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이 오는건지, 빠른 봄이 오는건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네가 눈에 들어와 버렸다.
아, 이친구 보게.
이게 나의 그녀에 대한 첫 인상이었다. 어쩜 저렇게 시시각각 표정이 다양하게 변할꼬. 처음 우연히 같은 조가 되었을 때, 그녀는 몇 해나 차이나는 고학번 복학생 선배를 앞에두고도 전혀 부담스럽지 않은 듯 통성명을 시작했다. 밝은 목소리에 걸맞게 눈과 입이 활기차게 들썩인다. 참 보기 드문 아이다 싶었다. 표정이 참 많구나. 백옥같은 피부도 아니었고, 무진장 이쁜 얼굴도 아니었지만 가장 활기차게 살아있어서 더욱 눈길을 끌었다.
보란듯이, 그 아이는 특유의 밝음과 수줍음을 줄 타듯 건너며 많은 아이들에게 인기를 얻었다.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끊이지 않았고, 앳된 얼굴로 생글거리고 웃는 모습이 남녀를 불문하고 그녀를 미워할 수 없게 만들었다. 때때로 요령좋게 타인의 험담을 웃어넘기기도 하고, 분위기에 맞춰 농담도 잘 하는 그 아이가 종종 어른스러워 보이기도 했고, 개구장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사람이 워낙 좋아서인지, 그 애에게 정작 이성적으로 다가가는 친구는 없어보였다. 그건 내게 호재기도, 아니기도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그 애가 썸을 타거나 만나는 사람이 있으면 좀 더 흐뭇한, 이를테면 큰오빠나 아빠같은 마음으로 지켜볼 법도 했을텐데 어쩐지 자꾸 엄한 생각을 품게 된다. 생글거리는 그 모습이 조금씩 여자처럼 느껴졌다.
하루는 그 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주변 친구들과 그 아이들까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사실 그 아이 주변 친구들이래봐야 나한테도 후배들인 셈이니까. 그런데 그 애는 후배들 사이에서도 온갖 장난스러운 짖궂음을 받아주고 생글거리며 투닥대고 있었다. 저 나이 또래 남자애들은 저 친구를 귀여운 동물에 빗대어 부르고는 했고, 어김없이 그 아이도 비슷한 동물들로 남자애들의 별명을 지어주곤 했다. 콧구멍이 짝짝인 나무늘보 같은게 라거나, 개구리 눈을 한 턱두꺼비라거나.. 돼지와 소와 곰과 개와 온갖 금수들이 식탁 위로 쿵쾅댄다. 나는 그게 우습기도하고, 재밌기도하고, 약간 욱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냥 웃었다.
사실 선배 생각에는 말야. 니가 좀 이쁜 것 같아.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피부가 하얗지 않아도, 남들만큼 빼짝 마르지 않았어도, 쭉쭉 빵빵한 바디가 아니어도, 키가 훤칠하게 크지 않아도. 오똑한 코와 날렵한 브이라인, 왕방울만한 눈이 아니어도. 넌 좀 예쁜거 같다고. 그 생글거리는 웃음이 정말 잘 어울리게 예쁘다고. 하지만 차마 이런 소리를 맨정신으로는 못할 것 같아서 접어두기로 했다. 갓 스물 스물하나가 된 친구들이 서로 생기발랄하게 투닥대는걸 보며, 새삼 이런 소리도 장난으로 꺼내기 쉽지 않은 관계라는게 좀 아쉬워지는 하루였다.
하하, 더 예뻐보이면 어떡하나. 앞으로 내 입단속에 신경좀 써야할 것 같다. 무심코 그 애를 만난다면 긴장하지 않게 자꾸 떠올리지도 말아야 겠다. 몇 년을 더 살았는데 스따일 구기게 오들거릴수는 없지 않겠나... 나이를 먹는다고 꼭 이런쪽 능력이 늘어나는건 아니지만, 일단 태연을 가장해야겠다. 떨지 않고, 오다 주웠다 같은 시크한 말투로 너 예뻐. 라고 말할 수 있게. 지나가듯이, 빈말처럼. 맥박소리가 좀 커질 것 같긴 하지만. 그렇게 한 발짝, 그 아이의 생글거림에 가까워 지고 싶어졌다.
"선배, 약 먹었어요? 열나요? 아니면 배고파서요? 학식사줄까요?"
.....당분간은 보류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