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GR21.com
Date 2007/03/05 14:36:45
Name 공룡
Subject 드라마
  아내가 보는 드라마 중에 ‘하얀거탑’이란 드라마가 있습니다.
  일본의 드라마를 가져왔다고 하는데, 내용이 참 재미있다고 하더군요.
  주인공이 선인이 아니라 오히려 악인에 가깝고, 어떤 소재로 가던 결국은 사랑이야기로 점철되는 요즘의 드라마와는 많이 다르다고 하는 소리를 자주 듣긴 했지만 워낙 드라마 종류를 싫어하는지라 제대로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이번 주말에 아내와 함께 하얀거탑을 보게 되었습니다.
  전후 사정을 대충 들었고, 인터넷에서 주워들은 것도 있어서 주인공이 병으로 죽게 되리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마침 암에 걸리는 모습이 나오더군요.
  ‘담관암’
  한 의사의 입에서 나온 말에 깜짝 놀라 아내를 돌아보았습니다. 아내는 그냥 쓴웃음만 짓더군요. 그러면서 혼잣말처럼 말합니다.

  “의학용어 잘 못 알아듣겠더니 지금 설명하는 것들은 다 알아듣겠네.”

  몇 주 전 장인어른은 담관암 판정을 받으셨습니다. 그때는 담관암이라는 암 자체가 너무나 생소했고, 소견서의 내용도 너무 어려웠었는데 이제는 저도 대충은 알아듣겠더군요. 가망이 없다는 것 역시 말이죠.

  너무나 비슷한 상황이었습니다. 장인어른은 극 중의 장준혁처럼 갑자기 쓰러지셨고, 비슷한 증상을 호소하셨습니다. 그리고 의사들로부터 담석의 일종이라는 거짓 설명을 들으셨습니다. 물론 장준혁은 의사이니, 게다가 자신의 전문 분야이니 곧 알아채겠지만 장인어른은 누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모르실 것입니다.

  장인어른은 수술불가의 판정을 받으시고 퇴원하셨습니다. 가족들은 언제 이 사실을 알릴 지에 대해 지금도 고민하고 있습니다. 아예 알리지 말자는 분들이 많습니다. 역시나 극 중의 장준혁처럼 장인어른 역시 성격상 암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시면 일찌감치 생을 포기하시고 그 끈을 놓아버리실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입니다. 드라마가 실제로 있을 지도 모르는 상황을 만들어 시청자의 공감을 이끌어낸다고는 하지만 이번만큼 절실하게 와 닿은 적은 없는 것 같군요. 그것도 다른 드라마에 비해 비교적 공감대 형성이 적은 병원드라마에서 말이죠.

  하얀거탑은 이제 곧 끝이 난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 가족의 드라마는 앞으로 1년 가까이 지속되겠지요. 암세포에 고통스러워하며 점차 쇠약해지시는 가장의 모습을 바라봐야 할 가족들의 아픔을 사위인 저 역시 느껴야 할 것입니다.

  문득 난폭토끼님이 생각납니다. 삼가 조의를 표한다는 댓글을 남기긴 했지만 그건 남의 드라마일 뿐이었습니다. 가슴이 아프긴 했지만 그게 오래 갈 수는 없었죠. 아직까지 저와 아내는 드라마가 자신의 현실이 되었을 때 대처하는 방법에 대해 너무나 서툽니다.

  앞으로 몇 번을 더 겪어야 할 드라마인데 말이지요. 부모님이 암에, 노환에, 치매에 걸려, 혹은 사고로 인해 이별을 준비해야 할 때, 과연 드라마처럼 그렇게 의연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군요. 그리고 제가 그 당사자가 되었을 때 역시도요.

  부모님과 서로의 체온을 나눌 수 있을 때 많이 사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아내 역시도요. 컴퓨터에서 조금 떨어져서 좀 더 많은 시간을 사랑하는 이들의 체온을 느끼며 살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물론 쉽지는 않겠지만요^^

  철부지 시절 짝사랑을 할 때, 들리는 노래가사가 모두 내 이야기만 같고 청춘 드라마에서의 사랑이야기가 다 내 사연인 것 같을 때가 있었는데, 그 때와는 또 사뭇 다른 느낌입니다. 이제야 꿈에서 깨어난 것 같다고나 할까요? 현실이라는 드라마에서 말입니다.

  드라마의 주인공들처럼 열심히 살아야겠습니다. 어쨌건 제 삶의 주인공은 저 자신이니 말이죠^^


  늘 즐거운 하루하루 되시길, 그리고 열심히 살아가는 하루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 anistar님에 의해서 게시물 복사되었습니다 (2007-03-09 12:45)

통합규정 1.3 이용안내 인용

"Pgr은 '명문화된 삭제규정'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은 분을 환영합니다.
법 없이도 사는 사람,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 같이 이야기 나눌 수 있는 분이면 좋겠습니다."
07/03/05 14:44
수정 아이콘
네. 제 아내에게도 늘 장인, 장모님에게 잘하라고 이야기는 하는데... 전 별로 그러지 못한 것 같아 가슴 한 편이 찔립니다.
20세에 돌아가신 아버님이 그렇게 가슴이 미어지도록 보고 싶지는 않지만 그때 보았던 당신의 앙상한 모습은 아마 제가 이 세상을 떠날때까지 잊혀지진 않을 것 같아요.
때가 되면 우리모두 누군가와 또는 누군가에게 잊혀지는 존재가 될텐데...
미리미리 준비해도 그때가 되면 늘 힘들겠지요.
날씨도 꾸물꾸물한데 오늘은 어머니에게 전화나 한 통 해야겠네요.
공룡님도 늘 즐거운 하루 되시고 친가 처가 부모님에게 사랑 많이 많이 드리세요. ^^
언뜻 유재석
07/03/05 18:26
수정 아이콘
공룡님 오랜만이시네요..^_^ 언젠가 이 주제로 글 하나 쓰려고 마음 먹고 있었는데 말이죠.. 비현실적인 현실에 대해서.. 저도 누군가가 제게 붙여준 별명중 하나가 주말연속극 이랍니다.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삶을 살고 있다구요.. 저희 어머님은 담석이신데.. 요새들어 자꾸 허리가 편찮으시다고 하시는게 심상치 않아 보입니다. 어떤 드라마이건 간에 배우가 훌륭한 드라마는 반드시 성공하더군요.. 성공한 드라마 만들어보아요..^^/
사탕한봉지
07/03/05 23:32
수정 아이콘
누군가에겐 드라마가 또다른 누군가에겐 현실이 되는군요...
자신이 주인공인 드라마 속에서 열심히 살자구요 ^^
07/03/06 00:08
수정 아이콘
저의 할머니는 췌장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저희 집 이야기니 참고만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췌장암 선고를 받았을때, 의사가 '췌장암은 열어봐야 안다. 하지만 기대는 마라'라고 어찌 보면 잔인하게 말했을때 저와 아버지는 고민을 해야 했습니다. 저같은 경우는 부모님과 떨어져 사는 유년 시절과 청소년 시절을 모두 할머니와 함께 보냈기에 그 고민은 더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태어나던 순간부터 저와 함께 해온 할머니였고 열여섯에 아버지를 낳고 아버지가 저를 열아홉에 가졌기 때문에 저와의 나이차이는 4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 어디 가면 엄마라고 그랬었죠. 제가 스무살 되던 해엔 예순도 되지 않으셨었습니다.

그렇기에 더욱 고민할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애절함은 결국 저 자신의 문제였고 아버지의 애절함 또한 그러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중요한건 할머니의 인생이었다고 생각했죠. 우리가 병을 숨기는 것은 결국 할머니에게 인생을 되돌아볼 기회조차, 죽음을 맞아 스스로를 정리할 기회조차 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렸고 아버지는 한참을 울었습니다.

의사가 예상한 기간은 6개월이었고 정확히 판정 후 6개월만에 돌아가셨습니다. 그 동안 절에 다니시면서 불공을 드렸고 저와 동생에게 이런 저런 이야기도 해주셨습니다. 저희 할머니 성정이 그러한 건지 의외로 담담하시더군요.

돌아가시기 한달 전에 '나는 다음달을 넘기지 못할꺼야'라고 이야기하셨습니다. 어린 제 손을 잡고 가시던 친척이 운영하는 미용실에서 스무살이나 된 저의 손을 잡고 의자에 앉히시며 가위가 머리를 자르기 시작하자 그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차를 젓듯이 하시는 말씀이 너무나도 안타까웠습니다.

이후 저는 생각하게 됩니다. 제가 아무리 안타까워하더라도 그것은 저 자신의 상처일 뿐이라는 것을요. 그 때 숨겼다면 할머니는 영문도 모른체 고통속에서 돌아가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할머니의 인생은 할머니 것이기에 알려드렸고 할머니께서 예정된 죽음을 맞아 무엇을 정리하셨으며 무엇을 생각하셨는지는 저도 잘 모릅니다.

사실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알려드린 것이 잘 한 것인지, 할머니께서 인생을 돌아보셨다는 것이 저만의 생각인지 스스로 정리할 기회를 드린 것이 잘 한 행동인지를요. 저는 그렇게 믿고 있지만 그것은 저의 오만이거나 혹은 자기 위안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할머니의 인생을 할머니 모르게 주위 사람만 알고 있는다는 것이 불공평하다 생각했고 반추할 기회조차 드리지 못할 순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제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었습니다.
에브리리틀씽
07/03/06 01:05
수정 아이콘
아.. 시퐁님 댓글에 숙연해지네요.... 인생에 있어 정답이란 무엇일까 다시금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사고뭉치
07/03/06 06:08
수정 아이콘
오랫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죠?
공룡님 부부와 공룡님의 장인어른분까지 모두 힘내시길 바랍니다.
07/03/09 14:17
수정 아이콘
어떻게 지내시나 궁금했는데, 오랜만에 뵙는군요.
세상이 어수선하고 시절도 하수상한데 다행히 잘 지내시나 봅니다. ^^
장인어른께서 연세가 어떻게 되셨는지 모르지만 걱정이 많이 되시겠습니다.

정말 사람은 사람마다 각자의 드라마가 있는 것 같습니다.

저는 효자는커녕 불효자에 가깝지만, 근 8년동안 별거아닌 별거하면서 용인의 가족과 떨어져 부산에서 사는 건 어머니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 본사에 올라가려면 벌써 갈수도 있었지만, 어머니께서 용인은 시골이라서 답답하시다며 저따라 용인가서 사는 걸 거부하셔서, 이런저런 핑계로 부산에 눌러앉아 있습니다.
어머니께서야 평생을 부산에서 사셨고, 저 외의 자식들 모두, 그리고 일가친척 모두 부산에 있으므로 부산에서 사시는 걸 당연히 좋아하시겠지요.

그래도, 어차피 제가 내년에는 정년퇴직하게 되므로 또다시 어머니와 헤어지게 될 것 같습니다.

어릴 때는 어머니께 섭섭한 것이 많은데다 제 속이 밴댕이 속이라 어머니 속을 많이 썩여 드렸는데, 저도 나이들고 자식들이 장성하다보니 삼십대 초반에 홀로되어 평생 우리 4남매키우느라 고생만 하신 어머니가 너무 애처롭게 생각되더군요.

사실은 나 편하게 살자고 어머니를 제대로 모셔보지도 못한채 그대로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면 얼마나 비통한 눈물 흘릴까 싶어, 나중에 가슴 찢어지는 후회하지 않으려고 지금은 다소 불편해도 이대로 살고 있습니다.

재작년부터 아이들이 모두 제 앞가름 할 만큼 되자 아내가 부산 내려오겠다고 했지만, 제가 말렸습니다.
아내도 맏딸인데다 팔순 가까운 장인장모님이 이웃에서 두분이서만 살고 계십니다.
도와드리는 것 없이 오히려 늘상 신세만지고 사는 처갓댁이지만, 그래도 거의 매일 병원 나들이 하지 않으면 견디지 못하는 두분께서는 바로 옆에 우리가족이 살고 있다는 걸 은근히 듬직하게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게다가 딸애가 대학 졸업하고 직장 다니긴 하지만, 아직은 엄마가 옆에서 챙겨줘야 할 것 같고 말입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나 자신 언젠가는 용인의 시골집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삶의 터전은 한번 떠나면 다시 돌아가기 어려울 것 같아서 아내가 용인집을 지키고 있길 바라고 있습니다.

어느새 용인집 마당의 잔디가 좋고, 흙냄새 풀냄새, 울 밖의 밤나무 감나무, 이름모를 새소리가 좋은 걸 보니 저도 나이가 먹긴 먹었나 봅니다.

언제한번 체육관에서 공룡님이 사 오시는 빵과 음료수가 먹고 싶습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가정에 은총이 가득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분수님, 언뜻유재석 모두 올만입니다~ ^^
난 내가 좋다!
07/03/10 23:27
수정 아이콘
아. 가슴이 아프네요.
덧없는 인생. 무엇을 위해 그렇게 열을 내고 살아가는지..
푸른기억
07/03/12 15:46
수정 아이콘
다들 기운내서 따뜻하게 삽시다...
목록 삭게로! 맨위로
번호 제목 이름 날짜 조회
489 난 동족전이 좋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26] Zwei9319 07/04/18 9319
488 "이 멋진 세계로 나를 초대해줘서 고마워요." [15] 네로울프11198 07/04/15 11198
487 FP를 이용한 게임단 평가입니다. [19] ClassicMild9571 07/04/14 9571
486 허영무. 부지런함의 미학. [19] 김성수14557 07/04/03 14557
485 3인의 무사 - 오영종, 박지호, 김택용 [20] 나주임10689 07/04/02 10689
484 양방송사 개인대회 순위포인트를 통한 '랭킹' [27] 信主NISSI12408 07/04/01 12408
483 FP(Force Point) - 선수들의 포스를 측정해 보자! [40] ClassicMild11547 07/04/01 11547
482 김택용 빌드의 비밀 [42] 체념토스18671 07/03/31 18671
481 광통령, 그리고 어느 반란군 지도자의 이야기 (3) - 끝 [35] 글곰11202 07/03/11 11202
480 [추리소설] 협회와 IEG는 중계권에 대해서 얼마나 준비를 했을까? [40] 스갤칼럼가12504 07/03/10 12504
479 쉬어 가는 글 – PGR, 피지알러들에 대한 믿음2, 그리고… [20] probe9447 07/03/08 9447
478 드라마 [9] 공룡9296 07/03/05 9296
477 마에스트로의 지휘는 어떻게 무너졌는가? [35] 연아짱17780 07/03/05 17780
476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13] 초코머핀~*11735 07/03/02 11735
475 MSL 결승전에 대한 짧은 분석. [3] JokeR_11375 07/03/04 11375
474 일주일의 드라마 - StarCraft League, Must Go On. [4] The xian8805 07/03/04 8805
473 [설레발] 광통령, 그리고 어느 반란군 지도자의 이야기 (2) [30] 글곰11823 07/03/03 11823
472 최연성과 마재윤은 닮았다. [17] seed12284 07/03/02 12284
471 마재윤선수의 '뮤탈 7마리' (in Longinus2) [48] 체념토스18534 07/02/28 18534
470 잃어버린 낭만을 회고하며... 가림토 김동수 [21] 옹정^^10573 07/02/27 10573
469 임요환의 패러다임 그리고 마재윤의 패러다임 [20] 사탕한봉지11907 07/02/27 11907
467 제 관점에서 바라본, 마재윤의 테란전 운영 [27] A.COLE13360 07/02/25 13360
466 마재윤을 낚은 진영수의 나악시 두번 [30] 김연우15422 07/02/25 15422
목록 이전 다음
댓글

+ : 최근 6시간내에 달린 댓글
+ : 최근 12시간내에 달린 댓글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