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금 전에 직접 겪은 일입니다.


저녁을 5시에 먹었더니 왠지 허전해서 라면을 생으로 먹으려 했더니
맥주나 콜라같은 상쾌한 것이 필요해서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집 밖을 나갔습니다.

3일 내내 연휴라서 머리도 안감고, 수염도 안밀고 꼬라지가 말이 아니어서
위 아래 네이비 색의 후드티를 뒤집어 쓰고 반바지와 슬리퍼 상태로 말이지요.

집 바로 앞에 편의점이 있었지만, 5~6분 정도만 걸어가면 훨씬 싸게 살 수 있는 슈퍼를 택했습니다.
슈퍼에서 콜라 1개를 사고, 맥주도 살까 고민하는데 한 여성이 들어오더군요.

그녀는 제가 사는 다가구 주택의 반지층에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같은 건물(?)에 사니 마주치면 목례 정도는 했지만, 서로 살갑게 인사하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아무래도 제 상태가 별로다보니 따로 인사는 하지 않게 되더군요.

맥주를 포기하고 콜라 1개를 들고가니 그녀가 간발의 차로 먼저 계산대에 섰습니다.
당연히 저는 바로 다음에 계산을 하고, 당연히 바로 그녀를 뒤따라 슈퍼를 나왔습니다.

슈퍼에서 집에 가는 길은 2가지 입니다. 골목길로 5분정도 가던가, 아니면 차도가 있는 쪽으로 8분정도 가던가...
당연히 그녀와 저는 골목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무슨 일이 생길지 예상하실겁니다.
밤 10시에, 그것도 연휴라 사람도 없는, 골목길을, 우연히 슈퍼에서 만난 남자가 뒤따라 오는 상황입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 볼만한 장면입니다. 그녀가 뒤를 힐끔 돌아보더니 걸음을 빨리합니다.
전 걸음이 빠른편이라 그녀가 뛰어서 가지 않는한 이 상황이 해결되지 않을겁니다.
짧은 순간에 머릿속에 여러가지 선택지가 생겨납니다.

1. 그녀를 앞질러서 빨리 뛰어간다.
2. 지금이라도 인사를 한다.
3. 잠시 기다렸다가 그녀가 가고 난 뒤에 따라간다.
4. 큰길로 돌아간다.

순간적인 판단으로 4번을 택했습니다.
큰길을 평소의 걸음속도로 빙 돌아서 집 앞의 아까의 골목길과 큰길이 교차하는 지점에 왔습니다.

하지만 왠걸... 그녀가 저보다 더 늦게 왔습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요.
순간 그녀의 표정이 확 굳으면서 저희 집이 아닌 다른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저도 너무 당황해서 인사나 사과는 생각도 못하고 발걸음을 옮기는데 뒤에서 목소리가 들립니다.
"어, 나야. 잘 들려? 어쩌구 저쩌구~~"

의도한건 아니지만 그녀에게 엄청 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아까 슈퍼에서 인사를 하지 않았던 것을 후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