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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3/06/03 21:28:03
Name 헥스밤
Subject [일반] 우리 이번엔 진짜 헛발질 아닌 것 같애

지난 수요일이었나. 수요일 저녁이었을 거다. 여자친구와 홍대를 걷고 있었는데 얼굴이 익숙하지만 이름은 익숙하지 않은 누군가가 나를 불러세웠다. 틸트 사장님. 아까 사무실에서 전화 드렸는데 전화가 안되네. 내일 오전 강남에서 알바연대 기자회견을 할 것 같은데요, 영세자영업자로 참석해서 발언좀 부탁드릴 수 있으려나요? 나는 대답했다. '음. 현실적으로 힘들 것 같은데요. 일단 사무실에 전화해서 일정좀 구체적으로 알아볼께요.' 그리고 알바연대 사무실에 전화를 했다. '야. 이런 거 있으면 미리 말좀 해줘 임마.' 그리고 나는 여자친구와 저녁을 먹고, 밤새 놀고, 느즈막히 일어나서 점심을 먹었다. 사실 별 일이 있어서 제안을 거절한 건 아니었다. 다만 빡세게 일하는 내 휴식을 지키고 싶었을 뿐이다. 제대로 쉬지 않으면, 일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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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였다. 손님도 별로 없고 조용한 일요일. LG가 5연승을 기록하며 상승세를 기록한 한적한 일요일. LG팬 손님 몇과 시덥잖은 야구 이야기를 하며, 손님 하나와 야식 내기 포커를 쳤다. 중간에 한번 포카드로 풀하우스 올인을 잡았으나 배가 고파 자꾸 판단 미스를 하고, 졌다. 결국 내가 보쌈을 시키고 트위터를 죽 흝었다. 어. 어라. 알바연대 대변인 권문석 사망. 사인은 돌연사. 어. 어라.

그와는 올해 4월 30일, 최저임금 1만원을 위하여, 라는 토론회에서 만난 기억이 있다. 당시 나는 영세자영업자 대표로 토론회 패널에 참석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패널 뒷풀이에 참여하고 싶었지만 나는 출근을 했어야 했으니. 알바연대의 대변인이자 진보신당의 정책위원인 권문석과 제대로 얼굴을 보고 인사를 한 건 그 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물론 그 전에도 언젠가 거리에서 만났을 것이다. 서른 다섯인 그와 나는 몇 살 차이가 안 나는 동시대인이며, 그도 나도 사회당원이었으니. 아마 대학 시절 언젠가 거리에서 투쟁으로 인사를 나눴을 지도 모르겠다. 언젠가 사회당원들과, 혹은 청년좌파 회원들과, 혹은 알바연대 회원들과 가게에 찾아왔을 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시력이 좋지 않고 기억력이 좋지 않은데다가 경도의 안면인식장애까지 가지고 있으니 뭐. 모를 일이다.

출근 전에 짧게 조문을 다녀왔다. 장례식장에 갈 때에는 면도를 한다는 것이 개인적 원칙인지라 면도를 했다. 늦잠을 잔 덕에 시간이 없어서 마구 면도를 하다가 꽤 여러 군데를 길게 베었다. 마침 입관 전이라 다행히도 그의 마지막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비현실적인 망자의 얼굴. 그저 멍했고 잠깐 눈물이 났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라고 짧게 인사를 보냈다.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머리 속에는 그가 얼마 전에 다른 동지에게 건냈다던 말이 떠올랐다. 나름대로 대중적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현재의 최저임금/알바노동 운동을 진행하다가, 권문석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 이번엔 진짜 헛발질 아닌 것 같애"

모를 일이다. 사회당이 없어졌던 것처럼, 민주노동당이 분열된 것처럼, 그 모든 일들처럼 이것이 헛발질이 될 지 멋진 결승골로 연결될 지. 하지만 이번엔 진짜 헛발질이 아닌 것 같기는 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두서없이 떠올리며 다시 한번 그의 얼굴을 보고 인사했다. 이제 안녕히. 나는 죽은 사람에게 어떤 인사를 보내야 하는 지 정말로 모르겠다. 그저 그동안 고마웠고, 수고가 많았다. 그러다가 어라.

며칠 전 길에서 내게 기자회견 발언 제안을 했던 그 분 같은데.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했다. 어 나 장례식장 다녀오는 길이야. 권문석 동지라고. 그런데 잠깐 인터넷 검색좀 해 볼래. 며칠 전에 홍대에서 만났던 그 분인것 같아. 여자친구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대답했다. 그분 맞네. 돌아가셨어? 어. 어제. 돌연사래.

결혼이나 죽음이나, 누가 먼저 갈 지 모를 일이다. 다음에 갈 사람이 그대였을 줄 내 어찌 알았으리. 죽기 며칠 전의 부탁을 거절해서 미안합니다, 만 할 수 없는 일이죠. 하긴, 어제도 장례식장에 다녀온 어떤 손님들이 '마지막 강연회에 못 가서 미안해'라거나 '이번에 월급 받으면 내가 술한잔 사기로 했는데' 등의 이야기를 하면서 슬퍼했었다. 모를 일이지요.

그저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권문석 동지. 아니 이제는 권문석 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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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luralist
13/06/03 21:41
수정 아이콘
20대 때 그 당시 사회에 비판을 가장한 비난을 신나게 퍼부으며
"기성세대"는 그 당시 사회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외쳤던 기억이 납니다.
이제 30대 중반에 서서 제가 현재 기성세대인지 기성세대 초입인지, 아니면 아직 신세대인지 헷갈리는군요.
그러한 감정 속에서,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기 위해 일어섰던, 일어난 제 동년배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괜시리 제 자신이 아스라이 작아지는 밤이네요...
고 권문석님께 삼가 애도를 표합니다.
13/06/03 21:46
수정 아이콘
일찍 떠나면 안될 사람들이 어쩜 이렇게야속하게들 먼저 가시는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늘푸른솔솔솔솔
13/06/03 21:51
수정 아이콘
오랜만에 들어보는 단어네요...동지...

아침에 눈을 뜰 때면 열려진 작은 창문으로
열린만큼 쏟아지는 햇살
우리 사랑도 그만큼만 쌓인다고 하던데
내 가슴은 얼마나 열어놓았는지

행복할 수 있는 곳으로 가셨기를...
단빵~♡
13/06/03 22:05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그리고 고인의 노력이 헛발질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합니다.
이퀄라이져
13/06/03 22:33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또한 헥스밤님 글을 더 자주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13/06/03 23:37
수정 아이콘
제 페이스북 뉴스피드에 그의 유고 소식이 올라오면서 어떤 분일까 궁금했는데, 여기서 간접적으로나마 알게되네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누렁이
13/06/04 02:50
수정 아이콘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가슴이 참 아프군요. 이런 소식을 들을 때마다 등돌리고 선 자로서 참 부끄럽습니다.
권민석 열사께서 좋은 곳에서 영원히 헛발질 하지 않으시고 행복하시길 빕니다..
헥스밤님께서도 힘 내시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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