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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23/04/11 20:10:02
Name 具臣
Subject [일반] 심심해서 쓰는 무협 뻘글 15 (수정됨)
역사적 사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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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루신마!
어느 지역의 패자覇者가 된 적은 없지만, 그래도 시대를 풍미風靡한 고수였다. 비록 무공이 시원찮지만 오대세가에 당당히 한자리 차지하는 제갈세가를 단신으로 능히 대적한 사람이 아닌가. 이런 고수가 제갈세가에서 베푼 불의 저주 한번에 숯덩이가 되어버리다니. 강호는 들끓었다.

강호가 제아무리 시끄러워도, 제갈세가에 몰아친 격랑만은 못했다. 모두가 구정만을 이야기하고 구정만을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하루아침에 주어진 힘을 어떻게 써야 할지 몰라 허둥거렸다. 강호 모든 방파의 일은 그 곳의 위상에 맞게 이루어지는 법. 다른 문파와의 관계에서부터 이권과 각종 거래는 물론 신규 방도 모집까지 모든 업무가 강호 제세력과의 관계에 기반한 것이었다. 선을 넘으면 보복을 당했고 선에서 물러서면 쪼그라들었다.
그런데 이제 어디까지 어떻게 뻗어나가야 하는 것인가? 엄청난 기회가 왔다는 것은 모두가 알지만, 그 기회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이었다. 단 한사람 제갈린만 빼고. 제갈린은 지난 7년간 오늘만을 기다려왔다. 당연히 누가 무얼해야 할 지 꼼꼼히 생각해두었고, 이제 그 보따리를 풀기 시작했다.
원래 제갈세가의 한림원은 아무런 실권이 없는 허울만 좋은 자문기구였다. 자문기관이란 여기저기 숟가락 얹기 좋은만큼, 밀리면 그렇게 무시당하기 좋은 곳도 없기마련. 한림원은 그저 뒷방 늙은이들 바둑두는 곳이었다. 한림원 다음으로 가게 되는 곳은 병석病席, 그 다음은 무덤이었으니. 오죽하면 제갈식이 제갈린을 한림원주로 보냈을까.
그런데 이제, 제갈린만이 모든 일을 차근차근 지도하게 되면서, 모두가 제갈린에게 나아갈 길을 물었다. 한림원은 하루아침에 명실상부한 실세 자문기관으로 탈바꿈했다.

그렇게 수십년만에 처음으로 바쁘게 일하던 제갈린에게 제갈천이 찾아왔다. 길에서 마주쳐도 본체만체하던 놈이 진귀한 예물들을 잔뜩 챙겨서.
제갈린은 겉으로는 태연했지만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드디어 올 게 왔구나. 삼부자가 모두 통발에 들어왔다!
제갈천은 꽤 오랜시간 밀담을 나눈 뒤 돌아갔고, 제갈린은 짐짓 비싼 선물들에는 흥미가 없는 양 주변에 나누어주었다. 사람들에게 자신은 이제 제갈천도 찾아오는 실세라는 것을 각인시키는 동시에, 제갈민에게 네 동생이 수작을 부린다고 흘려서 싸움을 붙이기 위해.

제갈린이 제갈천을 가지고 놀던 그 때, 제갈민은 제갈식에게 죽간을 보여주고 있었다. 천하를 얻기 위해 치러야 하는 댓가가 무엇인지 쓰여진. 제갈식은 죽간을 세번 정독한 뒤 아무 말이 없었다. 제갈민도 천을 삶자고 말하긴 뭐해서, 제갈세가가 천하를 차지해야 하며, 망설이다가 다른 세력이 구정을 약탈해가면 끝장이지 않겠냐고만 에둘러 얘기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도 아무 말이 없는 제갈식을 보고, 운을 띄웠는데 진노하지 않았으니 일단 괜찮은 성과라고 판단하고 물러났다. 승부를 낼 묘수는 이제 곧 준비될테니.
그런데 제갈민은 제갈식의 속을 잘못 짚었다. 제갈식에게 처자식은 자신의 소유물이었다. 아버지가 아프면 똥을 찍어 맛보고(상분嘗糞), 병이 낫지 않으면 자신의 넓적다리 살을 구워먹이는(할고割股) 효행을 아버지의 권리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그는 내가 아프면 내 아들들은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믿었다. 물론 자신은 아버지에게 그런 적이 없지만.
무지렁이들도 아버지 병구완을 위해서 저러는데, 세가의 공자들이라면 아버지를 천자로 만들기 위해서 못할 일이 없어야 하는 것 아닌가? 제갈민과 제갈천이 누구를 닮아서 저러는지는 뻔했다.
다만 제갈식은 자신이 바라는 것을 스스로 입을 열어 말하기 싫어하는, 아랫것들이 눈치껏 알아서 해줬으면 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말이 없었던 것이다.

제갈식 앞에서 물러난 제갈민은 죽간을 자기편인 제갈세가의 원로들과 간부들에게 보였다. 앞으로도 고루신마 따위나 굽고 있을 겁니까? 사나이로 태어났으면 천하를 호령해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강호의 숱한 방파 중 하나인 제갈세가 가신으로 살다가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요하腰下에 대장인大將印을 빗기차고 동정서벌東征西伐하야 공명功名을 죽백竹帛에 드리우시겠습니까.
이제 말발이 먹힌다 싶자 제갈천의 편에 선 주요인사들 가운데 넘어올만한 사람들부터 하나씩 슬금슬금 불러냈다. 몇이 넘어왔다는 말이 돌자 나머지도 앞다투어 우루루 몰려왔다.
제갈민과 천 형제는 애초에 크게 다른 사람들이 아니었다. 민과 천 때문에 파벌이 나뉘는데 고상한 대의명분 따위는 없었다. 아니 명분을 따지자면 적장자인 민에게 있다고 봐야할 것이고, 실리로 따져도 구정의 공로에 비할까. 바닥 좁은 곳에서 소문이 돌면 그 주인공만 모르듯, 제갈천은 자신만 모르게 고립되고 있었다.

제갈천이 자신만 모르는채 쓰러져가던 그 때, 사천당문으로 급파되었던 사자가 돌아오다가 제갈민에게 사로잡혔다. 여기에서 제갈민은 크게 질렀다. 하독의 상대를 자신만이 아닌 아버지까지로 뒤집어 씌운 것이다. 물증인 전서구의 서찰과 사자가 받아온 독에는 당연히 하독 대상이 쓰여있지 않았다. 제갈민이 받았던 서찰은 이미 없애버렸다. 제갈천이 범행계획을 문서로 남겼을리도 없다. 재수없게 위험한 심부름을 했을 뿐인 사자의 입에서 제갈민이 바라는 말을 끌어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제갈린도 제갈천이 수상한 태도로 뭔가 의미심장한 소리를 하더라는 증언을 했다. 아버지를 노리지 않았다는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 제갈천에게 불리한 정황 투성이였다.
격분한 제갈식의 명으로 제갈천과 그 수하들이 잡혀들어왔다. 제갈천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아는 수하들은 제 한몸 빠져나가기 바빴다. 제갈민의 거짓과 맞설 생각이 없었고, 격노한 가주 앞에서 제갈천을 위해 진실을 밝힐 담력도 의리도 없었다.

처음에 제갈천은 형을 잠시 누워있게 만들 짓만 했기에 큰 저항없이 오라를 받았다. 그러나 자신이 아버지와 형을 노린 강상죄인綱常罪人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자, 발악을 해보려 했지만 너무 늦었다. 구정의 법술에 아들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지 못한 채, 누명을 썼으니 가주가 되기는 글렀고 평생 찬밥만 먹게 되었다고만 생각했다.

제갈천을 삶을 준비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제갈식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고, 제갈민은 황태자가 될 시기를 늦출 사람이 아니었다. 평소 제갈천은 아랫사람들을 대할 때마다, 입버릇처럼 제갈세가를 위해 모든 걸 바쳐야한다고 질책했다. 이제 아랫사람들은, 제갈천이 제갈세가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게 되었다며 비웃었다.
제갈천을 삶는 일이 돌이킬 수 없게 되자, 지금껏 말을 아끼던 제갈린이 나섰다.
ㅡ 우리 제갈세가가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된 것이오! 사마외도가 아닌 제갈세가 식구를 제물로 바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내가 이러려고 구정을 찾은게 아니오! 차라리 구정을 황상께 바칩시다. 중상重賞을 내리실테니, 그 돈으로 제갈세가를 일으켜 세웁시다.

연산과 구정의 일등공신이니 그 말을 끊지는 않았다. 그러나 공신에 대한 예우는 거기까지. 아무도 제갈린을 따르지 않았다. 제갈식도 말이 없었지만, 힘이 들어간 눈썹과 굳게 다문 입술은 누가 봐도 찬성이 아니었다. 잠깐 불편한 침묵이 흐르자, 제갈린은 마치 분에 못 이긴 양 앞으로 다시는 법술을 행하지 않겠으며, 누구도 자신에게 술법과 관련된 요청을 하지 말라는 선언을 하고 자리를 박찼다. 하지만 연산과 목간이 제갈민에게 있기에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

그날 밤, 다시 의식이 베풀어졌다. 곤위지坤爲地의 괘에 맞춰 구정을 놓고 정화수를 부은 다음, 측백나무 장작으로 불을 지폈다. 머리를 풀어헤친 제갈식은 장검을 짚고 서있었다. 혹시라도 부정父情 때문에 일을 그르칠까 걱정한 제갈민은 제갈천의 마혈과 아혈을 짚은 것도 모자라 삼베로 얼굴까지 싸버렸다.
그런데 물이 끓기 시작하고 피를 바르자, 안개가 구정과 주위 사람들을 감싸는 것이 아닌가. 사람들은 역시 개세蓋世의 술법은 시작부터 다르다며 수군거렸다. 제갈천이 솥에 들어갔고, 그 숨이 끊어지자 안개는 핏빛으로 바뀌더니 사람들 몸으로 스며들어갔다. 사람들이 비틀거리더니 울부짖는다.
크아아악...
이들의 눈이 동태눈깔처럼 변하더니 흐느적 거리며 물어뜯을 것을 찾기 시작했다.

백여장 밖에서 술법을 지켜보던 독고진의 눈이 커졌다. 독고진 정도의 내공이라면 백여장 밖에서도 바로 코앞처럼 보고듣기 마련, 사부에게 귀가 따갑게 듣던 변화를 알아본 것이다.
ㅡ 이, 이건!
독고진은 바로 축골공을 풀더니 몸을 날렸다. 독고진의 무공으로도 축골공을 쓴 상태에서는 헤쳐나갈 수 없었던 것이다. 그날 제갈세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혈라강시가 되었다. 독고진만 빼고.

저녁을 먹던 사마염은 갑자기 극마대가 들이닥치자 놀라서 젓가락을 떨어뜨렸다. 교주의 수신대가 왜?
ㅡ 뭔가?
사마염의 물음은 무시한 채 극마대의 무사는 기세좋게 소리쳤다.
ㅡ 반적 사마염은 교주님의 명을 받들라!
저항도 못하고 점혈된 사마염은 혁련환 앞으로 끌려갔다.
ㅡ 자네, 나에게 할 말 없나?
ㅡ 무슨 말씀이신지.....
혁련환은 픽 웃더니 독고진을 본다. 독고진은 사마염에게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ㅡ 아무 일도 없어야 할 구정에서 조화가 일어났다. 제갈세가의 모든 사람들이 혈라강시로 바뀌더군. 나도 간신히 살아나왔다.
ㅡ 그, 그럴리가....교주님, 제가 어찌된 일인지 알아내겠습니다.
ㅡ 흐흐흐흐...네가 날 속여!
혁련환이 손을 들어올리자, 사마염은 마치 빨려들어가듯 날아가 그 손에 붙어버렸다.
ㅡ 허어억...
사마염이 비명도 못 지르고 쪼그라들더니, 마치 누런 종이로 감싼 해골처럼 되어 풀썩 땅에 떨어졌다.
ㅡ 흠....잡기로 익혀봤더니 흡성대법도 쓸만하군. 일갑자 내공인데 본교의 기운뿐 혈교의 기는 없어.
ㅡ 그러면 사마염은 정말로 몰랐던 걸까요?
ㅡ 그건 이제부터 네가 알아내야지.
ㅡ 존명!
혁련환의 눈빛을 본 독고진은 얼른 물러났다. 지금 말 한마디 잘못했다가는 나도 당한다.

열흘 뒤.
ㅡ 제갈식이 펼친 법술은 혈교의 구정대법이었습니다. 구정은 혈교의 신물神物이었던 것입니다.
ㅡ 구정대법!
ㅡ 예, 혈라강시를 만드는 법술입니다. 오십년전 전 교주께서 혈교를 멸문하실 때, 혈교의 잔당들이 구정을 숨겼었습니다. 그리고 숨어있다가 본교의 세대교체가 이루어져 혈교가 어느 정도 잊혀지자, 구정을 우리에게 흘려 복수를 꾀한 겁니다. 혈교의 잔당들은 우리가 구정대법을 올리고 혈라강시로 되길 바랬습니다. 그런데 사마염이 그걸 제갈세가에 넘기면서 제갈세가가 당한 것이지요.
ㅡ 혈교 놈들은 사마염이 제갈민, 내가 제갈식이 되길 바란 거였는데, 뜻밖에 사마염이 구정을 제갈린에게 던지면서 제갈세가가 당했다?
ㅡ 예, 정확한 통찰이십니다.
ㅡ 그 수를 쓴 혈교 떨거지들은?
ㅡ 이미 다 죽었습니다. 잔당들은 내상을 크게 입어 폐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게다가 전 교주님께서 혈륜공의 비급을 빼앗으신 뒤라서, 후인을 길러 복수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죽기 직전에 마지막 발악으로 신물을 걸었던 겁니다.
ㅡ 하기사 혈륜공은 일인전승이니 교주와 그 제자가 죽고 비급을 잃으면 끝장이지. 뭐, 어찌되었든 우린 손해가 없군. 사맹과 혈라강시들이 정파놈들을 헤집어놓고 있으니, 우리 일은 아주 수월해졌어. 혈라강시 그거, 모르고 당하면 답 안나오지. 살다보니 혈교 놈들 덕 볼 일이 다 있구만.
ㅡ 예, 그렇게 되었습니다.
ㅡ 다들 사맹과 혈라강시를 잘 피해서 계속 숨어있으라고 해. 정파놈들이 간신히 그걸 마무리 짓는 순간에 거사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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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23/04/11 22:32
수정 아이콘
! 1번!
23/04/11 23:53
수정 아이콘
매번 고맙습니다.
23/04/12 01:37
수정 아이콘
갑자기 엄청난 전개네요.
23/04/12 12:43
수정 아이콘
못이 깊어야 용이 서리고 골이 깊어야 범이 살죠.
무림에 위기가 와야 주인공들이 크니까 이리 썼는데, 많이 갑작스러웠군요. ^^;;
23/04/12 12:49
수정 아이콘
아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었습니다. 상상을 초월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주시길…
23/04/12 12:51
수정 아이콘
좋게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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