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며

시장 경제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원리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일 것입니다. 즉, 수요가 증가하면 가격이 올라가는 것이고 공급이 증가하면 가격이 내려가는 것이죠. 다만 이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분야가 몇 분야 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분야가 의료분야입니다. PGR을 비롯한 인터넷 상에서 토의 시 수요와 공급의 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의료의 특성을 잘 이해하지 못 해서, 혼란을 겪는 경우가 종종 보았습니다. 그래서 여기서는 의료에서 시장원리가 적용되지 않는 경우가 어떤 경우가 있고, 왜 그런지 세 가지 사례를 통해 적어보겠습니다. 여기 나오는 사례는 대부분 PGR에서 의료와 관련된 토의 시 제시되었던 내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모두 다 읽기에 내용이 길다 싶으면 이 중 관심 있어 보이는 사례 하나만 보셔도 전체적으로 이해하는데 무방할 것 같습니다.

1. 국가의 의사 수가 늘어나면 국가 전체의 의료 비용은 증가한다?

3분 진료나 의사들의 불친절과 같은 문제가 나올 때마다 가장 흔히 등장하는 의견이 바로 "의사 수를 늘려서 의사들 간의 경쟁을 심화시키면 해결될 것이다."라는 의견입니다. 일반적인 상식으로 생각하면 당연한 말입니다. 거의 모든 서비스 산업 분야에 있어서 그 서비스 산업 종사자 수를 늘려 경쟁을 심화시키면 그 경쟁에 의해 가격은 내려가고 서비스의 질은 향상되기 마련입니다. 제한된 크기의 파이를 놓고 더 많은 사람이 경쟁하게 되면 그 파이를 차지 하기 위해 더 노력하게 되는 것이죠. 하지만 의료 분야에 있어서는 의료 공급자 수를 늘릴 경우 기대했던 것과 전혀 다른 현상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비어 있는 병상은 채워지기 마련이다."라는 보건의료계의 오래된 격언과 관련된 것이죠.

일반적인 상식에 따라 생각해 봅시다. A 마을에 한 명의 의사가 있는데 그 의사는 하루에 100명의 환자를 보는데, 환자 한 명에 3분씩 밖에 진료를 하지 않습니다. 그것에 불만을 품은 마을 주민들은 새로 의사를 한 명 구해 옵니다. 그렇다면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두 명의 의사가 같은 100명의 환자를 봐야 하니 6분 간 진료가 가능합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와 다른 일이 일어나게 됩니다. 두 의사 모두 여전히 환자를 3분씩 밖에 진료를 안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마을의 환자는 하루 100명에서 200명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즉, 마을 전체로 볼 때 의료 비용이 두 배로 늘어난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일이 지금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선진국에 비해 인구수 대비 의사 수가 적은 편입니다. 하지만 의사 수 증가율은 어느 나라보다도 높습니다. 이는 세계에서 인구수 대비 의대생 수가 가장 많을 정도로 늘어난 의대 수 때문입니다. 이렇게 의사 수가 늘어가면 공급이 증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따라 의사가 환자를 더 오래동안 진료하고 의료 비용 또한 줄어들 것을 기대합니다. 하지만 진료방식에는 전혀 변화가 없으며, 오히려 국가 전체 의료 비용은 더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질까요.

의사 수가 늘어나는데도 의료비용이 더 증가하는 원인은 주로 의사와 환자 간의 정보 불균형에 있습니다.

일반적인 서비스업과 의료가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바로 공급자인 의사가 수요자인 환자에 비해 압도적인 정보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때 수요자인 환자는 자신에게 의료 서비스가 필요한지, 어떤 의료서비스가 필요한지 잘 알지 못 합니다. 그 결정권은 공급자인 의사가 쥐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의사 수가 늘어날 경우 기존의 병이 아니던 것도 병이 되어버립니다. 산술적으로 예전에는 건강이 100중 30 밑으로 내려가야지 치료를 시작하였다면 이제는 50 밑으로만 내려가도 치료를 시작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비만도 병이다."라는 명제는 과거에는 거짓이었습니다. 하지만 의사 수가 늘어난 현재는 이 명제가 참이 되었습니다. 의사 수가 늘어날수록 의사가 활동할 수 있는 반경은 더 넓어지게 되며, 그로 인해 기존에는 환자로 취급되지 않던 사람들도 환자로 취급되어 치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의사와 환자의 정보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수요자인 환자는 공급자인 의사를 선택함에 있어서도 제한을 받게 됩니다. 수요자 입장에서 어느 공급자가 더 좋은 공급자인지를 판단하기 어렵기 때문에, 의사의 수가 늘어날 경우 닥터 쇼핑이 더 생기기 쉬우며, 이로 인해 같은 질환으로 인해 중복되어 진료 받는 경우가 늘어나 국가 전체의 의료 비용은 더 증가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봤듯이 공급이 증가할 경우 같은 양의 파이를 놓고 증가한 공급자끼리 경쟁을 하게 되는 일반적인 서비스 분야와 달리, 의료분야에서는 공급이 증가할 경우 오히려 파이가 커져버리는 결과가 생기게 되며, 따라서 의사 수를 무작정 늘릴 경우 국가 전체의 의료 비용이 더 증가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2. 흉부 외과 전공의는 모자란데 정작 전문의 자리는 없다

몇 년 전부터 의료계에서 심각하다고 노래를 부르고 있는 문제가 바로 흉부외과와 같은 비인기과의 전공의 부족입니다. 여기서는 대표적으로 흉부외과에 관해서만 얘기해 보겠습니다.

아실 분은 다 아시겠지만 어느 병원이든 흉부외과 전공의는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4년 과정의 전공의들을 모두 통틀어 봐도 흉부외과 전공의가 한 명도 없는 병원이 태반입니다. 오죽 심각했으면 정책적으로 흉부외과 전공의의 연봉을 다른 전공의 전공의들에 비해 두 배 이상으로 올려줬을까요. 그러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그렇게 흉부외과를 전공하는 사람이 적으면, 공급이 줄어드니까 가격은 올라가서 흉부외과를 수료한 사람의 가치는 올라가지 않을까?"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의사들이 진료 선택 시 흉부외과를 꺼리는 이유로 흉부외과의 일이 힘들다는 것도 원인이 될 수 있지만,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전문의가 되어도 일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즉, 흉부외과 전문의에 대한 수요가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흉부외과 의사는 그 특성상 종합병원에 고용되어 일할 수 밖에 없는데, 종합병원들은 흉부외과적 수술을 하더라도 이익이 남지 않고 오히려 손해를 보기 때문에 흉부외과 의사를 고용하기를 꺼립니다. 바로 흉부외과 수술을 함으로써 받을 수 있는 돈이 정부 정책에 의해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이죠.

다시 말해서 수요와 공급의 원리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수요와 공급에 따라 가격이 탄력적으로 변화해야 하는데, 애초에 가격 자체를 정부가 정책적으로 잡고 있기 때문에 공급자가 도리어 공급을 줄이려고 하는 현상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흉부외과 의사는 아무리 공급이 부족해도 일자리가 없는 것이죠.

3. 우리 병원에서 치료 받으면 돈을 드립니다?

서비스 공급자가 수요자에게 도리어 돈을 주는 황당한 경우가 실제로 있습니다. 바로 혈액 투석을 전문으로 하는 병원입니다. 혈액 투석은 신장 기능이 저하된 환자를 대상으로 신장 기능을 대신하여 신체의 노폐물을 제거하기 위해 행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혈액 투석이 상당히 비싼 시술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이 비용을 부담하기 힘들며, 따라서 이를 위해서 정책적으로 본인부담비용이 적게 책정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병원 입장에서는 치료비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보험수가를 받기 위해서 오히려 환자에게 돈을 주고 환자를 유치하려 하는 것이죠. 어차피 주수입은 보험공단에서 주는 보험수가이니까요.

이렇게 될 경우 의료시장이 왜곡되는 것 또한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결정적으로 환자가 병원과의 관계에서 오히려 우위에 서기 때문에 의사의 치료에 대한 순응도가 떨어지는 문제가 생길 수 있습니다. 환자가 자신의 건강에 이익이 되는 방향보다 부수적인 수입에 의해 병원을 선택하고 의사 또한 환자에 대한 통제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최선의 치료가 어려워 지는 것입니다. 국민의 건강을 위해 만들어진 의료보험 제도가 오히려 건강을 해치게 만드는 역효과를 내는 사례가 되는 셈입니다.

4. 마치며

의료 분야는 시장 실패의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힙니다. 일반적으로 수요와 공급에 따른 시장 경제 원리는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절대적인 진리로 여겨지는 경우가 많지만, 의료 분야에 있어서는 그 절대적인 원리가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의료 분야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라는 중력이 제대로 작용하지 않는 이상 중력 지대라고 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