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썼던 독후감 같은 것이라 반말체인 점 양해바랍니다.
1984에 대해 스포-_-가 될 수 있습니다. (1Q84아닙니다)
인터넷에서의 언어사용을 보고 언어와 인간성에 대해 생각해보고
인터넷 커뮤니티중 가장 올바른 언어사용이 강제(?)되는 피지알에 한번 옮겨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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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오웰의 1984를 읽고 나는 큰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작가의 미래에 대한 놀라운 정도의 상상력에, 두 번째는 나의 막연한 선입견을 무색하게 만드는 소설의 깊이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1984를 읽어보지 않은 사람이라 해도, 아니 1984라는 책제목을 모르는 사람이라 해도 현대사회의 인간감시-CCTV등과 관련한 이슈에서 ‘빅 브라더’라는 말을 들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텔레스크린이라는 쌍방향 통신체계를 이용한 국민의 감시- 이는 최근에야 보급되는 영상휴대폰과 완전히 같은 기술이다. 소설에서의 텔레스크린은 국민쪽에서는 끌 수 없는 강제적인 것이라는 것이 다를 뿐이다. 이러한 놀라운 미래에 대한 상상력이 포함되어 있어서, 그리고 조지오웰의 다른 작품들 우주전쟁, 동물농장들의 이미지가 더해져 이 근미래 SF적인 소설은 이 소설을 직접 읽지는 않았지만 알고는 있는- 사람들에게 다분히 통속적인 소설정도로 평가되는 경향이 있다. 나또한 그런 사람들 중의 한명이었기 때문에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동기는 그저 ‘흥미’위주의 가벼운 선택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한페이지 한페이지 넘길때마다 내 예상을 훌쩍 뛰어넘는 내용에 충격받았고 작가의 날카로운 풍자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을 읽고 가장 감명깊게 느낀, 작가가 말하고 싶었으리라 생각하는 두 가지는 첫째는 권력자-이른바 당의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이고, 두 번째는 인간에게 있어 언어가 가지는 의미의 고찰이었다.
사실 첫 번째 주제는 조지오웰의 작품들에서 면면히 흐르는 내용들이다. 열강의 식민지 수탈을 비판적으로 풍자한 우주전쟁이나, 이른바 혁명가라는 자들이 부패하여 다시금 민중을 착취하는 것을 풍자한 동물농장 등에서도 볼 수 있는 내용이다. 작품내에서 당과 대형은 혁명을 일으켜 자본가와 귀족계급을 몰아내고 인민에게 평등을 가져다 주었다고 주장하는 혁명세력이다. 그러나 특별당원들은 자신들만의 특권을 누린다. 이들의 인민재판, ‘증오’의 시간과 ‘대형’에 대한 맹목적인 사랑과 충성, 정보통제, 비밀경찰들의 내용을 보고 있자면 북녘의 동포들이 생각나면서 북한 정권은 1984를 교과서로 삼아 실행에 옮긴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일치하는 구석이 많다. 이들의 전체주의는 그야말로 완성된 완성품으로, 사회의 시스템 자체가 모든 국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며 이윽고 국민을 원하는 대로 만들어내기 위한 체계를 갖추고 있는 것이다.
개인의 정열을 어떻게든 당으로 쏟기 위해, 적에 대한 증오를 불태우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국민에게 여유를 주어서는 안되며 가난은 퇴치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필요한 것이라는 대목, 사람들이 성적으로 만족하면 투쟁심이 약해지므로 성욕을 억압하며 히스테릭한 상태를 유지시켜야 한다는 대목등에서는 등골이 오싹해졌다. 조지오웰은 굉장히 세세한 부분까지 전체주의가 사람들을 통제하는 방식과 방법을 폭로하고 있으며 소설 안에서 그러한 통제방식들은 유기적으로 결합하여 완전한 통제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번에 내가 소설을 읽으며 가장 전율한 부분은, 이러한 통제의 방법이다. 그것이 이 소설의 두 번째 주제, 인간에게 있어서 ‘언어’가 가지는 의미이다. 이것이 이 글에서 내가 살펴보고자 하는 주제이기도 하다.
인간에게 있어서 언어란 어떤 의미인가? 작가는 인간에게 있어 언어란 그저 의사소통의 도구를 넘어서서, 사고와 사상의 도구이며, 그것조차도 넘어서서 존재 그 자체라 말한다. 이것이 무슨 궤변인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자신의 실존을 증명하였다. 조지오웰은 인간의 ‘생각’은 결국 언어로써 이루어지고 인간의 실존과 ‘인간에게 있어서의 세계’는 결국 인간의 생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언어를 통제하면 생각을 통제할 수 있고, 결국 실존마저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주인공 윈스턴의 굴복을 통해 그러한 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러한 억압자의 대표자인 오브리엔은 윈스턴에게 ‘자네는 존재하지 않아’ 라고 말한다. 논리적으로 모순이며 궤변이지만, 결국 윈스턴은 이에 굴복하게 된다.
조지오웰은 이 주제를 선명히 전하기 위해, ‘신어’라는 언어체계를 만들었다. 부록 ‘신어의 체계’는 본 작품을 읽기 전에 먼저 읽으면 좋을 것이다. 조지오웰이 상상한 신어의 체계는 자연적인 언어가 아닌 만들어진 언어로써 그 언어체계는 충분히 실제로 기능할 수 있을만한 합리성을 갖추고 있다.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은 조지오웰의 신어의 체계를 보며 환호성을 지를지도 모른다. 우선, 동사형태의 불규칙한 변화를 모두 단순화시키고, 복수형, 부사형등의 형태를 고정시켜 버린다. 문법을 최대한 단순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철자는 같은 발음으로만 이루어지게 하고, 강세도 단순화해버린다. 단어의 중의성도 없애버리며, 어휘의 축소도 이어진다. 만약 세계인이 같이 쓸 공용어를 만든다면 참고할만한 발상이 가득 들어있다. 당장의 공통적인 의사소통만을 목적으로 한다면 이런 언어체계는 분명 장점이 많아보인다. 그러나 조지오웰은 그 편의성 속에 숨어있는 위험성을 경고한다.
발음과 강세를 단순화함으로 얻어지는 효과는 말을 빨리하게 하는 것이다. 최대한 속사포처럼 말을 쏟아낼 수 있게 언어를 정비함으로써 더욱 공격적으로 말할 수 있게 하고, 말을 하면서 생각할 여지를 줄이고 일단 입밖에 내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생각이란 일단 밖으로 말을 꺼내버리면 생각도 말에 따라가는 경향이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말’은 생각의 결과이지만, 어떠한 생각을 말로써 표현해 규정지어 버리면 이후에는 생각도 그렇게 따라가게 된다. 급하게, 신중하지 못하게 입밖에 나와버린 말이 인간의 생각을 끌어가버린다- 그러한 광경을 조지오웰은 ‘증오시간’이라 불리는 내용에서 보여준다. 적대자의 얼굴을 스크린에 띄우고 그를 향해 욕을 하고 저주를 퍼붓는 시간, 윈스턴은 그 행사를 싫어하고 한심한 짓이라 생각하면서도 주위의 분위기에 휩쓸려 몇마디 소리를 지르고 나면 그 집단최면 속에서 어느새 진심으로 흥분해버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이보다 더 중대한 위험은 문법과 단어의 단순화이다. 문법과 단어의 단순화는 사람들의 사고를 단순하게 만든다. 그렇다. 사실 비슷한 뜻을 가지는 말이라 해도, 어떤 단어를 사용하느냐에 따라 느껴지는 뉘앙스는 천차만별이며 그것은 곧 지각능력과 사고력으로 이어진다. 언어라 함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생활과 사고를 담고 있다. 예컨대 몽골어에는 ‘말’을 가리키는 단어가 수십개가 된다고 한다. 그만큼 ‘말’에 대해 잘알고, 작은 차이도 구별해서 이말은 젊은 말인지, 색이 어떤지, 성질이 어떠한지를 구별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국어에는 비를 지칭하는 단어가 소나기, 보슬비, 가랑비, 장대비, 여우비등 다양하나 영어는 rain일 뿐이다. 전쟁을 자주했던 로마는 ‘10명에 한명 꼴로 죽이다’라는 뜻이 한 단어(decimate)로 있을 정도가 아닌가!
이러한 생활과 사상을 담고 있는 단어들을 없애고 통합하는 것은 인간의 사고를 제한한다. 중간정도의 뉘앙스를 가지는 단어들을 없애고 통합함으로 사람들의 사고를 흑백논리 속에 가두는 것이다. 예컨대, 조지오웰은 신어에 있어서 free라는 단어는 단순히 ‘공짜’를 의미한다고 하며, equal이라는 단어는 산술적인 ‘동일’만을 의미하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현재 의미로서 자유, 평등등은 모두 ‘crimethink(죄사상)’이라는 단어아래에 묶이게 된다. 여기에는 음란등이 모두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신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저 사상범들을 ‘나쁜사람들’ 혹은 ‘범죄자’로밖에 느끼지 못하며, 'all mans are equal'(신어에 있어서 man의 복수형은 mans일 뿐이다!) 이라는 문장은 수학적 거짓으로밖에 느끼지 못한다. 이 말이 ‘사람들은 평등하다’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단순히 ‘모든 사람들은 똑같다. 쌍둥이들처럼’ 이런 식으로밖에 받아들이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면서 상대방의 종교를 자세히 알면 상대방을 증오하기 힘들기에, 크리스챤들이 타종교인을 모두 ‘이교도’라고 단순화 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라는 오웰의 비유를 보면 탄복하지 않을 수 없다.
확실히, 어떤 현상을 나타내는 언어가 없으면 우리는 그것을 생각하기 힘들고 지각하기 힘들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가시광선 밖의 빛- 적외선과 자외선을 생각해보라. 그 두 단어가 없다면 우리는 우리 시각으로 지각하지 못하는 그 빛들을 어떻게 상상할 것인가? 인간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우리 생각보다 굉장히 단순한 단어라 해도 커다란 추상성을 가지고 있다. 또다른 소설 ‘개미’에서는 개미와 대화하는 장치가 나오는데, 개미에게 ‘책상’이란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물건들을 올려놓는, 나무다리가 4개 있는 평평한 판’이라고 설명해야 하는 장면도 이러한 인간의 언어의 추상성과 그것이 주는 사고력의 확장을 알려준다. 만약 우리가 어떤 생각을 하는데, ‘책상을 산다’는 생각을 하기 위해 ‘물건들을 올려놓는 나무다리가 4개있는 평평한 판을 무언가 다른 대가를 지불하고 서로 주고 받고하여 바꾼다’라고 사고해야 한다면 우리의 생각의 속도는 그만큼 줄어들 수 밖에 없고 우리의 사고수준은 빈곤해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요즈음 들어 순한글전용 등의 논의는 이러한 면에서 압축적으로 사용될 수 있고 뉘앙스가 다른 한자어를 말살하는 결과를 낳아 우리의 사고를 제한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니, 그보다도 정보화 세대를 자처하는 인터넷 세대들이 글자수가 6~7줄만 넘어가도 길다고 읽기 싫어하고 ‘즐’,‘비읍기역비읍기역(초성체-_-)’등 언어사용이 문장이 아닌 단어의 외침에 불과하게 되는 등 인터넷 세대의 빈곤한 어휘력과 단순하고 즉물적인 표현밖에 못하는 인터넷 세대의 사고력 저하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비록 조지오웰이 말하고자 한 바는 정치적 언어와 구호와 사상적인 언어의 단순화와 중의적으로 사용되는 언어사용의 제한이 가지는 사고의 제한이지만, 명확성과 편의의 이름하에 이뤄지는 한자어 사용의 쇠퇴와 빈곤한 어휘력등은 결국 다양한 표현을 말살하고 각각의 언어가 가지는 미묘한 뉘앙스를 무시하게 되어 결국 실제로 그러한 느낌을 가지지 못하게 되는 인간의 사고의 제한이라는 위험을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사고’와 ‘실존’에 대한 관계에 대해서는 윈스턴이 맡은 일로 보여준다. 1984에서 윈스턴의 직업은 정보를 조작하는 것이다. 대형은 항상 옳아야 하기에, 대형이 상을 줬던 사람이 변절하여 배신한다거나, 동아시아와 전쟁중이고 유라시아와 동맹중이다가 반대로 유라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동아시아와 동맹을 맺게 되는 등 상황의 변화가 있는 경우 1984의 대형은 모든 기록을 변경한다. 대형이 상을 주었던 기록은 모두 삭제하고 변절자는 옛날부터 변절자였고, 동맹군은 예전부터 변함없이 동아시아이고 예전부터 전쟁하던 상대를 유라시아로 모두 고쳐적는다.
우리가 보기엔 이게 무슨 우스운 일인가. 어제까지 전쟁하던 상대가 오늘 동맹군이라니. 그걸 떠나서 옛날부터 동맹이었다고 우긴다니 말이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현재를 지배하는 자는 과거를 지배한다고. 과거는 현재에 대해 항의할 수 없으며, 인간의 기억이란 애매하고 증명할 수 없는 것이므로 기록만 고쳐 적으면 결국 사실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역사는 승리한 자들의 손에 의해 쓰여진다고 하던가. 조지오웰은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멀리 갈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도 보아왔지 않은가? 어떠한 역사적 사실을 두고서도, 서로 다른 시각은 존재할 수 있다. 1984에서처럼 노골적이고 황당무계한 왜곡이 아니더라도, 4.19는 학생운동이었다가 혁명이 되었으며 5.16은 혁명이었다가 쿠데타가 되었고 5.18은 폭동에서 민주화운동이 되었다. 6.25는 남침이었으나 북침으로 만드려는 시도도 보인다. 우리의 역사에서 이러한 일들의 의미가 실제로 어떠한 것인지는 논외로 하더라도, 바로 지금 현재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에 의해서 과거는 얼마든지 다르게 평가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재는 과거를 지배한다는 것이며 역사적 사실이란 현재의 지배자의 기억과 주장일 뿐이라는 것이다.
오브리엔과 주인공과의 대화에서 오브리엔은 당당히 말한다. ‘지구는 평평하다. 우주가 지구 주위를 도는 것이다. 너의 손가락은 6개이다. 아니, 3개이다. 자네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모두 논리적으로, 실제적으로 거짓명제일 것이다. 그러나 오브리엔은 담담히 말한다.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지? ‘나는 존재하는가’에 대한 의문, 데카르트가 말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그리고 1984의 억압자는 이 생각을 위한 언어를 통제하고 그로써 그 존재를 통제하는 것이다.
오브리엔은 윈스턴에게 말하길 “옛날의 전제군주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걸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고 전체주의의 명령은 ‘너희들은 이걸 하라’라는 것이지만 우리는 명령하지 않는다. ‘너희들은 이렇게 되어있다 ’고 선언하는 것이다.”라고 한다. 이것이 전체주의의 완성형이다. ‘명령’도 아니고, ‘당위’를 강요하는 것도 아니며, ‘존재’자체를 규정지어 버리는 것이다. 아직 과거를 기억하는 구세대가 시간의 흐름으로 사라지고, 주인공과 같은 ‘반동분자’를 하나하나 교정해나가는 것으로 사회전체의 본성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 것- 인간의 자유의지를 애초부터 없었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그야말로 가공할만한 시스템이다. 흔히 헌법상 양심의 자유중 내심의 자유는 절대적 기본권으로 침해할 수 없다고 하는데, 나는 이를 공부할 때 굉장히 하나마나한 소리라고 생각했었다. 이런 것을 헌법상 보장한다고 할 필요가 있나? 애초에 이런 내심의 생각을 어떻게 침해한단 말인가? 그러나 이를 강제로 뒤바꾸는 일도 가능하다는 것을 1984를 읽으며 느낄 수 있었다. 왜 헌법이 이를 보장하고 있는지 알았다고나 할까.
윈스턴은 오브리엔에게 숱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그에게 감탄하고 있다. 그가 생각하는 바는 모두 오브리엔이 이미 생각한 적 있었던 것이며, 오브리엔에게 배운 지식이 바탕이 되어 있으며 윈스턴에 대해 모든 정보를 낱낱이 수집해온 오브리엔은 윈스턴이 하는 말의 진의를 그 누구보다도 바로 알아챈다. 자신에 대한 최고의 이해자가 자신을 부정하는 것이다. 윈스턴이 믿어온 모든 숭고한 가치라 할만한 것들을 스스로 부정했던 대답들이 녹음된 테이프를 들려주며 오브리엔은 윈스턴의 사고의 근본을 흔들어 놓는다. 이에 마지막으로 그가 사랑한 줄리아에 대한 사랑을 흔들리지 않는 자신의 존재증명으로 내세운 윈스턴에게 오브리엔은 일단 그것을 긍정한 후에 말한다. ‘우리는 자네를 순교시키지 않는다. 자네가 대형을 증오하는 동안에 자네를 처형하면 순교자로 만들 뿐이지. 우리는 모든 사상범이 마음 깊이 본심으로부터 회개하여 대형을 사랑하게 만든다. 자네가 진심으로 대형을 사랑하게 되기 전까지 자네는 처형당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한동안의 평온을 준뒤, 윈스턴의 최대 약점인 쥐를 이용한 고문을 하려하자 윈스턴은 자신의 사랑을 배반하여 외친다. ‘나대신 그여자를 집어넣으시오! 그여자를 죽여요!’라고.
그리고- 어떤 한 순간이였던지 간에, 그는 고문에 의해서 겉으로만 그렇게 외친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자신의 고통을 줄리아에게 전가하기를 바란 것이다. 유일하게 논박당하지 않고 긍지를 가지고 버팀목으로 삼았던 단 하나의 진실인 줄리아에 대한 애정조차 부정되고 스스로 부정하게 된 윈스턴의 마음은 변해버린다. 이것 역시 입밖으로 나온 언어가 생각을 이끌어 나가고 주인공의 존재를 바꿔버리는 모습인 것이다. 언뜻 보면 고문이 그의 생각을 바꾼듯이 보이지만, 육체적 고통이 아니라 논리와 사고에 있어서 최초의 대전제를 부정당해 버린 인간에게 있어서의 세계란 인간이 받아들이는 형태 외의 것으로 존재할 수 없고, 그 인간의 생각을 지배하면 존재도 지배하는 것과 다를 것 없는 것이다. 비록 그것이 진리는 아니더라도 우리 인간에게 있어서의 진실로서 말이다.
결국 광장에 앉아 윈스턴이 대형을 자신이 대형을 사랑함을 느끼는 순간, 고문에 의해 억지로 그렇게 말할 뿐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 되는 순간 마음 한구석에 커다란 구멍이 뚫리는 듯한 기분은 어찌할 수 없었다. 만물의 영장이니 인간의 존엄성이니 하는 ‘말’을 제거하면 우리는 스스로의 느낌과 본능만으로 행동하는 동물만큼도 자율성을 가지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 1984 원고를 읽은 영국의 출판사장 프레드릭 워버그는 직원에게 보내는 메모에 ‘이것은 위대한 작품이다. 그러나 제발 앞으로 몇 년간은 이 같은 작품을 읽지 않게 되기를….’라고 썼다. 아닌게 아니라 이 어두운 미래상을 보고 마음이 편한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나는 윈스턴과 같은 상황에서도 나의 자유의지를 지켜낼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 것인가?
인간의 실존은 그 사고에 달려있고 인간의 사고는 언어에 의해 이루어진다. 1984를 읽은 우리는 조지오웰의 언어와 사고와 그의 존재를 읽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이- 1984를 읽은 ‘나’의 존재와 사고를 표현하는 ‘나의 언어’이다. 지금 당신의 존재는 어떠한가? 당신은 어떠한 말을 하며 살아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