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노량>을 보고 왔습니다. 처음에는 <노량> 한 편에 관한 글을 쓸까 했는데, 3부작을 아울러 이야기를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3부작을 전반적으로 살펴보되, <노량>에 좀 더 무게 중심을 두고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이하는 평어체로 쓰였습니다)
장점과 단점이 뚜렷한 3부작
세 작품이 다른 면모가 있긴 하지만, 큰 틀에서 보자면 사실 장점과 단점이 거의 비슷한 느낌이다.
장점
- 훌륭한 해상 전투 묘사
- 고증이 나쁘지 않음
단점
- 안타까운 각본 (특히 대사)
- 촌스러운 시나리오 (특히 국뽕과 신파)
장점과 단점을 따져보면 <명량>은 아주 극과 극을 달리는 수준이었고, <한산>은 단점을 많이 보완한 느낌이었다면, <노량>은 <명량>과 <한산> 그 어딘가 중간쯤에 있는 기분이다.
다만 <한산>에서 단점을 많이 보완한 느낌이었는데, <노량>에서 다시 퇴보한 듯한 느낌이 들어서 그게 참 아쉽다. 예를 들면 시마즈 요시히로(백윤식)는 '리순신'이라는 똑같은 대사를 계속해서 내뱉더라. 뭐, 상황에 맞는 대사이긴 한데, 쓸 말이 그것밖에 없었나 싶을 정도로 안타까웠달까...
시나리오 측면에서도 무언가 촌스럽고 오글거리는 듯한 감성이 되돌아온 기분이었다. 특히 이순신(김윤석)의 죽음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1절만 해라...'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뇌절까지 가버리는 모습이었다. (북채에 총이 맞은 건 진짜 좀 심했다) 개인적으로는 아들의 환상을 보는 씬이 끝나고 총에 맞은 이순신이 부축받으며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가 나왔으면 적절하지 않았을까 한다.
시나리오 측면에서 3부작을 통틀어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순신이라는 인물이 '사람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이순신의 고뇌를 어쩌고저쩌고하는 기사글을 몇 개 본 것 같은데, 솔직히 입체적인 면모는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평면적이더라도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이 구체적으로 그려졌으면 또 모르겠다. 이순신은 그냥 서 있기만 해도 다 해결하는 느낌이랄까... 사람이 아니라 '군신'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리고 <노량>에서는 그런 면이 더 심해진 것 같다. 아들의 죽음이라는 내적 갈등의 요소가 분명하게 있음에도 '이순신은 절대 흔들리지 않는다'는 면만 강조되어서 더 사람 같지가 않아 보이더라. (근데 이거야말로 고증 잘한 것 아닙니...)
결론적으로 김한민 감독의 이순신 3부작은 '신의 손과 원숭이의 뇌'가 만든 트릴로지라고 생각한다. 전근대 해상 전투 묘사는 개인적으로 세계 원탑이라고 칭찬할 정도지만, 서사적인 측면에서는 '아... 저렇게 하지 말고 이렇게 하지...'라는 말이 절로 나올 정도로 아쉬운 모습이 많았다.
그래서 순위는?
먼저 언급해야 할 점이 있다. 여기서 언급하는 순위는 내 개인적인 취향에 관한 것으로 절대 진리나 정답이 아니다. 아마 사람마다 느끼는 순위가 다를 것이라 생각하고, 특히 김한민의 이순신 3부작은 그 차이가 다른 트릴로지 작품보다 심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장점과 단점이 매우 뚜렷하기 때문이다.
그럼 나는 3부작 중에 무엇을 최고라고 생각했을까? 평소 영화 리뷰 글을 많이 썼던지라 작품성 중심으로 평가하게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노량>을 보고 난 뒤 느낀 순위는 다음과 같았다.
1. <명량>
2. <노량>
3. <한산>
이유는 이야기 자체의 힘이었다. 연출이나 기타 영화적인 평가를 완전히 배제하고 이야기 자체만 놓고 본다면, 솔직히 <명량>은 개사기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상황 자체가 '고난 극복'이라는 정석 스토리인 데다가, 그 전개 과정도 '이게 말이 돼?' 수준이지 않은가? 그에 반해 <한산>은 별로 위기감도 없고, 승부도 쉽게 난 느낌이라 맥이 빠졌다.
물론 이렇게 본다면 "그럼 그냥 역사 자체가 순위인데, 이 순위가 매겨지는 데 감독이 한 게 뭐임?"이라고 할 수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명량>을 최고로 재밌게 봤다는 내 경험을 부정하고 싶지도 않다. 나는 정말 <명량>의 말도 안 되는 승리가 즐거웠다.
하지만 이는 작품성이라든가, 감독의 연출력이라든가 하는 것들을 따지지 않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극히 개인적인 순위라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이순신 3부작은 어떤 의미가 될 수 있을까?
솔직히 '걸작'이라는 말을 붙일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점이 너무나 명확하고, 그것이 관람을 방해할 정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상 전투 묘사는 걸출했고, 국민적 감성을 자극했다는 업적은 인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해상 전투 묘사는 앞에서도 언급했으니 이쯤하고, 국민적 감성을 자극했다는 점을 왜 칭찬하는지 이야기하고 싶다.
이소룡의 전기를 다룬 작품으로 <드래곤: 브루스 리 스토리>라는 영화가 있다. 이소룡 집안에 내려온다는 저주를 주요 소재로 삼아 만든 전기 영화라, 솔직히 추천할 만한 작품은 아니고 괴작에 가깝긴 하다. 이 영화는 동양에 대한 서양의 잘못된 편견이 담긴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 작품이다. 그런데 영화의 중요 주제 중 하나가 인종차별에 대항하는 이소룡의 모습이었다. (인종차별을 꾸짖는 인종차별 영화;;;) 특히 <당산대형>의 개봉 때 많은 동양인들이 이소룡의 등장만으로도 위로를 받고, 감격에 겨워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나는 이 장면이 꽤 인상적이었고, 지금도 뇌리에 강하게 남아 있다.
그래서 <블랙 팬서>에 대한 할리우드의 반응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예전에 글도 썼지만 <블랙 팬서>는 당시에 개봉했던 다른 MCU 작품들에 비하면 아쉬움이 많았다. (하지만 지금 보면 선녀...) 그런데 이 작품은 역대급 흥행을 했고, 심지어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에 올라야 한다는 여론까지 생겼다. 나는 그 모습이 <당산대형>을 보면서 감격했던 동양인들의 마음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흑인들 입장에서는 흑인이 노예가 아니고, 열등하지 않고, 히어로물의 주인공이라는 점에 열광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우리에게 이순신이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다. 한반도의 역사와 문화를 공유하는 사람이라면, 이순신이라는 존재가 주는 가슴 벅차오르는 무언가가 있다. 그걸 '국뽕'이라는 말로 함축하는 것은 좀 모자란다는 생각이다.
김한민의 이순신 3부작은 여러모로 아쉬움이 많다. 그럼에도 이순신이 우리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분명하게 보여준 작품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물론 한 발 더 나아가 이순신의 입체적인 면모를 드러내고, 그의 삶을 치열하게 되돌아보는 작품이 되었으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예를 들면 영화 <동주>가 다룬 윤동주처럼) 하지만 이순신의 영웅적이고 국민적인 위상을 담아낸 작품이 하나 정도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나에게 김한민의 이순신 3부작이 어떤 의미로 남았냐고 누가 묻는다면, "한국인에게 이순신이란 무엇인지 보여준 작품"이라고 말하고 싶다. 사실 그렇기에 이순신이 사람이 아니라 '군신'처럼 묘사된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물론 작품성을 깎아 먹는 요소이기는 하나, 나에게 이순신은 그런 대접을 기꺼이 받아 마땅한 영웅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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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이 어떻고 무기 체계가 어떻고까지 따지려는 건 아닌데, 나와야 될 인물이 나오지 않고 나오지 말아야 할 인물이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문제가 제법 있다고 봅니다. 명량 때 나대용이 나온 것 같은 게 대표적인데, 하나하나 열거하는 게 별 의미는 없을 듯해 이만 줄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