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이 달아오른다. 오랜만에 휴가를 나와 반가운 얼굴을 만나고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만끽한다.
얼마만에 소주를 입에 대는 것일까. 소주도 맛있고 맥주도 맛있고..
음 뭐, 어쨌거나 이런 자리를 나는 그 기나긴 시간동안 고대해왔던 것이다.
마춤맞게 휴가를 나온 덕분에 동아리 술자리에 자리를 하게 된 게 참으로 다행스럽다.
이리도 유쾌한 것을 난 어찌 잊고 살았을까.
내게 잠시동안 완벽하게 결여되어있던 어떤 감각 같은 것의 재활운동을 하게 된 것만 같다.
"어이, 괜찮냐?"
"아 네. 형. 괜찮습니다. 형은요?"
"나야 뭐. 얘들이랑 원데이 투데이 술마시는 것도 아니고.."
여자아이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화장실을 간 사이 잠깐 담배를 피러 나온 거였는데,
담배도 피지도 않는 이 형이 이상하게 왜 날 따라 나왔을까.
뭐, 하긴 여자아이들이나 나나 생각해보면 화장실을 간다는 것도 담배를 핀다는 것도 실은 어느정도는 핑계일 뿐이고
스스로 얼마나 술에 취했는지 자가진단을 하러 온 셈이니 이 선배도 마찬가지일거란 생각도 들고,
실은 어느쪽이든 상관은 없겠다는 생각도 함께 든다
"일찍 들어가셔야죠."
"뭐 그렇지. 슬슬 술자리 끝내야겠다. 막내들도 많이 취한 것 같고"
"예. 애들 제가 챙길게요"
"휴가 나와서까지 그러고 싶냐. 너도 그대로구만"
"개버릇 남주나요 뭐"
담뱃불을 튕기고서 들어갈 채비를 한다. 시간도 많이 늦었고, 할증시간 아슬아슬하겠는데.. 우리집 방향인 후배가 누구누구더라.
"야."
"네?"
"오늘 일찍 들어가야되는거 아니면, 나랑 딴데가서 한잔 더 하자"
"아... 네"
음?
보통 작업걸 때 쓰는 진부한 패턴인데...
나를 잘 따르는 후임들의 군번이 기억나지 않는 것마냥 얼떨떨한 기분이 된다.
#2
하, 머리가 깨질 듯 아프다. 이럴 땐 역시 라면이라도 하나 얼큰하게 끓여먹어야 되는데.
매번 이렇게 숙취에 시달릴 때면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아야지. 아니 마신다면 조금만 마셔야지' 같은 하나마나한 다짐 같은걸 하게 된다.
아, 스스로에 대한 기만과 독선으로 가득 찬 청춘이여.
파를 송송 썰어다가 계란을 톡 까서 보글보글 끓는 라면을 시원하게 한 사발 해볼까
먹으면 또 속이 시원해져서 열심히 술을 마시게 될테고 그럼 난 또 술을 먹지 않아야겠단 다짐을 할테고
아 스스로에 대한 기만.. 보다도, 라면이 어디에 있더라? 파는? 계란은?
어찌 우리집이 우리집 같지가 않다.
"엄마?"
"..."
"는 없겠지"
가족들은 이미 하루의 과업을 위해 외출한 듯 싶고, 하.. 김밥천국이라도 갔다올까.
[소원을 말해봐~♪]
내가 입대하기도 전에, 아니 세상이 개벽하기 전에 나온 이런 노래가 내 휴대폰에서 힘차게 울려퍼지는 이유는
아무래도 이 노래가 내 벨소리기 때문인거겠지?
"여보세요?"
"왜케 전화를 쳐늦게 받어"
"...누구. A?"
"그래. 오늘 몇시에 볼거냐?"
"아..참 오늘 너 보기로 했었구만"
"....끊는다"
"야 잠깐"
..하. 지금이 몇시지. 하고 시계를 보니 이미 오후 세 시에 더해 반 시간쯤이 더 지나 있구나.
말도 안돼. 난 칼같이 공육시 기상하여 기상하십시요를 외치는 이나라의 참군인인데, 고작 휴가를 나왔다고 이렇게 흐트러지다니...
#3
담배를 한대 꺼내문다. 오랜만에 마시는 술이라 이렇게 맛있는걸까, 하긴 내가 원래 술을 좀 좋아하긴 했지
달달하다. 블랙러시안이라는 이름 속에 무엇이 들어있더라. 음.. 이게, 보드카랑 또.. 칼루아였던가?
예전엔 달달 외웠었는데 나도 예전만 못하단걸 느낀다. 하긴 군인이 다 그렇지.
그나저나 딴데 가서 한 잔을 이야기하던 이 선배는 말이 없다. 할증시간은 이제 시작보단 끝을 염두에 둘 수준인데.
이렇게 마주보고 나 혼자 담배만 뻑뻑 피워대다간 버스 첫차를 탈지도 몰라. 무슨 말이라도 해보세요 선배.
"저기 형 무슨 일...."
"너, 친구중에 A라고 있지?"
"네?...네"
음? 별로 예상치 않았거니와 예상하고 싶지도 않았던 패턴인데,
뜬금없이.. 아니 그걸 떠나 이 선배가 내 친구를 어떻게 아는거야? 소개 시켜 달라는건가?
"걔 지금 군대에 가있냐?"
"이제 곧 전역할텐데요."
"후.. 걔 작년 10월에 휴가 나왔었냐 혹시?"
내가 무슨 달력 어플입니까 선배.
작년 10월이라니. 내가 아직 이등병일때잖아. 그런 까마득한 기억이 있을리가 있나.
아, 하긴 생각해보니 그 놈이 겨울쯤에 휴가를 다녀오긴 헀었다.
3박 4일짜리였던가, 아무튼 짤막한 걸로다가.
그 휴가때 대박사건이 있었다면서 꼭 휴가 맞추어서 술 한잔 하자고 했었는데
"네 그랬던 것 같네요. 근데 왜요?"
"그전에, 넌 왜 그런 애랑 친구를 하냐?"
...음. 글쎄요.
"...음. 글쎄요."
"내 얘기 잘 들어봐봐. 걔랑 친구하기 싫어질거다."
아,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A, 내 진즉부터 네놈이 말썽을 일으키고 다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면식도 없는 타 단대 고 학번 선배가 너에 대한 뒷썰을 풀 정도로 타락한 짓을 저질렀더냐.
그리고 이 선배는 행실 깔끔하기로 입소문 나 있으면서 이런 얘기라니, 음. 게이인 쪽과 비슷한 컬쳐쇼크다.
#4
언제 나와도 대학로는 참으로 마음에 든다.
일단 젊은 여자가 벌거벗은 것보다 더 야하게 옷을 다니고 다니는게 참 이쁘..
다는 이유로 내가 대학로를 좋아하지는 않지만, 나도 고등교육을 정식으로 수료한 깔끔하고 준수한 이 나라의 건실청년이니까.
그냥 그 분위기 같은 거라고 해야할까? 뭔가 부자연스러울만큼 조금 들떠있는 것 같은듯한,
[소원을 말해봐~♪]
...진동으로... 해두는 게 낫겠지...?
"여보세요?"
"어디야 빨리 와"
"A?"
"아 그래 나라고 어디냐고"
"나 지금 편의점 앞인데?"
"편의점 건물 삼층 술집으로 오라고 했지 누가 편의점 앞으로 오라했냐 이런 씨"
오래 들어봤자 좋을 게 없는 단어들이 연속으로 튀어나올듯한 분위기에 전화를 살포시 끊는다.
난 대체 왜 이런 놈이랑 친구를 하는거지.
나의 니드를 전혀 알지 못하는 A는 참으로 나쁜 친구다.
3층? 이런 술집이 있었던가. 아, 대학로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는 술집의 문 앞이 참으로 좋다.
고요하고 정적이며, 소란스러운 소리가 조금은 먼 듯하게 느껴져 유리되어 있는 문을 살포시 밀어내면
그 속에는 청춘과 슬픔과 기쁨을 녹여낸 알코올과, 소주와 맥주와 알코올에 녹여낸 많은 사람들이 있다.
흠흠, 참으로 철학적인 밤이다.
"야 A! 오랜만이다?"
"그래. 오래 기달렸다"
"아니 그게 아니고..."
"..좀 일찍일찍.... 에휴. 앉아. 쏘주? 맥주?"
"쏘맥이지. 근데 여자는?"
"무슨 여자?"
"설마 너랑 나랑 남자 둘이서 여기 앉아서 술 먹으려고?"
"뭐 그럼?"
"..나 간다"
"야 안그래도 후배들 불러놨어 앉어"
나의 니드를 정확히 알고있는 A는 참으로 좋은 친구다.
"사랑해 내맘 알지?"
"맞고 시작할래?"
#5
"겨울이요? 그 선배 여자친구 그 겨울이?"
"그래. 넌 이해가 되냐?"
"아니..이건 이해가 문제가 아니고"
하. 도대체 어떤 식으로 이해를 해야 내가 올바르게 이해를 하는 상황이냐.
"겨울이랑 A랑 모텔을 갔다고요?"
"..."
"아니 왜?"
물론 겨울이와 A는 같은 과 동기고, 그냥 가끔 보며 인사를 하는 것보다야 친분이 있다는 건 알았지.
일단 A 그 놈 자체가 사람의 니드를 잘 알고 있는 성격인데다가 키도 크고 스타일도 좋으니까, 여자한테도 인기가 많고.
근데 겨울이는 애초에 A가 좋아할 법한 사람도 아니고..
설명이 늦었는데 겨울이라고 하면, 일단 내 앞에 앉아있는 이 선배의 여자친구이자, 나와 선배와 같은 동아리에 소속되어 있으며,
A의 과동기이기도 하다. 키는 165쯤 될까? 삐쩍 마른 주제에 그.. 그게... 크흠.
아, A라는건 나의 오래된 친구로, 겨울이와 같은 과 동기이며 과MT에 가서 술에 취한 겨울이를 챙겨준 전력이 있는 정도랄까.
물론 둘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을법도 하지만, 그건 내가 알 바가 아니고 알 수도 없고..
"그게 작년 10월이라구요?"
"...내가 그새끼 죽여도 되겠냐?"
"저 잠깐 생각좀.. 정리할게요"
"생각하고 뭐고가 어딨어. 남자친구 있는 여자를 왜 건드려?"
아니 물론 그렇게 생각해야하는 상황이지. 근데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도 있으니까,
택시를 태워 보내려고 했는데 돈이 마침 모자랐거나 별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모텔에 잠깐 가서 씻고 쉬고만 나왔을수도 있는거고,
아니면 모텔 앞을 지나치는데 엄청 재미난 DVD가 있길래 같이 보기로 했다던가?
예를 들면 뭐 둘이 술을 진탕 마시고 옛 생각이 나서 모텔에 가서 한바탕 굴..
..른 상황이겠지 아무래도?
한쪽의 말만 듣고서 판단할 순 없지만 A와 겨울이가 그런 사이였다는 것도 의외고, 별로 A의 편을 들 수 있는 정황상의 심증이 없다.
#6
생각해보면 내가 술을 마시게 된 것도, 담배를 피게 된 것도 거진 A의 영향이 크다.
예전에야 내가 한가닥 했다지만, 흑역사를 거치며 나의 중2병은 실로 영향력을 막강히해가며 나를 대단한(참으로!) 사람으로 만들어버렸고,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는 나를 억지로 끌고다니며 유흥의 신세계를 느끼게 해주었으니까
A를 만나지 않았어도 담배를 피고 술을 마시긴 했겠지만, 아마 지금처럼은 아니였을거야.
"A. 너 전역은 언제냐?"
"낼 모레. 내일 복귀해서 낼 모레 전역해"
"얼쑤.. 군생활 다 했구만?"
"너깟 짬찌가 내 군생활을 논하냐?"
"음.."
..입이 근질근질하다.
"야 근데 A, 너 과 동기들이랑 연락해?"
"누구? 봄이? 여름이? 아니면 환절기?"
"..뭐 걔들도 있고. 겨울이라고 왜.."
"아.. 겨울이? 하... 너 겨울이 알어?"
"알지. 같은 동아리잖아"
"아 그랬었지. 야. 내가 10월에 대박사건 있었다 했지? 그게 어떤일이냐면 말야"
알은 척을 해야할까 말아야할까.
는 고민할 필요가 없지
"뭔데?"
"아니, 내가 한때 겨울이 좋아했었거든. 걔가 그게 부담이였는지 내 편지도 전화도 다 씹고 그랬어.
나도 아쉬울 거 없고, 괘씸해가지고 그냥, 10월에 휴가 나왔을 때 목소리나 한번 들을려고 전화를 했었어.
근데 대뜸 어디냐더니 술을 마시잔거야"
"응."
"그래서 뭐 한잔 두잔 마시게 됐지. 난 벌써 1차에서 두어병 마시고 온 터라 조금 알딸딸했거든.
소주 한병을 시켜놓고서 차근차근 옛날 얘기를 했어.
우리 과가 워낙 고리타분하잖냐. 그래서 마음 맞는 애가 잘 없어가지고 겨울이랑 같이 다녔었던거니까,
그래서 옛날 얘기를 하니까 재밌더라고.
근데 너가 겨울이랑 같은 동아리면 술도 마셔봐서 알겠지만 걔도 한 술 하거든. 나보다 더 잘 마실지도 몰라. 근데 너 라이터 있냐?"
"어 여기. 너 그거 뭐야 블랙데빌이야? 나도 하나 줘"
"자. 아무튼, "
"오 초코맛! 뭘 좀 아네"
"얘기 들어 말어"
"아 아냐 얘기해"
"근데 그 주당인 겨울이가, 꼴랑 소주 두잔인가 세잔인가를 먹고서 쓰러지는거야. 하 나 참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안된다.
내가 원래 좀 능글맞은데가 있어가지고, 걔가 기숙사 살거든? 근데 그 전에 내가 만나자마자 늦은 시간에 왜 나왔냐 그러면서
몇시까지 같이 있을지 대충 계산을 해보려고 했어.
근데 걔가 이해가 안되는게 외박을 썼다는거야. 그냥 여러가지 상상을 하려다가,
아 그냥 요 근처 어디 아는 사람 집에 가서 자려는가보다. 하고 말았지.
술 두잔 마시고 뻗으니까 좀 어이가 없긴 했는데, 나도 휴가 나왔으니까 몸도 사려야되고 피곤하고 해서 잠깐 짜증이 났나봐.
편의점에 가서 술깨는 약을 사오려고 나와서 잠깐 담배 한대 피고 들어갔는데
걔가 다시 말짱히 앉아있는거야. 어디 갔다 왔느냐면서. 그래서 다시 술을 한잔 두잔 마셨다?"
"블랙데빌 맛있다. 이 얘기 왜 이렇게 길어. 본론만 좀"
"지금부터 본론이야."
#7
A의 말도, 선배의 말도 어디까지 믿어야하고 어디까지 믿지 말아야할지 모르겠다.
어쨌든 겨울이를 만나 이야기를 해보는게 가장 정확한 답변이겠지만,
뭐 내가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든다.
일단 내 일이 아니고, 겨울이는 여우같은 년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듣고나니
내가 꼬였다가 어떤 일을 당할지도 모르겠고..지금을 즐겨야지.
"A 후배라 그런지 참 이쁘시네요"
"으헤헤 오빠 말 놓으라니까 아직도 존댓말 쓰시네. 계급이 뭐랬죠? 상병?"
"네. 말 놓을까? 그래 상병이야 무려 상꺾!"
"그게 뭐야 크크크"
이쁜 후배야. 오늘은 너로 해야겠다.
#8
"지금부터 본론이야. 다시 술을 마시는데 걔가 남자친구가 너무 뭐 자기를 구속한다느니,
내 맘을 몰라준다느니, 그런 얘길 하는거야.
A 넌 참 나한테 잘해줬는데 옛날이 그립다면서... 그러더니 또 뻗어버리는거야.
그냥 겨울아, 야 겨울아 괜찮아? 그러다가 옆에 앉아서 흔들어깨우는데도 정신을 못차리는거야.
아 그래서 얘를 어디다 데려다놔야겠다.. 싶어가지고 택시를 태웠어. 택시를 태우고 기숙사로 데려갔는데"
"우리학교 기숙사?"
"아니 얜 사립기숙사 살어. 몇 번 데려다준적 있어서 어딘지 알고 있었거든"
"아 맞다. 뭐 죽전동 그쪽이었지"
"아무튼, 기숙사에서 택시를 딱 내렸는데 얘가 막 제대로 걷질 못하는거야. 정신도 못차리고..
야 겨울아, 괜찮아? 너 몇동이랬지? 내가 업어다줄게 업혀 이러는데
절대 싫대 막 극구. 외박계써서 들어가면 안된다느니, 지금 이꼴로 들어가면 쪽팔린다느니.
아니 허구헌날 술쳐마시고 돌아다니는게 학업인 년이 쪽팔릴게 뭐가 있어?
아무튼 그러다가 나도 좀 뭐랄까 육감 같은게 왔지. 아 얘가 내가 군인이니까
그냥 하룻밤 정도 잡아먹을 셈인가? 겨울이가 좀 어리바리한데 실은 여우같은 면이 있거든.
그래서 뭐 일단 잡아먹고 잡아먹히고를 떠나서 나도 소주를 네 병인가를 마셨으니
너무 피곤했고 좀 쉬고 싶어서 모텔로 데려갔어. 우리집 근처 모텔 좋은데 많거든"
"...하 미친새끼 남자친구 있는 여자를 어떻게 그래"
"아니 상황이 그렇잖아. 그렇다고 걔를 거기다 버려놓고 가? 그 동네 양아치들을 니가 몰라서 그래?"
"...난 모르겠다"
"아무튼 씨발 그래서 데려갔어. 근데 웃긴게 모텔값을 내고 방엘 들어갔어.
아직도 기억난다 그랜드호텔 203호였어. 근데 203호에 들어가서 내가 카드를 딱 꽂으니까
걔가 세미정장 같은걸 입고 구두를 신고 왔었거든? 근데 구두 굽에 기스 안나게 다소곳히 구두를 벗고,
딱 정리가 되게 말야. 그러고 파우치랑 윗도리를 벗어서 날 주고 침대에 뻗어버리는거야.
그때 얘가 술 취한 척 한단걸 깨달았지. 애초에 그 술을 마시고 취할 애도 아니긴 했는데..
그래서 난 어떻게 해야하나. 모텔방에 내가 예전에 좋아했던 여자가 술 취한척하고 날 데려와가지고
저기 저렇게 뻗어있는데, 꼴릿꼴릿한 상황 아니냐?"
"그래서 했냐?"
"아니 들어봐"
"아니 했냐고 이새끼야"
"안했어 이새끼야. 내가 앉아가지고 컴퓨터를 잠깐 하고있으니까 걔가 막 자는척 하면서 신음소리를 내.
그니까 막 술 취하고 그러면 머리 아프고 그래가지고 잠을 좀 설치니까 막 낑낑대면서 자꾸 날 신경쓰이게 하는거야.
그 당시엔 나도 군인이였고 여자를 안만난지 진짜 오래됐을때라 그냥 걔 새근거리는 숨소리만 들어도 미치겠는거야 막.
그래서 그냥 확, 싶다가도. 그냥 그 생각을 한번 해봤어. 내가 한때 좋아했던 여자애와 지금 내가 섹스를 하면
그래 그러면 기분은 참으로 좋겠지만, 근데 과연 내가 나중에 이 일을 추억할 수 있을까?
얘도 나를 이쁜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까? 그런 병신같은 생각을 한번 해봤어. 그래도 겨울이랑 나랑,
행복한 추억이 많았거든. 물론 섹스를 한다고 추억이 더럽혀지는건 아니지만
이런식은 아니여야 한다는 생각이 드는거야.
...그래서 안했어.
그런 생각을 하니까 하고 싶은 마음도 사라지고 그냥 걔가 측은해보였어.
머리칼 정리해주고 이불 덮어주고 나왔지. 편의점에 앉아서 오들오들 떨면서 맥주 한캔 마시고 들어가니까 정말 자더라."
"흠..그래서 안했다?"
"응. 그냥 그러고 옆에서 가만히 앉아가지고 걔 깰때까지 보고 있었어. 자는게 참 이쁘더라. 코도 안 골고."
"..너 겨울이... 좋아하냐? 아니다. 내 알바는 아니지"
"그래. 니 알바 아니야"
"근데..."
"응?"
"넌 [지읒]이 플라스틱이냐?"
"야. [지읒]이 플라스틱인게 아니고 마음이 플라토닉한거야"
"웃기고 있네. 후배는 언제와"
"저기 오네. 야 여기야"
"어 오빠!"
p.s
"네. 말 놓을까? 그래 상병이야 무려 상꺾!"
"그게 뭐야 크크크"
오늘은 너로 해야겠다, 뭐 이런 생각이지 너?
친구야. 내가 실은 말하지 못했는데, 걔가 파우치를 나한테 줬다고 했잖아. 그래서 그냥, 왜 그랬는지 모르겠는데 파우치를 열어봤어.
물론 나도 잘은 모르겠지만, 탐폰 같은게 있더라고. 생리날인가 싶었어. 만약에 내가 그 파우치를 열어보지 않았다면,
아니 열어봤는데 그 탐폰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내가 탐폰이란걸 몰랐더라면 사실 어떻게 됐을지 모르겠어.
아니, 상관 없었을 거 같기도 해. 어쨌든 겨울이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도망치듯이 집으로 떠났거든.
겨울이를 택시를 태워 보내면서 담배를 한대 태우는데, 그냥. 이런게 사랑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어.
후회가 되는게 아니고 있지, 내가 왜 줘도 못먹는 병신인가 싶은게 아니라 있지. 그냥, 아. 내가 참 겨울이를 사랑하는구나.
참 겨울이를 아끼는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래서 그때 이후론 일부러 연락도 잘 안해. 남자친구분, 참 좋은 사람이라더라고.
뭐 그냥 그랬다고. 겨울이, 보고싶다. 지금은 남자친구랑 잘 지낸다는데, 멍청하게 남자친구한테 그 때 얘기한거 아니겠지?
그럼 그 남자친구가 나 죽인다고 길길이 뛰고 난리가 날텐데. 하. 보고 싶다. 겨울이. 겨울이 얘기좀 해 줘봐. 잘 지내나 궁금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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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근데 선배가 술먹고 파하는 자리에서 따로 한잔 하자고 하는건 흔하지 않나요? 크크
그리고 남자친구가 있는 여성이 다른 남자와 같이 잤다고 하면 저는 그 여성의 행실을 문제 삼는게 먼저지
그 여자와 같이 잤던 남자에게 먼저 타겟이 돌아가는 건 이상한 일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싫다는데 억지로 술을 먹여서 뻗게 한다음에 모텔로 데려가는 강간에 준하는 그런 일이 아니라면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