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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12/24 00:47:17
Name 피우피우
Subject [일반] 두 번째 연애 이야기
두 번째 여자친구를 사귀었던 것은 학부 3년차 때의 일이다. 대학교 3학년이 아니라 학부 3년차라는 애매한 표현을 쓰는 것은 2학년 2학기를 마치고 휴학을 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나의 자아와 미래에 대한 실존적 고민을 안고 성찰의 시간을 가지는 것이라 생각했으나,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그저 첫 연애와 첫 이별의 후유증에 시달렸을 뿐이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자아와 미래에 대한 고민을 하기는 했었으나, 그 고민의 시간은 탑 라인의 상성 구도와 라인관리법, 그리고 아름다운 이니시에이팅에 대한 고민의 시간보단 현저히 짧았다. 이런 고민들을 해결하기 위해 일주일에 7일 정도 피시방에 갔었고 그 중 하루나 이틀, 어쩌면 사흘은 피시방에서 게임을 하다가 미팅을 하러 가는 시간을 보냈다. 그 친구를 만났던 것은 그런 삶 속 벚꽃 핀 어느 봄 날의 미팅에서였다.

그날 미팅은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다. 밤 늦게까지 술자리가 이어졌고 막차가 끊긴 뒤에도 남자 쪽에서 둘, 여자 쪽에서 둘이 남아 넷이서 2차를 갔다. 뭘 하고 놀았는지는 하나도 기억나지 않지만 (옛날 일이라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기도 하지만, 술을 워낙 많이 먹었던 지라 아마 그 다음 날 일어나서도 기억이 없었을 것이다.) 첫 차 시간이 될 때까지 놀았던 것은 확실했다. 미팅에서 내 파트너였던 여자는 택시를 타고 집에 갔고 다른 여자 한 명은 지하철을 타고 간다고 했다. 나는 지하철을 타고 가는 여자를 배웅해주겠다고 했고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같이 플랫폼까지 내려가 열차를 기다렸다. 그리고 거기서, 정말로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뜬금없이 그녀에게 고백을 했다.

이 기행에 대한 변명을 조금 해보자면, 당연히 거나하게 올랐던 취기의 영향도 있었을 것이고 아마 당시의 나는 자각을 하지 못했을 뿐 많이 외로웠던 것도 같다. 게다가 나는 은근히 분위기에 잘 휩쓸리는 성격이었고, 여기저기 흐드러지게 피어난 벚꽃과 밤을 새고 맞이하는 시큰한 새벽 공기의 조합에 내 가슴 속 외로움이 많이 자극되었던 게 아닐까. 아무튼 하고 싶은 말은 그 상황에서 고백을 한 것이 내 입장에선 '그럴 수도 있는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그 친구가 내 고백을 받아주었다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만난 지 고작 몇 시간 만에 연인이 되었다. 우리 학교 캠퍼스엔 벚꽃이 예쁘기로 소문 난 길이 있었고, 마침 미팅 장소가 학교 근처였기 때문에 이젠 여자친구가 된 그녀를 그 길로 데려갈 수 있었다. 그렇게 손을 잡고 술 냄새와 꽃 향기가 뒤섞인 새벽의 캠퍼스를 걸었던 것이 우리의 첫 데이트였다.

그렇게 시작된 연애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가장 큰 문제는 내가 여자친구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성적인 호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게 큰 것은 아니었다. 설상가상으로 당시 나는 롤창 그 자체였고 롤을 할 때는 당연히 연락도 잘 받지 않았다. 게임 중에는 연락을 받지 못하더라도 한 판이 끝나면 콜백을 해줘도 됐을 텐데 그러지도 않았다. 심지어 약속에도 자주 늦었다. 나 스스로도 이러면 안 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여자친구도 아마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몇 달 뒤, 여자친구는 시간을 좀 가지자고 했다.

2주 정도 시간을 가진 뒤 여자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여자친구네 학교 캠퍼스에서 한 번 보자는 것이었다. 눈치는 나름 있는 편이라 오늘이 마지막일 거라는 직감이 들었고 마지막 날 만큼은 정말 최선을 다해 잘해주자는 다짐을 했다. 그렇게 다시 만난 여자친구에게 내 역량 내에서 최고의 데이트를 제공해주려 노력했고, 내 생각엔 그럭저럭 성공적인 노력이었다. 데이트의 끝에 여자친구는 본인의 과를 구경 시켜주겠다고 했다. 여자친구는 음악 쪽 전공이었고 그래서 과 건물엔 피아노가 있는 연습실들이 몇 개 있었다. 마침 방학이기도 해서 캠퍼스엔 사람이 별로 없었고 연습실들도 텅텅 비어있었다. 여자친구는 나를 데리고 그 중 하나로 들어갔고 거기서 이런 얘기를 했다. "내가 만났던 사람들은 다들 내 연주를 듣고 싶어했는데 오빠는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 얘기 안 한 거 알아?" 라고.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한 입 털기로 변명을 했고 여자친구는 조용히 피아노 연주를 들려주었다. 연주가 좋기는 했으나 솔직히 음악 자체에 큰 흥미가 없는 입장이라 상투적인 칭찬밖에 해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몇 곡의 연주를 듣고 밖으로 나왔다. 슬슬 돌아갈 시간이었고 나는 여자친구가 이별을 고하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여자친구가 갑자기 나를 끌어안고 울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오빠가 나를 안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그래서 헤어지자고 하려고 만난 건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아서 미안해...". 나는 몹시 당황했다. 누군가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상황을 상상해보지 못한 것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 이런 상황에서도 '좆됐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드는 스스로에 대한 당황이 더 컸다. 사실 마지막이라 생각해서 더 잘해준 것이고 굳이 따지면 별로 좋아하지 않았던 것도 맞긴 하지만, 그래서 '좆됐다' 만큼 솔직한 감정도 없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추한 감상이잖은가.

아무튼 그렇게 우리의 연애는 연장되었다. 그런데 그날 연습실을 나오며 스스로에게 들었던 경멸의 감정과 별개로, 여자친구에 대한 내 마음은 별로 커지지 않았고 내 행동도 그다지 바뀌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사실 내 마음이 별로 크지 않아'라고 말할 용기가 없었던 것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먼저 이별을 말할 용기조차 없었다. 결국 시간을 갖기 이전과 변한 것은 없었고 그렇게 다시 몇 달 뒤 이번에야말로 여자친구는 정말로 이별을 고했다. 나는 그 뒤로 웬만해선 누군가에게 먼저 고백을 하지 못했다. 여자친구의 눈물을 본 날, 그리고 그 이후 몇 달 간의 내 모습에서 느꼈던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은 우습게도 진짜였던 모양이었다.

이 친구와의 긍정적인 기억들 중 가장 인상적인 건 고백하던 날의 기억이다. 고백을 한 직후였는지 아니면 벚꽃을 보고 와서 다시 지하철로 바래다 줬을 때였는지, 지하철 승강장에서 여자친구와 포옹을 했었다. 그 때 여자친구는 '이렇게 공공장소에서 스킨십 하는 걸 안 좋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너무 좋다'는 말을 했었다. 그 장면이 떠오를 때면 내가 이 친구에게 조금 더 좋은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조금 더 성숙하게 사랑을 받는 방법을 알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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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림과 다름
23/12/24 12:15
수정 아이콘
너무 쉽게 고백했고
너무 쉅게 받아들여졌기에
롤보다 덜 중요시여기게 되었고
그래서 이리 된거 아닐까요?
피우피우
23/12/24 14:45
수정 아이콘
그런데 사실 저렇게 사귀지 않았다면 사귈 일이 없었을 것 같긴 합니다..
애초에 오래 만날 관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 기간동안이라도 좋은 기억이 되지 못한 것 같은 게 좀 아쉬울 뿐이죠.
마일스데이비스
23/12/24 16:34
수정 아이콘
충분히 좋은 기억인 것 같습니다
서로 저 때 아니고서야 하기 힘든 경험일테니까요
피우피우
23/12/25 11:35
수정 아이콘
그렇게 얘기해주시니 뭔가 감사하네요 크크
행복한 크리스마스 되세요
여행가요
23/12/24 16:22
수정 아이콘
지나간 사랑은 항상 '그때 좀 더 잘할 걸' 하는 아쉬움이 남더군요...
피우피우
23/12/25 11:35
수정 아이콘
딱 그 정도 아쉬움인 것 같기는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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