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직도 첫 등교의 충격이 기억난다. 아이들은 모두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가방을 메고 같은 모자를... 쓰지는 않았다. 구시대의 유물로 교복 모자라는 게 있긴 했지만 실제 착용하는 경우는 못봤다. 교잠(교복 잠바) 같은 게 있었던 것 같은데 나름 이 부분은 허용해주었는지 떡볶이 코트 같은 걸 걸친 아이들도 많았다.
스쿨버스 역시 가공할 충격으로 다가왔다. 세상에. 집 앞까지 차가 와서 나와 동생을 데려가다니. 고양이버스를 처음 탄 메이, 그리핀을 처음 탄 해리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다.
2.
나는 국민/초등학교 이력이 좀 복잡한 편이었다. 입학은 안산의 어느 공단 근처에서 했고, 반년 만에 목포 시청 근처 어딘가로 전학갔다. 다시 반년 만에 구로공단 근처의 어느 국민학교로 전학와서 4학년 까지 마친 뒤 이번엔 서울 동북면 끝자락 면목동으로 이사가게 되었다.
이 때 무슨 이유에선지 부모님께서 용단을 내리셨던 것 같다. 더 좋은 교육 환경을 마련해주고 싶으셨으리라. 그곳은 꽤 낙후된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종대학교와 그리 멀지 않았고, 그래서 세종초등학교의 스쿨버스가 커버하는 범위 안에 있었다. 나도 내가 어떻게 거기로 전학갈 수 있었는지 의문인데, 어쨌든, 갔다. 공단출신 뜨내기 하나가 자제분들 사이에 툭 던져진 셈이다.
3.
아마 내가 [계급]의 존재를 처음 직감하게된 계기가 이 전학이 아니었나 싶다. 안산 시절의 놀거리는 기껏해야 작은 TV에서 해주는 봉숭아학당, 학교 앞 문방구에서 50원 내지 100원으로 즐길 수 있는 몇 가지 유흥이 전부였고, 목포 시절엔 놀이터 모래밭에서 조개껍데기를 골라내 조개싸움 (설명충: 두 조개를 비벼서 깨지는 쪽이 패배하는 게임. 일종의 딱지치기라고 보면 됨.)을 하거나 하는 게 고작이었다.
전학갔을 당시는 따조 열풍이 슬슬 불던 때였다. 어느날 귀가하려고 스쿨버스를 탔는데 버스 전체에 치토스 냄새가 진동하는 것 아닌가. 난 애들이 각자 치토스를 사먹나보다 했는데 그게 아니라, 한 친구가 따조 수집을 목표로 치토스 수십봉지를 사서 따조만 빼내고 나머지는 그냥 애들에게 돌려버린 것이었다.
그 친구는 과자에는 참으로 무심해보였다. 야릇한 흥을 띈 얼굴로 열심히 따조 포장지를 뜯어내서 품종(?)을 확인하고 수집통에 하나하나 채워넣을 뿐이었다. 수집통 자체도 내겐 충격이었는데, 그건 그냥 단순한 통이 아니라 엄연히 어느 업체에서 오직 따조 수집가들을 위해 만들어서 판매한 상품이란 걸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상품들, 치토스 수십봉지의 값 자체가 충격은 아니었다. 나도 어찌어찌하면 그만한 돈은 모을 수 있었다. 정말 놀라웠던 건 그 돈을 그렇게 [낭비]하고도 평정심(?)을 유지하는 그 친구의 무덤덤한 태도 그 자체였다. 그 친구의 무심함은 마치, [너는 이 정도 돈을 쓰려면 대단한 결심이 필요하겠지만 내게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해] 라고 말하고 있는 듯했다.
또 한번은 아침에 교실에 갔더니 누군가가 난생 처음보는 음식을 쭉 나눠주고 같이 먹은 적도 있었다. 고소하고 짭쫄한 풍미가 입에 착 감겼었는데, 나중에 알고보니 그게 [맥치킨]이었다. 어떤 학생이 자기 생일이라고 돌린 것이었다. 당시가 1995년 초였으니 사회 전체로 봐도 이례적인 일이었고, 개인적으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맥도날드가 뭔지는 커녕 햄버거가 뭔지도 모르던 때였으니까.
4.
왕따라는 걸 경험한 것도 이 때가 처음이었다. 세종초등학교는 고약한 것이, 각 학년이 겨우 두 개의 반으로 이루어진 작은 공동체였다는 것이다. 공동체의 규모가 워낙 작다보니 학년을 거듭할 때마다 학생들을 섞어준다고는 해도 기본적으로 1~2학년 때 맺은 교우관계, 사회망이 6학년 졸업 때까지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내가 전학갔던 게 5학년 때이니 나는 4년간 견고하게 다져진 기존 교우망을 뚫고 들어가야만 했는데, 물론 이는 지극히 어려운 일이었다.
부르디외는 한 사회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포커 게임으로 즐겨 비유했다. 각자는 이 게임의 규칙에 암묵적 동의를 한 상태로 게임에 참여하며, 이 규칙 자체는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게임에 필요한 다양한 종류의 칩들은 불공평하게 분배된 상태로 시작한다. 게임에서 규정한 [보상]을 획득하기 위해 다양한 플레이어들이 분투하지만, 애초에 적은 칩을 가지고 시작한 이들이 전세를 역전하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내 처지란 흡사 보잘것 없는 판돈을 들고 4년간 혹독한 대련을 거친 타짜들 사이에 휙 내던져진 초짜와 같았다. 나는 그들의 놀이에 흥을 더해줄 만한 게임기도 없었고, 따조도 없었고, 장난감도 없었고, 용돈도 없었다. 운동신경이 좋아서 축구시합 때마다 누가 찾아줄 것도 아니었고, 덩치가 좋아서 감히 접근하기 어려운 아우라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키가 앞에서 3번째인가 그랬을 거다). 아이들이 그걸 [의식]하지는 않았겠지만, 필경 한 눈에 초짜라는 걸 느꼈으리라. 나는 낄 곳이 없었다.
5.
그건 마치 몇 개의 거대 항성으로 이루어진 다항성 성계같았다. 그 항성들의 중력장에 이끌려들어간 행성들이 이리저리 공전했다. 나는 그 어느 중력장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먼 우주를 돌다 아주 간혹 항성 옆을 스쳐지나가는 혜성 같았다. 훗날 헤겔의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읽었을 때도, 베버의 카리스마에 대해 들었을 때도, 부르디외의 필드 이론을 들었을 때도, 그람시의 헤게모니에 대해 배웠을 때도, 심지어 과학동아에서 중력우물을 묘사한 그림을 보았을 때도, 늘 내가 세종초등학교 5학년 교실에서 마주했던 그 현실을 떠올렸다. 내가 겪었던 그 교실은 훗날 배울 그 모든 이론들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질 하나의 인류학/사회학 실험장이나 마찬가지였다.
6.
그곳 책상은 좌우에 가방 걸이가 있었다. 다들 그 고리에 가방을 걸어두었는데, 가방이 걸려있지 않고 그냥 바닥 위에 있을 경우 다들 달려들어서 그 가방을 신나게 걷어차는 게 [규칙] 이었다. 그런 규칙 같은 걸 알 리 없었던 내 가방은 몇 번 흠씬 걷어차였고, 나는 내 억울함을 풀 길이 없었다. 내가 씩씩거리는 게 재밌어보였는지 나중에는 멀쩡히 걸려있는 내 가방을 누가 슬그머니 빼서 바닥에 내려놓으면 기다렸다는 듯이 나머지 패거리가 달려와서 복도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드리블 돌파를 하곤 했다. 그건 규칙이 아니지 않냐고 따지는 건 무의미했다.
7.
가방 안의 물건들이 성하기 어려웠고, 그 때마다 나는 담임 선생님께 일렀다. 선생님은 나름 힘을 다해 조치를 취해주셨지만, 결국 내게 돌아온 건 고자질쟁이라는 조롱과 비아냥 뿐이었다.
8.
전학 초기에 내 연착륙을 도와주기 위해 투입됐던 한 친구는 대놓고 이젠 자기에게 말을 걸지 말라는 통보를 해왔다. 득이 될 게 없었으니, 당연한 조치였으리라. 그가 원망스럽진 않았다.
9.
몇몇은 나아가 세 살 어린 내 동생까지 괴롭혔다. 동생이 어느날 엄마에게 "언니들이 니가 누구누구 동생이라면서 괴롭혔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비참했다.
10.
두 놈이 가장 심했다. 임웅, 이태호. 비교적 우호적이었던 친구들은 그 이름도 얼굴도 거의 잊어버렸지만 저 둘은 또렷이 기억한다. 덩치도 작은 것들이 제일 악랄했다. 그러던 어느날, 학교 현관에서 실내화를 운동화로 갈아신으려던 참에 둘 중 하나가 뒤에서 달려와 내 신발을 빼앗아 발로 차며 또 드리블을 쳤다. 나는 폭발했다.
11.
맨발로 운동장을 가로질러 전속력으로 그놈을 쫓아갔는데, 그는 내가 신발이 없으면 운동장으로 못 올 줄 알았는지 적잖이 당황했던 것 같다. 그는 금방 따라잡혔고, 나는 사활을 걸고 태클을 걸어 그를 쓰러뜨렸다. 내가 어디서 그런 걸 배웠을 린 없고, 본능적으로 놈의 상반신에 올라타서 파운딩 펀치를 쳤다. 그도 바둥거리며 주먹을 날렸다.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슬로우모션처럼, 그 짧은 순간순간이 느리고 분명하게 지나갔다. 심지어 지금도 내가 내리치던 주먹, 그날의 날씨, 햇빛, 기분, 운동장의 위치, 그놈의 표정, 그놈을 잡기 위해 내달리던 내 다리 근육이 움직이는 느낌, 그 모든 게 생생하다. 놈이 팔을 버둥거려서 많이 때리진 못했는데, 그래도 최소한 두어대는 안면에 집어 넣은 것 같았다. 통쾌했다. 놀란 아이들이 달려와 우리를 뜯어놓았고, 그 뒤로 그는 졸업 때 까지 날 직접 괴롭히지 않았다.
12.
졸업을 앞두고 아이들은 하나 둘 사라졌다. 외국으로 간 거라는 이야기가 돌았다. 물론 대부분 한국에 남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적지 않은 수는 세종초등학교를 끝으로 해외로 나갔다. 그 두 놈이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다만, 여튼 졸업을 끝으로 그들을 다시 본 적도, 소식을 들은 바도 없다. 하도 궁금해서 다모임이나 싸이월드 같은 데서 가끔 검색해보곤 했는데, 흔적도 없다. 아마도 세종초등학교보다도 더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어떤 그런 사회 속으로 들어가서인지, 해외에 정착해서인지 어쩐지 모르겠다. 한 번 보고싶기는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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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은 안했지만 2년 다녔는데..
저랑 비슷한 시기에 다니셨네요.
6번? 은 기억이 나질 않네요.
저학년이라 그런가..
입학선서도 했었는데 한글을 늦게 배워서
통채로 외웠던 기억이 나네요.
그리고 확실히 부자학교는 맞았던거 같아요.
방학때 아줌마들 주도하에 단체로
미국도 가고 여기저기 놀러다녔어요.
아 그리고 외투는 노란색 패딩(?)비슷한게
있던거 같은데.
어릴 때 전학 많이 다닌 사람들 경험은 정도의 차이만 있지 다들 비슷했군요... 저도 시골->대도시 법원앞->중소도시 그저그런 동네 이렇게 이사다녔는데 다닐 때마다 천차만별이더군요. 재미있는 기억은 학교가 바뀌는 것과 동시에 교사들이 학생들을 대하는 태도 또한 극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 있네요. 솔직히 법원 앞에 학교 다닐 때는 선생의 체벌을 빙자한 폭력이라는 개념조차 없이 아이들은 조심히(무신경하게?) 다루어졌는데, 중소도시 전학 가고 난 이후 겪은 건 충공깽 수준이라...
외국에서 학교 다니다가 1학년 때 전학 왔는데, 그림에 태양 색깔 다르다고 놀림받고, 학교 생활 그리라고 했더니 갈색 건물만 스케치북 한가득 그렸다고 선생님이 이상한 애 취급했던 기억이 나네요. 독일에선 태양을 노랑색으로 스케치북 구석에 1/4조각으로 그리고, 학교 건물이 알록달록 했었는데 한국 애들은 가운데에 빨간 태양을 그리고 학교 건물은 붉은 벽돌로 우중충햇던게 너무 충격적이었거든요. 근데 저도 그 이후로 총 4개의 초등학교와 2개의 중학교를 다녔는데 결과적으로 적응력 짱짱맨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