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 소련의 붕괴는 정말 모두에게 찰나처럼 다가왔습니다. 베를린 장벽의 "현시적"인 붕괴가 89년 11월 10일이었다면 고르바초프의 소비에트 연방 해체 연설로 종료된 소련의 붕괴는 91년 12월 26일 오전 2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지 2년이 조금 넘은 시점에서 소비에트연방과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이 차례로 붕괴할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소련 붕괴가 충격이었다면 중동지역의 반미친소 성향을 띤 국가들이나 세력들은 당장 생존을 모색해야했습니다. 소련은 중동지역에서의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서 나세르의 이집트를 시작으로 붕괴 직전까지 다국적군과 이라크간의 걸프전쟁에 관해 중재하려는 외교적 시도를 했었죠. 사브라-샤틸라 학살 시점에도 길길히 날뛰며 이스라엘을 전범으로 명시한 결의안을 통과시켜야한다고 주장한 국가도 소련이었고, 베이루트에서 자국 외교관이 인질로 잡히거나 살해당했을때도 보복작전에 나서 팔레스타인 테러리스트와 그 가족에 대한 보복을 했지만 PLO와 아라파트를 외교적으로 도와준 것은 소련이었습니다. 아무리 아랍 지역들이 유가로 압박을 넣어도 국제외교에서는 소련의 헛기침이 더 강력했거든요.
여기에 가자-서안 지구에서 벌어졌던 제1차 인티파다의 상황도 좋지 못했습니다. 4년째 이어지는 동안 이스라엘은 태도가 바귀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강경해졌습니다. 단적으로 88년 총선에서 이츠하크 샤마르가 이끌던 강경 우익 리쿠르당이 다른 우익 정당들과 연립하며 대연정이 종식되자 팔레스타인 시위대에 대한 대처는 강경일변도였습니다. 군대를 투입해 화염병과 돌로 전차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 시위대를 잡아다 정말로 팔을 부러뜨리는 것을 해댔고 이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국제적으로 온갖 비난을 들었지만 이스라엘은 강경진압을 멈출 생각이 없었습니다. 당시 급변하는 세계 상황에서 팔레스타인 편을 들어 직접 개입할 국가도, 세력도 없었습니다. 이스라엘 군은 불시에 팔레스타인 남성들을 소집해 폭행하고 고문했고, 가택수사 한답시고 집에 최루탄을 던지고 집에서 나온 사람들을 폭행했거든요. 이츠하크 라빈의 "팔레스타인 놈들의 팔다리를 부러뜨려라"라는 명령이 있었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이스라엘의 진압책은 일관되게 폭력적이었습니다.
이 와중 나온 것이 바로 이슬람 저항운동, 바로 하마스입니다. 하마스에 관해서는 다음에 또 이야기 할 일이 있을테니 미뤄두고, 외교적 지원도 거의 사라지다시피하고 세계의 관심 역시도 구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벌어진 내전과 학살 상황에 집중된 상황은 이스라엘과 PLO에게는 일방적 선택을 강요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을 강요한 것은 미국이었습니다.
미국은 냉전기간동안 과팽창된 군에 대한 규모와 그에 따라 투입된 예산, 그리고 외교적으로 과도하게 투입된 미국의 외교자원 투자를 줄이길 원했습니다. 안그래도 유고슬라비아 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만해도 골치아픈데 팔레스타인 지역에서 벌어지는 유혈사태는 더이상 원하지 않았습니다.
완전히 고립된 팔레스타인과 PLO를 처치하면 되지 않아 싶지만, 이스라엘도 국제사회에서 온갖 욕을 바가지로 들어먹은데다 오랜 무력투사와 이에 따른 국제적인 경제봉쇄 등으로 인해 어찌됐던 외교적 고립을 해결해야했습니다. 이 와중에 미국은 압력을 가해 팔레스타인과 화해하라고 지그시 압박을 가하고 있었죠.
1993년 이스라엘과 PLO 사이에는 비밀 협정이 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PLO를 테러리스트로 인식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격적 협상은 계속 결렬되고 있었죠. 결국 미국의 압박 등으로 이스라엘이 PLO를 협상 상대로 인정한 뒤에야 협상이 제대로 시작됩니다. 이 시점이 93년 9월 9일이었습니다.
당시 PLO측은 야세르 아라파트와 파타 중앙위원 중 한명이자 당시 팔레스타인 개발 및 재건 경제협의회 이사인 아메드 쿠레이가 협상가로 나섰고, 이스라엘 측에서는 이미 협상 프로세스에 참가하고 있던 언론인 론 푼닥과 하이파 대학교 강사이자 학자인 야이르 히르쉬펠트를 시작으로 전 이스라엘 외무부 국장 출신의 우리 사비르를 협상팀장으로 하고 이에 요시 베일린 등이 참여했으며 시몬 페레스 이스라엘 외무장관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도 이에 관여했습니다.
체결된 오슬로 협정은 이스라엘 군 철수와 이스라엘-팔레스타인 간 경제협력, 지위 인정 및 권력 이양 등에 관한 것을 포함 17개 전문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먼저 임시 자치 협정에 관한 원칙선언, 혹은 간략한 원칙 선언이라 불리고 우리에게는 워싱턴에서 떨떠름한 표정의 이츠하크 라빈 이스라엘 총리와 억지로 웃는 듯한 야세르 아라파트 PLO 의장이 악수하고 그 뒤에서 포용하는 듯한 빌 클린턴이 찍힌 사진으로 유명한 오슬로 1차 협정, 웨스트뱅크와 가자지구에 대한 핵심 협정으로 이집트 타바에서 체결된 오슬로 2차 협정이 체결되었습니다.
이-팔간의 평화협상 프로세스는 일견 좋은 결과를 보여주는 것 처럼 보여주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오슬로 협정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대로 미국의 제한 압력에도 네타냐후 정권은 기존 이스라엘 정착지 내에서 건설을 계속했고 심지어는 동예루살렘 지역에 하르 호마라는 이스라엘 정착지 건설 계획을 발표했습니다. 오슬로 협정 이전에 1만4천 호 가량의 주택을 건설했고 오슬로 이후에는 약 3600 호로 급격히 줄어들기는 했으나 정착지를 위한 주택 건설은 계속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협상 과정에서 옵저버였던 노르웨이는 장소만 제공할 뿐이었고 협상 과정에서의 협상 기록이나 협상안에 관한 기록도 단 한장 남기지 못했습니다.여기에 해당 당사자들은 노르웨이에게 협상 자료나 회의록 등을 제공하는 것을 거부했죠. 실제로 이 오슬로 협정 협상을 연구한 노르웨이 학자들은 이렇게 문서가 누락되었는데 오슬로 협정이 지속 가능한 평화로 이어질수 없는 이유를 확실히 보여준 것이 이 문서 누락사건이라고 비판합니다. 이스라엘을 옹호하는 측 역시 이 오슬로 협정은 팔레스타인 국가와 하마스를 나치 독일 이후 어느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강도의 반 유대 / 이스라엘 선동으로 통치해 팔레스타인 신세대들을 급진화 시켜 이-팔간 가장 유혈적이고 파괴적인 갈등 국면으로 몰아넣었다고 비교합니다. 팔레스타인을 옹호하는 측은 이스라엘에는 무조건적 안보, 팔레스타인에는 조건부 안보를 제공했고 국가 지위를 향한 팔레스타인의 열망을 약화시켜 팔레스타인 자치 한계를 공식화 해 실제 내용이 없는 국가의 흔적만을 제공했다고 비난합니다.
특히 이스라엘 내에서는 이러한 협정을 합의한 당시 총리인 이츠하크 라빈과 시몬 페레스에 대한 비판과 분열로 이어집니다. 특히 94년 이츠하크 라빈, 시몬 페레스, 야세르 아라파트는 오슬로 협정을 통해 노벨 평화상을 수상했고, 당시 라빈은 수상 강연에서 "세계 곳곳에 있는 군인 묘지는 국가 지도자들이 인간 생명을 성화하는데 실패했음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라고 발언합니다.
오슬로 협정으로 분열된 이스라엘 사회는 라빈에 대해 평화의 대의를 진전시킨 영웅으로 보는 측과 당연하게 이스라엘에 속해야 하는 가자와 웨스트뱅크를 포기한 반역자라고 보는 측으로 갈라집니다. 여기에 이스라엘 극우는 테러에 희생된 유대인들은 라빈이 오슬로 협정을 맺었기 때문이라고 라빈을 공격합니다.
그리고 95년 11월 4일 텔아비브 이스라엘 왕 광장(현 라빈 광장)에서 열린 오슬로 협정 지지 집회에 참석한 라빈은 오슬로 협정에 반대한 극우주의자 이갈 아미르에 의해 암살당합니다. 그리고 이갈 아미르는 곧바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습니다.
라빈에 관해서 극우뿐만이 아니라 리쿠르당 지도자들도 오슬로 협정에 관련해서 비난 일색이었고 극우 성향의 랍비들은 딘 로데프라고 하는 전통적인 살해명령을 내리기도 했으며 리쿠드당과 우익단체들은 라빈을 아돌프 히틀러, 노동당을 나치 친위대로 그려넣고 라빈은 살인자이자 반역자라고 비난했으며 네타냐후는 반 라빈 집회에서 라빈에게 죽음을이라는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와 함께 라빈의 관과 교수형 올가미를 갖춘 모의 행렬을 이끄는 등 라빈에 대한 살인 명령에 가까운 집회를 가두에서 이끌었습니다. 여기에 이런 라빈 암살 음모에 관한 제보에 관해서도 무시하는 행동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라빈이 암살당한 이후 네타냐후는 이런 폭력적 선동을 이끌 의도까진 없었다며 변명하기 바빴죠.
하지만 이렇게 평화를 반대하던 사람들에게 암살당했다고 해서 라빈이 메나힘 베긴처럼 실제적인 평화주의적인 대책을 세워야한다고 생각한 사람은 아니라고 봅니다.
그가 1~4차 중동전쟁에 모두 참여했고 특히 3차 중동전쟁의 핵심적 역할을 했던 사람이었으며 이후로도 엔테베 작전에서의 무력 투입을 직접 승인한 사람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어찌보면 그가 할 수 있는 선택안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1985년 8월 웨스트뱅크에 대해서 과거 영국위임통치 시대의 법안을 부활해 재판없이 구금, 주택 철거, 언론기관 폐쇄, 활동가 추방 등의 강경책과 1차 인티파다 당시 뼈파괴자라는 멸칭을 세계적으로 들었음에도 폭력 진압책을 고수했고 88년의 아부 지하드 암살작전, 메이둔 헤즈볼라 요새 파괴작전, 89년 7월 레바논 집칫에서 헤즈볼라 지도자 세이크 압델 카림 오베이드와 그 측근 2명 납치 작전 등 일관적으로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반 이스라엘 세력에 관해서는 민간인이든 팔레스타인이나 이스라엘과 관계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강경책을 일관한 것을 볼때 이츠하크 라빈 역시도 뒤늦게나마 평화를 깨달은 사람이기보단 외교적 상황에 따라 어쩔수 없이 평화의 길로 강제적으로 내몰렸던 인사로 보는게 합리적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어찌되었던 이츠하크 라빈의 죽음으로 인해 안그래도 그 미래가 투명하지 않았던 이-팔 간 평화프로세스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헤브론 의정서, 와이 강 각서 등으로 오슬로 협정을 유지하려는 움직임을 보였지만 당시 주도권을 쥔 이스라엘의 총리가 베냐민 네타냐후라는게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2001년 9월 11일 결국 일이 터집니다.
그날, 세계 무역 센터와 미 국방부에 납치된 민항기들이 격돌합니다. 그리고 그에 희생된 민간인들에게 지불되어야할 피의 부채는 팔레스타인 사람들도 지불해야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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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다극화 시대에 어디가 팔레스타인 편을 들어줄까요.
중동 국가들도 이집트는 남쪽의 수단과 에티오피아에 집중하는것 같고 사우디나 걸프권 국가들은 이란경계에 신경쓸꺼고 터키는 역시 이란 그리고 아제르바이잔-아르메니아 갈등에 더 신경쓰겠죠.
이란이야 어느정도는 도와주려고 할수도 있으나 액션이 크면 걸프국가들과 미국이 그 기회를 안놓칠거라서 제한적일겁니다.
중국은 대양도 못나가고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상대도 버겁습니다.
앞으로 팔레스타인에서 피가 흐르겠지만 어디도 실질적인 도움없이 구호만 외칠것 같고 그걸아는 이스라엘은 더 강경하게 가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