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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대한 스포일러 있습니다.*
[리뷰] 매니(2014) - 파퀴아오, 그리고 팩맨을 말하다
필리핀의 복싱영웅, '팩맨' 매니 파퀴아오의 일대기를 그린 다큐영화
[매니]의 도입부는 그의 라이벌인 후안 마누엘 마르케스와의 4차전 경기로 시작된다. 난타전이 오가며 치열하게 전개되던 4차전 6라운드에서 1초 가량을 남기고 마르케스로부터 카운터 펀치를 허용하며 실신 KO패 당하는 파퀴아오의 충격적인 모습을 뒤로하며 패이드 아웃된 화면은 다음 장면에서 홀로 방안 침대에 앉아 생각에 잠긴 팩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직접 흘러나오는 그의 목소리를 통해 이렇게 자문한다.
["나는 왜 복싱을 할까?"]
["나는 왜 싸울까?"]
영화
[매니]는 이러한 파퀴아오의 자문에 대한 일종의 대답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팩은 어떻게 복싱을 하게 되었을까?
빈민가 소년에서 국민영웅까지
영화에서 보여지듯 필리핀 내전이 한창이던 1978년, 파퀴아오는 필리핀 제너럴 산토스시의 빈민가에서 태어난다. 그의 집은 야자나무와 코코넛 나뭇잎으로 지은 작은 오두막이었고 홀어머니 밑에서 형제자매들과 함께 자라났다. 치열했던 정부군과 반군의 내전의 한가운데서 어린 파퀴아오는 잔인한 전쟁의 참상과 가난의 고통을 직접 피부로 겪으며 그렇게 커나가게 된다. 가난한 환경 탓에 때때로 굶는 일도 적지 않았던 그 시절, 다섯 살 때부터 물고기 잡이 일을 도와 집에 필요한 양식과 돈을 벌기 시작한다. 학교에 갈 형편이 되지 않았던 그의 사정을 알고 있던 삼촌으로부터 복싱을 배우기 시작한 것이 그의 나이 열두 살. 어린 파퀴아오는 맨발로 조깅을 하며 그렇게 복싱이란 운동에 매진하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공원에서 열린 복싱대회에 처음으로 참가하여 승리하게 되는데, 그날 그가 받게 된 대전료는 100페소, 약 2달러정도였다고 한다.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고 싶었던 파퀴아오는 어머니 몰래 3일 동안 배를 타고 수도 마닐라로 밀항을 하게 된다. 고작 열세 살 때의 일이었다. 그러곤 어머니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다.
["엄마 저는 지금 마닐라에 있어요. 제가 마닐라에 가겠다고 했다면 엄마는 허락해주지 않으셨을 거예요. 죄송해요, 엄마. 여기서 돈을 벌게요. 그래야 우리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제 인내심은 저만을 위한 게 아니에요. 이건 우리 모두를 위한 거예요."]
그렇게 아무런 연고도 없이 복싱 체육관을 찾아가 링에서 먹고자며 매일 복싱에만 매달렸던 소년은 열여섯의 어린 나이에 프로로 데뷔하게 된다. 당시 프로 데뷔 나이가 열여덟 살로 제한이 되어있던 탓에 나이를 두 살이나 속이고 45kg에 불과했던 몸무게를 늘리기 위해 주머니 속에 무거운 물건들을 몰래 넣고 저울 위에 올랐다고 그는 회상했다. 그렇게 시작된 그의 본격적인 복싱인생은 말 그대로 파죽지세, 그리고 연전연승이었다. 소년 파퀴아오는 자신보다 체격과 덩치가 훌쩍 큰 상대 선수들을 압살하며 그렇게 아시아 복싱계를 평정해나가기 시작한다. 1997년, 데뷔 2년 만에 처음으로 OPBF(동양태평양) 챔피언 타이틀을 따낸 그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땀으로 범벅된 앳된 얼굴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이렇게 얘기한다.
["제너럴 산토스 시에 있는 친구들에게 인사하고 싶어요. 난 너희 모두가 잘 지내길 바라. 너희도 날 그리워하는 거 알아. 난 여기서 항상 이겼어. 너희가 지원해주고 기도해줘서 고마워. 내가 KO로 승리한 건 모두 너희 덕분이야. 날 지원해준 너희 모두에게 고마워. 특히 우리 엄마랑 제 여자친구 징키 자모라. 엄마, 아빠, 형제자매들, 제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저의 팬들 모두 절대 희망을 잃지 마세요."]
이렇게 말하며 슬쩍 웃음 짓던 어린 파퀴아오의 모습을 보며 개인적으로 내 마음도 함께 찡해졌다. 따지고 보면 그가 첫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하고 말했던 이 인터뷰의 내용이 그의 전체 복싱 인생을 관통하는 그의 신념과도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복서로서 전 세계적으로 성공한 후에도 자신의 고국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자국민들을 항상 걱정하고 응원했다. (실제로 그는 훗날인 2013년, 태풍 하이옌으로 고통 받는 고국의 이재민들을 위해 대전료 전액인 191억원을 기부하는 등 지금껏 파퀴아오 재단을 통한 자선 활동을 꾸준히 이어오고 있다.) 또한 경기에서 승리한 후에도 승리의 원동력을 자신 개인의 능력 보다는 주변 사람들의 도움과 하나님에게 돌리며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추곤 한다. 이것이 단순한 립서비스가 아닌, 동양타이틀을 획득한 저 어린 소년의 인터뷰에서 시작되어 그의 생애동안 변하지 않아 온 자신의 신념이자 진심임을, 그는 자신의 행동을 통해 삶 속에서 증명해가고 있다.
복싱계의 슈퍼스타 '팩맨'으로 거듭나다
어쨌든 그렇게 동양타이틀과 WBC 플라이급 세계챔피언 타이틀을 따낸 그는 5차 방어전에 성공한 후에 더 큰 무대에 오르기 위해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그리고 미국 LA 와일드카드 복싱클럽에서 조우하게 된 트레이너 '프레디 로치'와의 첫만남은 그의 복싱인생의 가장 큰 터닝 포인트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파퀴아오와의 첫만남에서 55kg의 왜소한 체구의 동양인 복서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로치 코치는 선수생활 후유증으로 앓게 된 파킨슨병과 싸워가며 파퀴아오의 전담 트레이너로서 그와의 남은 복싱 인생을 동반자로 함께하게 된다. 이렇듯 프레디 로치 코치와 함께 미국무대에서의 복싱 생활을 시작하게 된 파퀴아오는 특유의 저돌적면서 파이팅 넘치는 스타일과 빠르고 현란한 풋워크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복싱 스타일을 완성해가며 승승장구하게 된다.
특히나 그중 2008년 12월 6일에 치러진, 6체급 제패 챔피언이자 당시 복싱계의 스타 '골든보이' 오스카 델 라 호야와의 대결에서 많은 이들의 예상을 뒤집으며 체격 차를 극복하고 압도적인 경기력으로 승리를 따내게 된다. 작은 체구의 동양인 복서 매니 파퀴아오가 복싱계의 슈퍼스타로 거듭나는 순간이었고, 이른바 '팩맨'의 존재감과 위상이 전 세계 복싱계에 뚜렷이 새겨지는 순간이었다. 그후 리키 해튼, 미구엘 코토, 마가리토 등을 차례로 제압하며 복싱 역사상 전무후무한 8체급 석권이라는 전설적인 기록을 달성하기에 이른다. 이렇듯 세계 복싱계를 평정하며 고국인 필리핀에서 최고의 인기스타이자 국민영웅으로 등극한 그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당일 필리핀의 범죄율은 0%로 떨어지고 정부군과 반군의 전쟁까지 휴전을 하게 된다고 한다. 전쟁까지도 멈추게 만드는 힘, 필리핀에서 매니 파퀴아오는 그만큼 대단한 존재였다. 그리고 이러한 국민들의 성원에 부응이라도 하듯 2009년에 그는 필리핀 하원의원에 당선돼 국회의원으로 정치에 입문하기도 한다.
하지만 스포츠 선수의 성공가도에도 언제나 굴곡과 부침은 있는 법. 2012년 6월 브래들리와의 1차전에서 우세한 경기를 펼치고도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판정패를 당했고 그 해 12월에는 라이벌 마르케스와의 4차전에서 6라운드 종료 직전에 터진 마르케스의 라이트 스트레이트 한방에 충격의 실신 KO패를 당하게 된다. 영화는 이러한 그의 부침을 여과 없이, 담담하게 보여준다. 특히나 내게 인상 깊었던 것은 브래들리에게 판정패하며 WBO 웰터급 챔피언 밸트를 빼앗긴 직후, 안타까움에 슬퍼하던 주변인들을 향한 그의 한마디, "Dont be sad.(슬퍼하지 마십시오.)"였다. 가장 답답했을 장본인인 그는 경기 후 인터뷰를 통해 "심판의 판정을 존중한다."고 얘기했고, 부디 슬퍼하지 말라며 주변인들을 다독였다. 나는 이 모습에서 복싱스타 팩맨이 아닌, 파퀴아오라는 한 인간이 가진 그릇의 단면을 보는 듯 했다.
어린 시절의 그 왜소했던 꼬맹이 소년 파퀴아오가 가난을 이겨내기 위해 복싱에 매달렸다면, 지금의 파퀴아오는 부와 명예, 그리고 승리만을 위해 경기에 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이다. 어쩌면 복싱이란 스포츠를 통해 자신이 이룰 수 있는 모든 것을 이루고 정점에 선 이 사내가 이제와 이루고 지켜내고자 하는 가장 큰 목표는 자신의 커리어를 지켜내기 위한 화려한 승리도, 천문학적인 액수의 대전료도 아닌 '자신을 통해 피어나는 희망' 그 자체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복싱에만 매달렸던 어린 소년 파퀴아오가 첫 동양타이틀을 획득하고 인터뷰를 통해 했던 말, "제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저의 팬들 모두 절대 희망을 잃지 마세요". 이 말을 삼십대 중반의 파퀴아오는 잊지 않은 채로 똑같이 팬들에게 전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영웅 이전에, 복싱을 즐기는 천진난만한 소년
그런 의미에서 이 다큐영화의 마지막이, 브래들리와 마르케스전에서 2연패한 그가 2013년 보란 듯이 승리하며 챔피언 벨트를 탈환하는 순간이 아니라는 점은 다소 의외였으나 이내 곧 이해가 되었다. 영화에선 처음과 마찬가지인 수미쌍관의 구조로, 마르케스 전에서 충격의 실신 KO패를 당하는 그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주며 그 후의 그의 재기 행보는 간단한 자막으로 처리한다. 마치 그런 것들, 그러니까 경기에서의 승리만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건 아니라는 듯이 말이다. 결국 이 다큐의 첫머리와 마지막 머리에서 동시에 던져지는 질문, "나는 왜 복싱을 할까?", "나는 왜 싸울까?"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희망'이라는 단어로 귀결된다. 사실 아쉽게도 영화에서 제대로 조명되진 않지만 그 또한 개인적인 도박 문제, 여자 문제 등의 사생활로 구설수에 오른 과거의 행적들이 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자신의 과거 잘못들을 대중 앞에서 인정하고 과거의 여러 문제와 결별했음을, 그리고 자신을 아껴주는 많은 이들을 위해 다시금 복싱에 전력투구하고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결국 승리를 뛰어넘어, 자신의 존재를 통해 이 세상에 희망을 주고자하는 그의 소망이 지금의 그를 있게 만든 것은 아닐까. 여담이지만, 이 다큐에서 가장 나를 웃음 짓게 만들었던 장면은 오스카 델 라 호야와의 경기 승리 혹은 팩맨의 8체급 석권의 순간도 아닌, (마크 윌버그의 말처럼) 언제나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싱글벙글 웃으며 경기장에 입장하는 그의 모습이었다. 그 모습에서 '아 이 남자, 복싱을 진짜로 즐기는구나.'라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 순간만큼은 그는 위대한 복싱영웅도, 레전드 스타도 아닌, 단지 복싱을 사랑하는 천진난만한 한 소년에 불과했던 것. 결국 소년과도 같은 파퀴아오의 천진난만한 열정과 복싱을 향한 순수한 애정이 '승리와 패배 여부에 관계없이' 전 세계 많은 팬들이 지금도 그의 경기를 응원하게 만드는 밑바탕이 되어주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