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본투표는 시작도 안 했지만, 문재인씨가 대통령이 될 것이 유력하죠. 해서 그 '이후' 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습니다.

저는 2012년에 문재인씨에게 투표했었습니다. 당시에 제가 썼던 글을 좀 찾아보니, 투표 하루 전날 쓴 글에서 이런 문구를 남겼었네요.

"문재인 후보가 당선되어서 문재인의 국민으로 살고 싶습니다. 박 후보를 지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당연한 거지만 박 후보가 대통령이 되면 그분이 좋은 대통령이 되었으면 합니다."

사실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될 때 그분이 좋은 대통령이 될 확률이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기적 같은 일이 벌어지기를 바랐던 마음은 진심이었죠. 그리고 문재인씨는 대통령이 되지 못했습니다.

낙선 이후에, 문재인씨에게 뭔가 해주고 싶었습니다. 비참하게 죽은 노통의 전철이 자꾸 생각나서, 비록 졌지만 본인 스스로를 너무 폄하하지 않기를 바랬었지요. 재기를 꿈꾼다면 재기할 여지를 남겨드리고 싶었고, 만약 은퇴한다면 마음 편하게 은퇴할 수 있기를 바랬습니다. 그러다가 82쿡이라는 육아 커뮤니티에서 문재인씨 낙선 위로 광고를 위한 모금을 한다길래 저도 소액 보태고 피지알에서도 광고했었습니다.
아래가 그 결과로 만든 광고입니다. 시사인에도 올리고 한겨레에도 올렸었던 기억이 납니다.





여기까지 읽으셨으면 짐작 가능하시겠지만, 저는 굉장한 문빠입니다. 이번 대선에서 문재인을 지지한다고 해서 문빠는 아닙니다. 제가 문빠라고 지칭한 집단은, 문재인에 대한 무비판에 가까운 열광이 있는 사람들을 지칭합니다. 약간의 자학적 표현이라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습니다.

근데, 문빠이면서도 저는 이번 대선에서 투표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미국에 살기 때문에 사전투표 대상이었습니다) 미국 거주민들 대상의 사전투표가 지금보다 훨씬 더 열악했던 시절에도 1박2일로 투표소까지 가서 투표했었으니, 귀찮아서 안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번에는 서너 시간만 투자하면 투표가 가능했었거든요. 주변에서 누가 왜 투표 안 했냐고 물어보면 "사실 나는 영주권도 발급받아 미국에 반영구적으로 사는 사람인데, 한국에 언제 돌아간다는 기약도 없는 사람이 한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투표에 동참하는 것이 뭔가 좀 아닌 것 같다" 라고 대답하곤 했었는데, 사실 그건 진짜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투표를 안 한 진짜 이유는, '한국은 5년 전에 문재인을 선택하지 않고 박근혜를 선택했다. 근데 그 결과로 만들어진 난장판을 왜 문재인이 책임져야 하나?' 에 가까웠습니다. 다만 저 문장을 읽으실 때 약간 주의가 필요한데요, 저게 뭐 한국인은 국개다 같은 차원의 이야기는 전혀 아닙니다. 당시 박근혜를 찍은 사람들이 그 양반이 이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인 것을 알 방법도 없었고, 저도 이 정도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의 선택 자체는 이해합니다. 그런 맥락의 이야기가 아니라, 남의 똥 치우는 데 5년을 보내면서 정치권의 좌우 정당과 언론, 그리고 대부분의 국민으로부터 욕만 먹을 미래가 너무 훤해 보였기 때문에, 그런 고생 하지 않기를 바랬던 마음이 컸습니다.

도대체 이 시점에서 사드 관련해서 깔끔한 해법이 있을 것 같지 않습니다. 재협상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사드 배치는 돌이킬 수 없을 거고, 그 결과 왼쪽에서 욕을 먹겠죠. 그 와중에 오른쪽에서도 '나라면 재협상 더 잘할 수 있었다' 라고 할 겁니다.

경제가 단기간 내에 좋아질 거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더 나빠지지 않으면 다행이죠. 그 결과 오른쪽에서 욕을 먹을 겁니다. 앞으로 국제 경제 사이클이 좀 호황이 된다는 말은 있긴 한데, 그러면 좀 낫긴 하겠지만 그래도 욕은 먹을 겁니다. 노통때 경제가 실제로 나빠서 욕을 먹은 게 아니거든요. 그 와중에서 왼쪽에서도 '부자들한테서 세금 많이 걷으면 다 해결되는데, 문재인도 결국 부자들 편이다' 라고 하겠죠.

공무원 숫자를 본인이 공약한 만큼 늘릴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청년 실업 역시 크게 나아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 결과 젊은이들한테 욕을 먹을 것 같습니다.

아마 언론에서는 그동안 꼬리 내리고 살던 9년은 없었던 셈 치고 이제부터 갑자기 언론 자유!!!! 를 외치면서 문재인 정부 정책을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뜯을 겁니다. 이게 무서운게, 물어뜯는 내용 하나하나는 딱하니 틀리지 않을 겁니다. 당연히 문재인 정부도 많은 실책을 저지를 거고, 실책이 아니더라도 부작용이 있을 거고, 실책도 없고 부작용도 없는 정책이더라도 효과가 당장 눈에 보이진 않을 겁니다. 그럼 그 하나하나를 욕하는 '자체' 에는 아무 논리적 무리가 없을 거고 다 맞는 말일 거에요. 맞는 말만 하더라도 그 맞는 말들을 '선택적으로' 하면, 정부 지지율 낮추는 것은 그렇게 어렵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차마 표를 주지 못했습니다. 제가 사전투표를 기권하던 당시만 해도 안철수 후보가 잘 나가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에이 뭐 문재인이 안 하더라도 안철수가 그럭저럭 잘할 것 같다" 라고 생각했었고요. 어차피 자한당은 지역정당으로 몰락하는 분위기였고, 꼭 문재인이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괜찮은 대통령이 나올 것 같았습니다. 저는 안철수씨를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홍준표씨와 비교당할 사람이라고 생각하진 않았고,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근데 지금 분위기는 너무 다르네요. 안철수씨는 15% 걱정해야 하게 되었고 홍준표씨를 내세운 자한당은 완전 부활하는 분위기네요. 탄핵이라는 철퇴를 맞은 것이 반년 전인데 이미 본인들이 진정한 보수고 문재인은 종북좌빨 포퓰리스트라고 하네요. 해서 사전투표를 기권한 것이 너무 후회되는 요즘입니다. 이럴 때일수록 지지율을 0.001% 라도 올려줄 필요가 있는 것 같은데, 너무 급하게 선택을 (저에게 기권은 능동적인 선택이었습니다) 했었나 봅니다.

하여튼, 제 개인의 선택과는 무관하게 문재인씨가 대통령이 되긴 할 것 같습니다. 대통령을 하지 않기 바랬지만, 시대의 흐름이 문재인씨를 요구하나 봅니다. 아마 대통령이 되면 위에 이야기한 것처럼 욕만 처먹는 5년이 될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자리에 올라가는 문재인씨를 보는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해서, 비록 표는 주지 못했지만, 문재인씨가 집권하고 나면 한동안은 '무비판적 지지' 를 함으로써 도움을 주려고 합니다. '비판적 지지'는 저 말고도 많이들 할 테니, 웬만하면 선의를 믿어주고, 웬만하면 문재인 정부에서 내놓은 정책이 나름 최선이라고 믿어주고, 이런저런 실패를 해도 다음에는 더 잘 하겠지라고 믿어주는 사람도 좀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저야 문빠지만 다른 후보를 지지하는 분들도 다들 나름의 이유가 있겠지요. 모두들 투표 잘하시고 저녁에 개표방송 즐겁게 보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