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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2015/08/19 03:21:04
Name 박기우
Subject [일반] 눈의 꽃 (1)
1.
아침 7시.
부산스러운 분위기에 잠에서 깼다.
최근 잠을 잘 수 없는 상황이 계속 되어서 잠을 제대로 잘 시간이 없었는데 새벽 4시쯤 겨우 잘 수 있어서 기절하듯 잠이 들었다. 하지만 어수선한 분위기에 본능적으로 싸한 느낌이 들어서 그런지 눈이 떠지고 말았다. 고개를 들어서 앞을 보니 여자 친구의 어머니가 멍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계셨다. 체념한 듯한 슬픔과 쓴 웃음이 섞여있는 묻어나는 목소리로 아직도 잊히지 않는 말을 하셨다.
'일어났구나. 아까 간호사가 왔다 갔는데 유진이 맥박이 없대. 그래서 이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준비하래.'
언젠간 올 줄 알았던 상황이라 수십, 수백 번 상상하였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 순간이 오고 말았다. 받아들이기 힘들지만, 사람의 힘으로 더는 막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가 생각보다 담담한 느낌도 들었다.  이제 그녀를 떠나 보내야 할 때가 되었다. 5개월이 지난 지금도 인정하고 싶지만 말이다.

2.
나와 그녀의 만남은 앞으로의 이야기만큼 특별하지 않다. 4년 전, 2011년 10월 우리는 20대 후반 남녀들의 만남의 장소로 유명한 면접 스터디에서 처음 만났다. 당시에 나는 의학전문대학원 입시 재수생이었다. 9월 시험 결과가 나온 후 면접 준비를 하기 위하여 강남 P 학원에서 광고하는 면접 스터디에 지원하였다. 좀 건방지게 들릴 수 있지만 사실 나는 면접 스터디를 굳이 할 필요는 없는 상황이었다. 재수생의 버프를 제대로 받아서 그런지 초수 때와 다르게 MEET(의학전문대학원 입시 시험으로 수능과 같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성적이 매우 잘 나왔기 때문에 면접장에 가서 똥을 싸고 면접관에게 싸대기를 날리지 않는 이상은 붙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지금 생각했을 때 면접 스터디를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 중 하나는 더 이상 실패 할 수 없기에 성적이 좋아도 0.1%의 불합격 요인을 없애야 겠다는 마음과 함께 대학생 이후로 지속되어 온 솔로 인생을 끝내고자 면접 스터디에서 인연을 찾아봐야겠다는 불순물 가득한 마음이 솔직히 더 컸었다. 초수 때도 면접 스터디를 했는데 꽤 괜찮았던 기억도 한 몫 했던 것 같다. 물론 그때는 나 빼고 모두 붙어서 뭔가 해볼 기회조차 없었던 건 슬픈 기억이었지만 말이다.

10분. 내 인생의 갈림길을 바꾸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고 딱 10분 이었던 것 같다. 부끄럽지만 나는 시간 약속을 잘 지키지 못한다. 지각도 잦은 편이라 대학교 시절에도 출석 부족으로 F를 받을 뻔한 적도 많았다. 여자친구도 항상 이것에 불만이 있었고 첫 만남에도 안 좋은 습관은 어김없이 드러났다. 면접 스터디 첫날에도 나는 지각을 했다.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지만 모임 약속 시간이 7시였는데 8시 조금 못 되어서 도착 했던 것 같았다. 내가 필사적으로 뛰어서 도착했을 때 이미 사람들은 첫 모임을 끝내고 나가려고 하던 찰나였다. 첫날부터 지각이라니 지금 생각해도 최악이지만 면접 스터디를 하고자 하는 목적은 잊지 않았기에 잽싸게 스터디 구성원을 스캔하였다. 최악. 남자 5명에 여자 1명. 초수 때는 그래도 남자 셋 여자 셋으로 훈훈했는데 남자 5명에 여자 1명이라니 내가 생각했던 화사한 면접 라이프와는 거리가 먼 남녀 비율이었다. 그래도 아쉬운 판국에 뭐라도 가릴까 싶어 홍일점인 그녀를 좀 더 자세히 보았다. 여자치고는 큰 키에 마른 몸, 긴 생머리, 하얀색 코트. 동글동글한 얼굴에 안경. 흠. 훗날 여자친구가 자기 첫인상이 어땠냐고 물었을 때는 나는 1초도 생각하지 않고 한눈에 반했다고 말했지만... 말해 놓고 항상 미안했다. 거짓말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밋밋했다. 많이 밋밋 했다. 이번에도 꽝이구나 생각했다. 뭐 내 인생이 뭐 잘 풀릴 거라 생각도 않았기에 면접 준비만 열심히 하자는 의욕이 솟구치기에 충분하였다.

인연은 물 건너갔지만 스터디는 제대로 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들었고 나는 급하게 저녁 먹고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첫 모임부터 나만 제대로 인사도 못 한 체 가버리면 다음 부터 100% 어색한 체 시작할 게 뻔하였기에 나온 아이디어였다. 내 제안에 동의 한 사람은 총 3명이었다. K형, B군 그리고 그녀. 우리들은 근처에 있는 새마을 식당에 들어갔다. 처음 생각은 저녁만 먹는 거였지만 20대 후반 남녀가 모이는데 물론 저녁만 먹고 끝낼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연스럽게 테이블에는 이슬이가 놓였고 어색한 자리는 술로 조금씩 바뀌기 시작했다. 다들 술이 들어가면서 이런저런 자기 이야기를 꺼내 면서 분위기는 달아 오랐다. 여러 얘기가 오고 갔지만 지금 기억에도 제일 인상 깊고 웃겼던 이야기는 그녀 본인 이야기였다. 그 당시 그녀의 첫 인상은 좀 차가운 편이였는데 술이 사람을 바꾼건지 원래 그런건지 그녀는 내 생각보다 솔직하고 재미있고 밝은 사람이었다. 나를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도 놀랄 정도로 첫 만남 부터  그녀는 매우 솔직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냈다. 어느 정도로 솔직하게 얘기했냐면 거짓말 없이 딱 그 때 느낀점을 표현하면 ' 와 골 때리네'. 이 한 마디로 모든걸 압축할 수 있을 정도 였다. 이게 그냥 느낌으로 끝났으면 모르겠는데 특이한 대상을 보면 생기는 호기심. 오글 거릴 수 있지만 이 호기심이 지금 생각하면 모든것의 시작이였다. 정말로 내가 10분만 늦게 도착했다면, 저녁 식사를 함께 하지 못했다면,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지 못한 체 스터디만 했었다면 정말로 내 운명은 많이 바뀌었을 것이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말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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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예전에 여자 친구 만나러 가는 길로 피쟐에 글을 쓴 이후로 두 번 째로 글을 써보는 쪼렙 유저입니다.
여자 친구에 대한 기억들이 희미해 지기 전에 글로서 좀 남겨 두고자 예전 부터 고민 하던 찰나에 앞으로 하는 일이 바빠지면 기회가 없을 것 같기에 용기를 내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글을 쓰는 목적 중에 하나가 기억의 기록이기에 한 번에 다 쓰기에는 분량이 좀 많아서 나눠서 쓸 예정입니다. 필력이 많이 부족하지만 잘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글을 읽으시는 분 중에 혹시라도 절 아시는 분이 계시면 제 나름대로 차곡차곡 정리하기 위한 노력이라 봐주시고 모른 척 넘어가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참고로 혹시라도 이렇게 글을 끊어서 쓰는게 문제가 된다면 나중에 한번에 모아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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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8/19 09:12
수정 아이콘
아아, 그때도 정말 짠 했었는데요.
잘 읽고갑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15/08/20 09:21
수정 아이콘
댓글보다 추천이 많은... 기이한 글.

먼저 예전에 쓰셨다는 글 찾아 읽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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