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라는 것의 이미지를 이렇게 한 번 상상해봅니다.

고무줄에 매달린 여러 개의 거대한 모래주머니들이 내 눈 앞에 있고, 나는 그 중 하나를 택해 한 스푼의 모래를 더하는 역할을 맡았다고요.

당연히 모래가 많이 담기는 주머니일수록 더 무겁게 내려앉는 거고요. 모래 담기가 끝났을 때, 가장 바닥에 가까운 주머니가 당선되는 거죠.

이미 수많은 스푼들이 얼추 주머니를 택해 모래주머니들의 높이가 정해져가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한 스푼이 당선이라는 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줄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선거에서 저는 모래주머니의 선택에 망설임이 없던 스푼이었습니다. 모래주머니가 걸리기 전부터 일말의 고민없이 내가 가진 한 개의 스푼을 들고 특정 주머니 앞에 오매불망 줄을 서던 명료한 유권자였죠.

심지어 "부동층" 이라는 것의 실존에 대해서 의심하기도 했었습니다. 이렇게 엄청난 이벤트에 있어서, 누구에게 투표할지 정하지 못한다는 것이 과연 가능한 걸까. 여러가지 이유에서 그저 밝히지 않는 것일 뿐이겠지. 하고요.

그런데 그러던 제가 이번 선거에서 처음으로 그 "부동층"이 되었습니다. 당장 선거가 다음 주인 지금까지도, 솔직히 누구를 찍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그리고 지금, 이전까지의 선거들에서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입니다.
늘 같은 줄에 서 있곤 하던 스푼들로부터 느껴지는 낯선 적대감. 처음부터 주머니가 정해져 있었기에 오히려 소홀하게 되던 구체적인 공약들. 무엇보다 꼭 당선이 아니더라도 각각의 주머니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의미들이 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선거에서 가장 많은 모래가 담기기를 바라는 주머니는 문재인입니다. 저와 많은 부분에서 이해가 어긋나고, 제 눈에는 지나쳐보이는 선명성이 불안하며, 때로는 그를 향하는 많은 스푼들의 공격성에 반감이 들기도 하지만요. 그래도 이번 선거가 가지는 의미와 시대정신은 문재인을 가리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문재인에게 투표하고 싶습니다.

주관적 선호에 따라 제가 모래를 주고 싶은 주머니는 안철수입니다. 선명성보다는 유연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저에게는 그의 신중함과 상황에 따른 판단의 변경이 오히려 믿음을 줍니다. 말꼬투리 잡고 통쾌하게 반격하거나 막말과 비아냥을 섞으며 따박따박 말싸움에서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자신이 잘 아는 분야를 말할 때의 신뢰감, 연설이든 토론이든 공부하고 노력하여 생각보다 빠르게 부족함을 보충하며 발전해가는 모습이 좋습니다. 이미 상당히 추락한 지지율, 한때는 반문의 대안으로 양강까지 올라섰던 그가 이제는 차순위도 위협받고 있습니다. 그의 발전해가는 모습을 응원하는 한 사람으로서, 정치인 안철수의 차후 입지마저 걱정될 정도로요. 그래서 안철수에게 투표하고 싶습니다.

유승민의 바른 정당은 저에게 남다른 의미였습니다.
제가 한국 정치에 가장 바라는 궁극적인 열망은 친일 극우 군부 지역주의 세력의 군소화, 최소한 납득할 수 있는 보수 정당으로의 대체였습니다. 탄핵정국을 맞으며 정말로 그것이 가시화되는듯도 했습니다. 최소한 돼지발정제 같은 건에 부끄러워 할 줄 알고, 박근혜의 무능과 부패에 선을 긋고자 하고, 논리와 정책으로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쇼라도 하는, 그래서 비판조차 통하지 않는 뻔뻔함의 벽만은 걷어낸 그런 정당이 새누리를 대체할지도 모른다는... 그런 꿈을 꾸었습니다. 바른정당이 여기서 산화한다면, 홍준표의 자한당이 새누리당을 그대로 복원시킨다면, 그건 문재인의 당선으로도 희석되지 않는 시대정신의 반동일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유승민에게 투표하고 싶습니다.

노동이 당당한 나라. 다섯 후보들 중 가장 인상적인 캐치프레이즈 하에 처음으로 진보정당이 유의미한 존재감을 획득해가고 있습니다. 단지 누군가를 "떨어뜨리기 위한" 트롤러가 아니라, 각종 이슈에 대해서 진보적인 주장을 피력하고 분명한 하나의 세력으로서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물론 운동권 특유의 구시대적이고 이분법적인 색채를 아직 벗지 못한 아쉬움도 큽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분배와 소수자에 주목하는 심상정의 따뜻함이 좀 더 많은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전파되기를 바랍니다. 내가 소수자라서, 내가 소수자인 이슈에서만, 딱 나까지만, 분배하고 양보하고 배려하자는 또다른 계급논리가 아닌, 이념과 철학으로서의 평등이 보다 보편화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심상정에게 투표하고 싶습니다.



선게의 많은 분들은 이미 본인들의 모래를 덜어줄 후보를 택하신 것 같아 보입니다. 선명한 선택이 전제된 의견들이 오고가는 정든 커뮤니티 내에서, 처음 맞이해보는 부동층으로서의 역할은 가끔 외롭기도 합니다. 제가 그새 나이가 들어서 그런지, 아니면 이번 선거의 특수성 때문인지, 참 생각도 많습니다.
어쨌거나 선거는 며칠 앞으로 다가왔고, 투표는 반드시 할 겁니다. 어떠한 선택이든, 제가 보태는 한 스푼의 모래가 한국의 민주주의 발전에 방해만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덧붙여 피지알의 다른 부동층 여러분, 에라 모르겠다 귀찮은 마음이 들더라도, 더 많이 알아보고 더 치열하게 고민합시다. 꼭 투표합시다. 내가 보탠 모래주머니가 바닥에 닿아 당선되는 것만이 의미는 아닌 것 같습니다. 각자 진정으로 목표하고 있는 높이는 다르더라도, 어떠한 의미에 한 스푼을 보태는지에 따라 그 주머니의 무게는 달라질 겁니다.