성능이 개개별로 오락가락한 이유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알고자 현미경을 들이대보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이상한 보라색 점 (purple plague) 뿐이었고, 스스로 자조하기를 무언가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는 있다는 식으로 설명했습니다. 하지만 이 문제는 여러분들도 짐작하듯이 단순히 불순물이 공정 중에 포함되면서 생기는, 어쩔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현재의 공정에서야 클린룸 안에서 먼지 하나 없는 상태로 반도체를 생산하면서 조절하는 문제이지만, 그 당시는 알 길이 없었던 문제였습니다. 반면에, 개발팀은 왜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노이스의 경영 스타일도 이런 갈등에 한 몫 했는데, 노이스는 기본적으로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이는데 적극적이었고, 개발팀에서 내놓는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경청했고 받아들였습니다. 하지만 이건 거꾸로 말하면 경영자로서 돈이 되는 몇 가지에 집중하지 못했다는 말도 되었습니다. 생산팀은 왜, 어째서 개발팀이 가져온 이런 쓰레기 같은 것들에 노력을 투자하면서, 제대로 노력도 인정받지 못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이러한 문제는 모두가 공감하고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이를 해결할 위치에 있던 노이스는 이를 제어하지 못하고, 왜려 이 문제를 자신의 부하 뻘인 찰리 스포크 (Charlie Sporck)에게 위임합니다. 스포크는 어느 정도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노력했으나, 결국에는 질려버려 당시 성장하고 있던, 역시 페어차일드 출신이 만든 내셔널 반도체 (National Semiconductor)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 후 노이스는 방향키를 잡는데 실패하고 맙니다.

경쟁사들의 발전과 치열한 스카우트도 이에 한 몫 했습니다. 페어차일드 반도체는, 쇼클리 반도체를 제외하면 실리콘 밸리에 세워진 회사다운 반도체 회사의 시발점이었습니다. 그 후 실리콘 밸리에 무수히 생긴 회사들은 페어차일드 출신이 세웠거나, 혹은 페어차일드에서 나온 사람들이 합류하면서 발전한 회사들이 대다수였고, 페어차일드와 거의 동일하거나 비슷한 문화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결국 엇비슷한 회사들 사이에서 우위를 누리는 길은 우수한 인력을 확보하는 것 뿐인데, 페어차일드 모회사는 이에 매우 인색했습니다. 페어차일드는 동종 업계에서 대우가 짠 회사로 소문이 나고 있었고, 페어차일드의 인력 유출은 심각했습니다. 노이스는 반도체 분야 책임자에서 페어차일드 전체 이사회에 포함될 정도로 승진했는데, 그가 할 수 있었던 일은 별로 없었습니다. 페어차일드 모회사가 무수한, 그리고 참으로 쓸모 없었던 회사들을 인수 합병하는 동안에, 페어차일드 반도체 부서에서 벌어온 돈은 전부 다 새어나갔고 (페어차일드 그룹 전체의 수익 중 70%가 반도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이를 해결하기위해 계속해서 벌어진 유상증자에서 페어차일드 반도체 부서는 이들이 벌어온 수익만큼의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결정적인 타격은 페어차일드의 경쟁사인 TI로부터였습니다. TI가 TTL 기반 집적 회로를 개발하고 상업화하면서, 페어차일드의 DTL 기반 집적회로는 점차 점유율이 떨어지게 되었습니다.

페어차일드 모회사는 점차 이러한 문제를 인식하게 되었지만, 꽤나 늦었습니다. 노이스는 페어차일드가 가진 총체적인 문제에 질리기 시작했고, 그가 가진 직위를 사임하고 개발 부서로 물러가거나, 아예 회사를 떠나기를 원했습니다. 이에 페어차일드의 경쟁사인 모토롤라 반도체 책임자 출신의 레스터 호건을 영입하고, 셔먼 페어차일드 본인도 여러가지 당근을 노이스에게 던져주면서 설득했지만, 노이스는 1968년에 페어차일드를 떠나게 됩니다.

페어차일드의 성장과 몰락을 보면, 이른바 '선택과 집중'과 선도 기술의 지속적인 개발, 그리고 임직원들에 대한 대우와 보상이 가장 중요함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초기에 페어차일드를 이끌었던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든 노이스의 스타일이, 후에 결정적인 정치적 결정을 단호하게 내리는데에는 장애물이 되었음은 흥미로운 점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페어칠드런

페어차일드 퇴사 후, 노이스는 다른 공동 창업자였던 무어와 함께 그들 이름의 첫자를 딴 이름의 N & M 반도체를 1968년에 설립합니다. 이들의 창업에 이미 오래전 퇴사한 캘리포니아 그룹의 6인은 해묵은 감정을 잊고 많은 지원을 해 줍니다. 그리고 노이스와 무어는 한 가지 제안을 받는데, 이들의 신 사업인 N & M이 빠르게 읽으면 No more (더 이상 없는)이라고 들린다는 문제가 있어 회사명을 변경하면 어떻겠냐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노이스는 기존에 존재하던 호텔 체인인 Intelco를 인수하여, co를 뗀 나머지 이름인 Intel을 회사명으로 정합니다. 인텔의 시작이었습니다. 노이스는 이 회사에서 1987년에 떠나, 반도체 기업들의 연합체인 Sematech를 설립하는데 큰 역할을 하고 여기 머무릅니다. 그리고 1990년 아침에 수영 중 심장마비로 사망합니다. 아마 2000년까지 살아있었다면 킬비와 함께 노벨상을 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인텔의 공동 창업자인 무어는 현재도 인텔에서 직함을 유지하고 생존 중입니다.

호에니는 분열 후 Amelco를 세웠다가, 모회사인 Teledyne과 갈등을 겪고 후에는 Intersil을 세웁니다. 반면 공동으로 창업한 라스트는 Teledyne에 계속 남아있다가 부사장까지 올라갑니다. 이들과 합류했던 로버츠는 학교 교단에 서는 길을 택했습니다.

남은 인물들 중 하나인 클라이너는 Kleiner, Perkins, Caufield & Byers라는 벤쳐 캐피탈을 세워서, 현재와 과거 실리콘 밸리에 위치한 무수한 회사, 아마존, 컴팩, 넷스케이프, 썬 등을 세우는데 공헌을 합니다.

그리니치는 두번째로 늦게 페어차일드를 나왔고, UC 버클리와 스탠포드에서 출강하다가, RFID 관련 사업을 시작했습니다.

마지막 인물인 블랭크는 페어차일드에 가장 마지막까지 남아있던 사람이었습니다. 블랭크는 퇴사 후 Xicor라는 회사를 세워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둡니다.

그 외에 캘리포니아 그룹이 아닌 페어차일드 출신이 세운 회사로 유명한 회사 중 하나는 제리 샌더스 (Jerry Sanders)가 세운 Advanced Micro Devices, 줄여서 AMD일 것입니다. 재미있는게, 현재는 표면상 경쟁회사라지만 AMD 설립 시 Intel의 공동 창업자인 노이스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는 점일 것입니다. 뭐 지금도 인텔은 AMD가 망하지 않게끔 하는 것이 큰 숙제이기는 하지만요...




마무리

종종 웹 상에서 실리콘 밸리 성립과 발전에 가장 큰 공이 있는 인물/기관이 누구인가에 대한 키배가 벌어지곤 합니다. 크게 셋으로 나누어보자면 1) Hewlett-Packard, 2) 페어차일드 반도체, 3) 스탠포드 대학으로 나뉘어서 토론을 하곤 합니다.

일단, HP는 실리콘 밸리에 과거와 현재도 존재하는 공룡 IT 기업들 중 제일 먼저 생겼고 (1937년), 개인 집 차고에서부터 시작했다는 상징성과 벤쳐 정신으로 많이 이야기되고들 합니다. 그리고 스탠포드 대학은, 우선 윌리엄 쇼클리를 데려온 프레데릭 터만의 일화처럼 실리콘 밸리 지역에 우수한 인력을 공급하는데 큰 역할을 했고, 작은 규모의 회사들을 키우는데 인큐베이터 역할을 했다는 점에 공이 있습니다. 반면에, 페어차일드는 실리콘 밸리를 비로소 '실리콘' 밸리로 불리게 하는데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페어차일드는 종종 실리콘 밸리에 실리콘을 가져온 회사로 불리곤 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어느 무엇이 더 공이 큰가를 떠나서, 각자의 역할이 있었다고 보는 쪽입니다.


글을 정리하면서 저도 공부가 많이 되었고, 쇼클리와 노이스 둘의 대조적인 리더쉽 차이를 보면서 느낀게 많았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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곧내려갈게요
15/05/30 11:09
수정 아이콘
읽기전에 댓글먼저 답니다.
기다리느라 눈 빠지는줄 알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연필깎이
15/05/31 02:02
수정 아이콘
잘 읽었습니다!
돌아보다
15/05/31 23:04
수정 아이콘
8인의 반역자 - 페어칠드런 연작, 정말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학부 회로 첫수업 시간에 교수님이 각종 반도체와 다이오드들을 나열하실 땐 뭐 저리 저렇게 잡다한지.. 교수님은 대체 저 이야기를 왜 하시는지.. 시큰둥 했었는데..
나중에 텍스트가 아닌 역사와 당시의 실험환경 등과 함께 보니 느낌이 새로웠던 기억이 나네요.

엔지니어로써 산업혁명~1970년까지는 신화적 이야기와 함께 무언가 낭만이 있었던거 같아 부럽기도 합니다.
Andromath
15/06/04 09:34
수정 아이콘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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